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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36)화 (36/101)

제36화. 반격

호원은 응급실 침대에 상체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무휼과 시영이 간이 의자에 앉은 채 의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차트를 팔락거리며 살펴보던 의사는 붕대가 감긴 호원의 왼손을 흘긋 보고는 탁, 소리가 나게 차트를 덮었다.

“다행히 근육이나 신경이 상한 건 아닙니다. 스친 것뿐이니까 한동안 왼손은 쓰지 않도록 하시고 물에 닿지 않게 조심하세요.”

입원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고, 치료 끝났으니 퇴실하시면 됩니다. 피곤한 얼굴의 의사는 담담하게 설명하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다행인 일이었지만, 한밤중에 괜히 유난을 떤 것 같아 호원은 민망해졌다.

너무 대충인 거 아니냐며 울컥하려는 무휼을 뜯어말린 호원이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영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만 쳐다보던 시영이 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안쓰러울 정도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연신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호원은 그런 그녀를 가만 쳐다보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가게는 어떻게 했어?”

“일단… 손님들은 돌아가 달라고 했어요. 어차피 이 상태로는 다들 제대로 일 못 할 테니까.”

“그나마 입 무거운 분들만 있었던 게 불행 중 다행인가….”

호원이 실없이 웃었다. 그에게는 당장 제 손이 다친 것보다 ‘바 ‘3월’의 오너가 가게에서 테러를 당했다’는 소문이 도는 게 더 곤란한 일이었다.

“미안한데 시영아, 뭐 마실 것 좀 사다 줄래? 목이 좀 말라서.”

“아, 그건 내가….”

“부탁할게, 시영아.”

무휼이 앉아 있던 간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심부름을 자처했지만, 그의 말은 호원의 단호한 말에 끊어졌다. 시영은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호원은 응급실의 자동문 너머로 작아지는 그녀의 등을 가만 쳐다보다가 무휼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휼은 차마 그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자신 때문에 호원이 다쳤다는 것에 그는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절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호원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휼아.”

나직한 목소리에 무휼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더 이상 안 되겠다고 하면 어쩌지? 당장 짐 싸서 나가라고 하면? 선수 생활이고 뭐고, 지금이라도 경찰에 신고할까? 무휼의 머릿속이 연달아 떠오르는 부정적인 가정들로 어지러웠다.

순간, 시야 안으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불쑥 들이닥쳤다. 깜짝 놀란 무휼이 어깨를 움찔하자, 손가락은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그의 뺨을 감쌌다.

“괜찮아.”

담담한 말이었지만 그래서 더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무휼은 뭐라 말할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꾹 다물었다. 할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괜찮으니까 미안해하지 마.”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뺨을 감싼 손이 천천히 무휼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가 호원의 눈을 마주했다.

“그러지 마….”

괜찮다고 하지 마.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무휼이 이어 말했다. 선명하게 푸른 눈동자가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다쳤잖아, 당신.”

잔뜩 주눅이 들어 갈라진 목소리였다.

무휼은 한숨을 삼키듯 숨을 들이켜더니 두 눈을 질끈 감고 뺨을 감싼 호원의 손바닥에 고개를 기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위로 긴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웠다.

“당신을 다치게 했잖아.”

주어가 생략된 말이었지만 호원은 그가 누굴 말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의미 없는 위로를 하는 대신 손을 옮겨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휼은 잠자코 호원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말 잘 듣는 대형견 같은 모습에 호원은 피식 웃어버렸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무휼은 여전히 강아지 같은 녀석이었다.

그 모습에 방심해서일까. 호원은 무휼이 별안간 상체를 일으켜 제 몸 위로 덮쳐왔을 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아래에 깔려 버렸다.

“너 뭐 해?”

당황한 호원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무휼은 팔로 침대를 짚어 체중을 받치고 호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무휼이 호원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들었다. 붕대가 감긴 곳을 피하며 천천히 손을 움직이는 것이 꼭 쉽게 깨지는 유리라도 대하는 듯 섬세했다.

긴장해서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호원은 경건하기까지 한 그의 행동에 몸의 긴장을 풀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거즈와 붕대로 칭칭 감긴 손에 뜨겁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호원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채 제 손에 입을 맞추는 무휼을 쳐다보았다.

“약속해.”

머릿속에서는 이성이 당장 잡힌 손을 빼라고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의 몸은 남의 것처럼 호원의 명령을 무시했다.

심해처럼 깊고 푸른 빛깔을 띤 채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홀린 것만 같았다. 온몸에 붕대라도 칭칭 동여맨 것처럼 온몸이 그의 맘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무휼은 목적은 그것뿐이었다는 듯, 이내 몸을 물려 도로 간이 의자에 앉았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당장이라도 삼켜 버릴 듯 덮쳐왔던 것이 꼭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금욕적인 태도였다.

멍하니 있던 호원이 정신을 차린 건, 품 안에 이온 음료를 잔뜩 끌어안고 돌아온 시영이 뭘 먹겠느냐 물었을 때였다.

“어? 어… 그냥 아무거나 줘.”

호원은 시영이 건네는 패트병을 받아 들고는 멍하니 생각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꼭 늑대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제야 얼굴에 열이 확 오르며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

그때, 차가운 음료를 쥐고 있던 손에 따듯한 무언가가 닿았다. 화들짝 놀란 호원이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이미 무휼의 손이 그의 손안에서 패트병을 가져간 뒤였다.

“손. 아프잖아.”

무휼은 덤덤하게 말하며 패트병의 뚜껑을 따 다시 호원의 손에 쥐여주었다. 호원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좀 쉬자. 준비하고 나와. 택시 잡아둘게.”

무휼은 그렇게 말하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벌떡 일어서서 응급실을 나갔다. 호원은 괜히 헛기침을 해서 정신을 다잡고는 옆에 앉은 시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영아, 가자.”

“…….”

그러나 시영은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건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의아해진 호원이 허리를 숙여 얼굴을 쳐다보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 뭐라고요?”

“집에 가자고.”

호원의 말에 시영이 아.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허둥지둥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닌 태도였다.

“너 괜찮아?”

호원이 의심쩍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시영은 부산스럽게 짐을 챙기다 말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호원은 그녀 역시 자신이나 무휼과 마찬가지로 눈 밑이 거뭇하게 물들어 있다는 걸 실감했다. 눈치채고 있던 것이 새삼 눈에 띈 것은 그 정도가 유독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걸까? 호원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그의 눈에 시영은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게….”

시영은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호원의 왼손을 향했다. 잠시 그 손을 쳐다보던 그녀가 이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냥, 좀 놀라서 그래. 눈앞에서 친한 오빠가 다쳤는데 멀쩡하면 그게 사람인가, 뭐?”

“…그래?”

호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뭔가 숨기는 게 있다. 몇 년이나 호원과 함께 고생하며 가게를 꾸려온 시영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웃을 때와 억지웃음을 지을 때를 호원은 금방 구분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본인이 숨기고 싶은 일이라면 먼저 묻기가 애매했다. 언젠간 말해주겠지 싶어, 호원은 애써 농담을 던지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래서 그 일이 터졌을 때, 호원은 진작 캐묻지 않았던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언제나 시간을 칼같이 지키던 시영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돌연 지각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분, 10분. 그러려니 할 수 있을 만큼 소소한 일이었다. 항상 출근 시간 10분 전에는 바에 도착해 있던 시영이라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웠지만, 그럼에도 굳이 캐물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시영의 출근 시간이 기어이 30분을 넘어가자, 호원은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판단 내렸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

오픈 준비를 위해 의자를 정리하던 호원이 슬쩍 운을 띄웠다.

시영은 본가가 지방이라 몇 년 전부터 홀로 자취를 하고 있었다. 혹시 집주인이나 이웃과 무슨 트러블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싶어 물어본 말이었다.

그러나 빗자루를 든 채 멍하니 서 있던 시영은 그의 말을 못 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시영아?”

호원이 다시금 목소리를 내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어? 저 불렀어요?”

“응. 무슨 일 있나 해서.”

어색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이 일순 흐려졌다. 순식간에 본래의 잔잔한 미소로 돌아왔지만, 눈치 빠른 호원이 못 보고 지나칠 수준이 아니었다.

저건 분명, 뭔가 있는 거다. 호원은 확신했다.

“말을 해, 시영아. 혼자 속 썩이지 말고.”

“그런 거 아니에요.”

시영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는 그에게 설핏 웃어 보였다. 그러나 피로가 짙어 거뭇한 눈과 핏기없는 얼굴로 그런 말을 한들,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너 지금 상태 안 좋아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지?”

호원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시영은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호원은 그런 그녀가 갑갑했지만, 더 말을 잇는 대신 한숨만 내쉬었다.

가뜩이나 피곤해 보이는 사람 붙잡고 닦달하느니, 본인이 말할 때까지 두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다 문득, 그는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희미한 기억 속에 분명 지금과 비슷한 대화를 시영과 했었던 것이 떠올랐다.

홀 청소를 하며 입김이 돌던 때였으니 겨울이었을 것이다.

겨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간 호원의 머리를 스치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너 혹시 또….”

“둘 다 있었네.”

호원의 말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남자의 목소리에 뚝 잘렸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막 바 안으로 들어서던 무휼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만만찮게 피로해 보이는 그의 푸석한 얼굴을 쳐다보던 호원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의 손에는 검은색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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