제38화. 함정 (2)
그 뒤 바 ‘3월’의 일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배송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취급하는 주종도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로 짰고, 과일이나 음식 재료들은 번거롭더라도 시장과 마트를 여러 번 오가며 직접 공수했다.
집주인과 협상해 가게 문 쪽에 CCTV도 새로 달았고, 택배로 보이는 상자는 뜯지도 않고 주차장 한쪽에 쌓아두었다.
시영은 출퇴근을 줄곧 무휼과 함께하게 되었다. 무휼은 시영이 출근 시간대에 그녀의 집 앞에서 대기하다 그녀를 만나 함께 출근했고, 퇴근할 때는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녀는 무휼을 볼 때마다 한숨을 내쉬거나 불편해하긴 했지만 고생한다며 음료수를 사주거나 호원과 먹으라고 간식거리를 싸주곤 했다.
손님들은 당분간 2시에 마감이라는 말과 줄어든 주종에 불만을 표시했지만, 그마저도 호원이 ‘조만간 빅 이벤트를 준비 중이라 그러니 당분간만 참아달라’고 웃으며 말하자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그런 손님들의 반응은 그의 말보다는, 어딘지 일을 꾸미는 악동 같은 호원의 얼굴에 넘어가 나온 것처럼 보였다.
영악한 그 미소를 볼 때마다 남자건 여자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걸 보면 틀림없다고, 무휼은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가 호원의 그 얼굴 앞에 멀쩡할 수 있다는 자신은 물론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시에 주문 마감은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런 생활을 한 지 보름을 넘길 즈음이었다. 종종 얼굴을 비추는 손님이 바 위에 턱을 괴고 칭얼거렸다. 그러나 평소 호원에게도 지지 않는 유쾌한 입담의 그녀마저 호원의 미소 한 번에 그만 항복해 버렸다.
“그런데 요즘 이 일대가 뒤숭숭한 모양이던데, 다들 괜찮은 거예요?”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흘려 넘기기 어려운 말에 호원은 물론, 곁에서 셰이커를 흔들고 있던 시영의 시선까지 그녀를 향했다.
“얼마 전에 이 근처에서 여자 한 명이 납치당할 뻔했다잖아요.”
“납치요?”
호원이 놀란 얼굴로 손님에게 되물었다. 손님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뉴스에도 나왔는데 못 봤어요? 이 근방에서 귀가하던 사람한테 어떤 남자가 갑자기 달려들었대요. 근데 얼굴을 확인하더니 그냥 도망쳤다더라고요.”
노리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거죠. 그녀는 그렇게 덧붙이고는 목이 마르는 듯 앞에 놓인 칵테일을 홀짝홀짝 들이켰다.
그녀의 말에 호원의 시선이 흘긋 시영을 향했다. 시영은 허리께에 셰이커를 든 손을 축 늘어뜨린 채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
호원의 강경책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그 뒤로 한동안 바 ‘3월’의 일상은 조용히 지켜졌다. 손님들도 바뀐 시간대에 익숙해졌고, 마감이 너무 빠르다는 원성도 점차 잦아들었다.
매출이 줄어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호원은 직원들에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시영과 무휼은 호원을 걱정했지만, 애써 밝게 웃는 호원에게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휴일을 앞둔 날이 돌아왔다.
시곗바늘이 2시를 조금 넘어갈 무렵, 마지막 손님이 바를 나섰다. 평소보다 다소 이른 시간이었다.
“자, 자. 다들 퇴근해! 뭐 하고 있어?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얼른 들어가 봐.”
손님을 배웅했던 호원이 박수를 짝짝 치며 들어와 말하자,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홀 서빙 직원은 신이 나서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설거지를 하던 시영이 고개를 들어 가게 안을 훑어보았다. 아직 테이블 곳곳에 빈 잔과 그릇들이 나와 있었고, 청소며 마감까지 하려면 할 일이 많았다.
“벌써요? 다 정리하려면 혼자서는 무리일 텐데.”
“괜찮아, 괜찮아. 이 일 하루 이틀 하나, 뭐? 내일은 쉬는 날이겠다, 문제없어. 요즘 이 일대 뒤숭숭하다니까 다들 얼른 집으로 들어가.”
그녀의 걱정 어린 말에 호원이 웃으며 시영의 등을 떠밀었다. 뭐라 반박하려던 그녀는 호원의 뒷말에 별수 없이 고무장갑을 벗었다.
“이런 시간에 퇴근이라니….”
시영이 얼떨떨한 얼굴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런 그녀의 옆에 무휼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섰다. 그러고는 호원을 향해 말했다.
“금방 다녀올 거니까 기다려. 뒷정리 도울 테니까.”
여전한 반말이었지만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호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휼이 시영의 출퇴근 길에 동행하는 것도 익숙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질색을 하던 시영도 이제는 체념한 듯,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무휼의 뒤를 따랐다.
호원은 재밌다는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이전, 왜 그렇게 무휼의 호위를 싫어하냐 물었더니, 시영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대답하던 게 기억난 것이다.
‘쓸데없이 시선이 쏠려서 부담스러워요.’
평소의 무휼을 생각해 보면 호원으로서도 이해가 안 가는 말은 아니었다.
시영은 직업과는 별개로 유독 남들 눈에 띄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무휼과 같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꽤나 괴로운 꼴을 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잖아도 시영 본인 역시 상당한 미인이라서,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남들의 시선을 끌기 딱 좋았다.
‘그래도 위험한 것보다는 나으니까.’
호원은 질색하던 시영의 얼굴을 떠올리며 즐겁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테이블 위의 접시와 잔을 거둬 트레이에 얹는 손이 여유로웠다.
***
“역시 부담스러워.”
시영은 으, 하고 신음을 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옆에서는 무휼이 무덤덤한 얼굴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시영은 어깨의 가방을 고쳐 메며 흘긋 무휼의 옆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듣기로는 계속 밖으로 나다닌다던데.’
영업 시간을 조율한 덕에 호원이나 다른 직원들이 쉴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무휼은 남는 시간에도 밖을 돌아다니며 순찰 같은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호원은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저러다 혹여나 무휼이 쓰러지기라도 할까 전전긍긍하는 게 시영의 눈에는 뻔히 보였다.
그러나 정작 권무휼을 걱정하는 호원의 상태도 비슷비슷했기에, 시영은 매일매일이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걸음을 재촉했다.
느긋하게 걷는 것 같은데 보폭이 넓어서인지, 무휼은 유독 걸음이 빨랐다. 괜한 오기심에 시영도 속도를 올리자 돌연 무휼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시영이 톡 쏘아붙이자 무휼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그대로 어깨만 으쓱하더니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걸음은 방금 전보다 확실히 느려져 있었다.
‘확실히 나쁜 애는 아닌데….’
시영은 가늘게 뜬 눈으로 무휼을 흘긋거렸다. 얼굴 잘생겨, 운동하는 애라 몸도 좋지, 매너는 나무랄 데 없고, 인기도 많고, 심지어 가끔 목소리를 깔 때는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뇌쇄적이다.
얼핏 보기만 해도 완벽해 보이는 권무휼이었지만, 시영은 여전히 그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 이유라면 꽤 단순했다. 호원이 곤란해하니까.
그 곤란함이 어떤 감정을, 어떤 상황을 기반해서 나타나는지는 아직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시영의 입장에서는 소중한 인연인 호원을 괴롭힌다는 것만으로도 무휼을 적대할 이유가 충분했다.
뭐, 그것이 무휼 본인의 의도한 일이든 아니든 말이다.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지만 매일같이 그녀의 출퇴근을 함께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휼은 싫은 티 한번 내지 않고 그녀를 바래다주었다.
그런 상대에게 쌀쌀맞게 구는 건 도무지 양심에 찔려 못 할 일이었다.
시영이 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정면만 보며 걷던 무휼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향하는 새파란 눈과 딱 마주치자, 그녀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근처 테이크아웃 카페를 검지로 가리켰다.
“뭐, 마실래?”
그녀 자신이 듣기에도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무휼은 잠자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카페로 시선을 옮겼다.
길거리에 흔히 보이는 카페였다. 테이크아웃 전문이라 안에 앉을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24시간 운영하는 곳이라 이 시간에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시영이 괜히 말했나 싶어 후회할 즈음, 무휼이 입을 열었다.
“그럼 아메리카노로.”
“차갑게?”
시영이 냉큼 묻자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시영은 화색을 띠며 카페로 달리다시피 걸어갔다. 커피 두 잔을 주문하는 그녀의 뒤에서 무휼은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근데 너 원래 커피 마셨던가?”
계산을 마친 시영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휼은 피식 웃었다.
“예전에 누가 사준 게 처음이었는데, 맛있더라고.”
말을 하는 표정이 부드러웠다. 그토록 온화한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시영은 조금 놀랐다.
***
각자 얼음이 잘그락거리는 커피를 한 잔씩 들고 걸어가던 중이었다. 무휼이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뒤를 흘긋 쳐다보았다.
“…왜, 왜 그래?”
심상치 않은 기색에 시영이 긴장해서 물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무휼은 아무렇지 않게 걸음 속도를 유지하며, 시영에게만 들리도록 낮게 말했다.
“누가 따라오고 있어.”
그의 말에 시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커피 컵을 쥔 손이 달달 떨렸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들의 뒤로 왜소한 덩치의 남자가 따라 걷고 있었다.
저벅저벅 걷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시영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야.”
거친 목소리는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섞여 한층 위압적이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영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모습을 본 무휼이 뒤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거칠게 숨을 내쉬느라 상체를 들썩거리며 시영의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 나 알지.”
그 말에 무휼이 시영 앞을 막아섰다. 시영은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너 내가 경고했잖아. 아무 남자한테나 꼬리 치지 말라고. 근데 얼마나 됐다고 또 이래?”
말하는 뉘앙스가 미묘했다. 아는 사람인가 싶었지만 말하는 내용을 봐서는 좋은 인연은 아닌 모양이었다.
무휼이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뒤에 선 시영에게 말을 걸었다.
“아는 사람?”
그러나 시영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넌 또 뭐야? 그년 새 남친이냐?”
남자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흥분해서인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면 너도 조심해. 그년, 남자 꼬시는 데 선수야. 한 번 대줄 것처럼 굴다가 사람을 강간범으로 몰아서 경찰에 넘기는 꽃뱀 같은 년.”
질 낮은 말에 무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남자가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가로등 불빛 밑으로 들어오자 그제야 남자의 손에 들린 부엌칼이 눈에 들어왔다.
망했네. 무휼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