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37)화 (37/101)

제37화. 함정 (1)

“무휼아, 그건-”

호원이 말을 채 맺지 못하며 무휼의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를 내려다보았다. 그 표정에 짙게 깔린 걱정과 불안함을 눈치챈 무휼이 부러 아무렇지 않게 봉투를 쓱 들어 보였다.

“요 앞에서 팔더라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그가 가까운 테이블 위에 봉투를 턱 올려놓았다. 그 안에서 플라스틱 용기에 포장된 떡볶이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심한 듯, 호원과 시영이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니는 사람 몰골이잖아. 이러다 그 새끼 잡기도 전에 다 쓰러지겠더라.”

무휼은 툴툴거리며 봉투 안에서 튀김이며 순대 따위를 계속해서 척척 꺼내놓았다. 대충 보기에도 3명이 먹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양이었다.

호원은 슬쩍 시영을 곁눈질했다. 무휼 때문에 끊어졌던 대화를 다시 꺼내볼까 했지만, 이미 테이블에 가 앉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다시 말을 꺼내긴 어려워 보였다.

별수 없이 테이블에 앉은 호원이 젓가락을 들었다. 무휼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플라스틱 용기의 비닐을 잘라내고 튀김이 담긴 종이봉투를 먹기 좋게 펼쳐놓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호원은 그와 이렇게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게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서로 안 마주치려고 했으니까.’

무휼은 호원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인지 대놓고 그를 피해 다녔다. 바에서 일할 때에도 가급적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집에는 호원이 잠들고 나서야 들어가선 호원이 일어나기도 전에 나갔다.

아무리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지만, 그런 식의 생활 방식이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리 없었다.

‘…말랐네.’

호원은 소매 사이로 보이는 무휼의 손목을 가만 보며 생각했다. 남자답게 굵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목이었지만, 이전에 비해서 확실히 눈에 보이게 말라 있었다.

더 이상은 무리다. 그런 확신이 호원의 뇌리에 떠올랐다.

모두가 쭈뼛거리며 테이블 위의 음식들로 젓가락을 댔다. 그러다 시영과 무휼이 튀김을 떡볶이 국물에 찍느냐 간장에 찍느냐로 설전을 벌였고, 기다렸다는 듯이 호원이 순대 옆에 펼쳐놓은 소금을 가리키며 끼어들었다.

세 사람은 강박적일 정도로 그 이야기에 몰두해서 토론을 벌였다. 그러고 있자니 이 모든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 평범하고 별거 아닌 이야기가 고플 정도로, 세 사람은 지쳐 있었다.

얼마 만인지 감흥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에 흡족한 식사였다. 많다 싶던 양의 음식은 조금도 남지 않고 세 사람의 배 속으로 사라졌다.

무휼은 빈 플라스틱 용기를 요령 좋게 척척 쌓아 한 손에 들더니, 다른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일어섰다.

“이거 치우고 올게. 그리고….”

무휼의 시선이 슬쩍 호원을 향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 결심을 굳힌 듯 호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파란 눈을 이렇게 직접 마주하는 게 얼마 만인지. 호원은 순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바라보고 있자면 빨려들 것만 같은 가을 하늘처럼, 청명한 색상이었다. 그 눈으로 호원을 꼼짝 못 하게 잡아둔 무휼이 말했다.

“혹시 내 속옷, 빨았어?”

“…어?”

호원은 그만 멍청한 목소리를 내버렸다.

무휼은 머쓱한 듯 어색한 얼굴로 시선을 슥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어… 아냐. 내 거 빨 때 같이 들어갔나 봐.”

호원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 옆에서는 시영이 ‘남정네 둘이 뭐 그런 대화를 그런 표정으로 하냐’는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다.

“이, 일단 올라가. 내가 찾아놓을게.”

“아니, 그게 아니라-”

호원이 벌겋게 물든 얼굴로 손사래를 치자, 무휼이 다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듯 전전긍긍하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호원은 그제야 무휼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챘다.

“아, 그래. 그거 찾기 좀 어렵지? 지금 찾아줄게. 같이 올라가자. 시영아, 괜찮지?”

“예에, 부디 마음대로 하세요.”

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호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무휼의 등을 떠밀어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이번엔 또 뭐야?”

현관문을 닫자마자, 호원이 성급하게 물었다. 아직 신발도 벗기 전이었다.

신발장에 우두커니 선 무휼은 말없이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한 손에는 다 비운 플라스틱 용기를, 다른 손에는 그것들이 들어 있던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무휼은 그중 비닐봉지를 호원 쪽으로 슥 내밀었다. 호원은 의아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비닐봉지인데, 안을 열어보니 작게 접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편지?”

“종류로 따지자면 그렇겠지. 앞에 ‘협박’이란 단어가 붙긴 하지만.”

무휼의 말에 호원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꺼내 펼쳤다. 종이에는 검붉은 색으로 적힌 글씨가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검붉은 색의 잉크가 무엇일지는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

호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상당히 악취미적인 편지였다. 심지어 내용도 가관이었다.

안에는 ‘죽어’라는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A4용지 크기의 종이에 가득 쓴 것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글씨들은 하나같이 어그러져 있었고, 군데군데 번진 것을 보니 필체를 숨기려 잘 쓰지 않는 손으로 쓴 모양이었다.

“아까 가게 문에 끼어 있던 걸 찾았어. 급한 김에 일단 들고 있던 봉투에 숨겨놨었는데, 당신한테는 말해놔야 할 것 같아서.”

무휼이 눈짓으로 호원의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를 가리켰다. 호원은 그의 말에 당장 무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 움찔대는 손을 가까스로 억눌러야 했다.

“잘했어. 시영이한텐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

“벌써 몇 번째야. 수법도 점점 대담해지는 것 같고. 그리고 당신이-”

무휼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의 시선이 붕대가 감긴 호원의 왼손에 닿아 있었다.

“당신이… 계속 다치잖아.”

잘생긴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무휼의 손이 호원의 왼손 언저리까지 올라왔다가 멈칫했다. 바르르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쥔 그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푹 숙인 고개가 처량해 보였다. 발끝을 향한 시선 때문에 호원의 시야에는 그의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는 모습이 잘 보였다.

당장에라도 그 뺨을 감싸 고개를 들어 올리고 싶었다. 눈을 맞추고 괜찮다고, 네 탓이 아니라고 다독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호원은 그러는 대신, 무휼의 커다란 손에 들려 있던 플라스틱 용기를 빼앗듯 받아 들었다.

“이건 내가 버릴 테니 넌 내려가. 시영이 혼자 오픈 준비하고 있잖아.”

무휼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절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호원은 이미 신발을 벗고 있었다.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잠시 쳐다보던 무휼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현관을 나섰다.

현관문의 도어록이 닫히며 발랄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호원이 벽에 몸을 기댔다. 그의 눈이 식탁 테이블 위에 나란히 올려둔 플라스틱 용기와 편지를 향했다.

‘역시 이상해.’

아무리 김진수의 수법이 대담해졌다 한들, 그는 이제껏 줄곧 절제되고 영리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인물이 갑자기 이토록 감정적으로 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슬슬 끝이 보이는군.”

호원의 시선이 검붉은 글자가 빼곡한 종이 위를 찬찬히 훑었다.

당하기만 하는 건 그의 성정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미끼로 쓸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놈을 잡는 법. 그 계획이 호원의 머릿속에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

“영업 시간을 줄이겠다고요?”

시영은 반쯤은 경악이 담긴, 그리고 반쯤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에 호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응. 오픈은 그대로 하고, 마감 시간을 두 시간 당길 거야. 2시에 마감하고 3시에는 모두 퇴근할 수 있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오너-”

시영이 곤란한 얼굴로 호원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바 ‘3월’의 고객들은 대부분에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바의 문턱을 넘는다. 그들에게 2시 마감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고객들에게 달갑지 않은 소식은 매상으로 직결될 터였고, 매상이 떨어지면 제일 곤란한 것은 바의 오너인 호원이었다.

“…괜찮겠어요?”

시영이 호원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원이라고 손님들이 제일 흥이 올라 있을 시간에 가게를 마감하는 게 좋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다른 것보다도 직원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야. 맘 같아서는 당분간 가게 문을 닫자고 하고 싶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시영이 말을 흐렸다. 호원은 웃고 있었지만, 말투만큼은 단호했다. 그녀는 호원이 이미 마음을 굳힌 것을 직감했다. 오랜 경험상 이런 때의 그는 남의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대신 한숨만 푹푹 내쉬며 내려두었던 과도를 다시 들었다.

그녀가 알아들었다는 걸 확인한 호원은 쓰게 웃더니, 옆에서 난처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던 무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휼이 너는 가게 일보다는 다른 일을 맡아줬으면 해.”

“다른 일?”

무휼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원이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하리란 생각조차 못 하고 있던 얼굴이었다.

사고 치다 걸린 강아지처럼 놀라는 그의 모습에 호원이 피식 웃었다.

“너는 앞으로 시영이 보디가드야.”

“뭐?”

“네?”

대답은 무휼과 시영에게서 동시에 들려왔다. 시영이 내팽개치다시피 과도를 내려놓더니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호원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무휼이는 앞으로 시영이 출퇴근 길에 동행해 줘.”

“하지만-”

“권시영.”

호원이 팔짱을 끼며 시영을 돌아보았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얼굴에 시영이 입을 다물었다.

호원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해 보이는 그녀에게 피식 웃어주고는 무휼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무휼이 너를 직접 노리지 않아. 지금까지 패턴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러니 다음 타깃은 우리 중에 제일 약한 시영이가 될 확률이 높아.”

“하지만 그럼 당신이 무방비해져.”

“난 걱정할 필요 없어.”

확신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무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호원은 활짝 웃으며 이어 말했다.

“이런 놈들 수법은 내가 제일 잘 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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