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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35)화 (35/101)

제35화. 선공당했다

잔잔한 수면일수록 파문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커터칼 사건 이후 바 ‘3월’에는 옛날과 같은 태평하리만치 여유로운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시영은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지만, 작은 소음에도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게다가 밤에 잠을 잘 못 자는지 얼굴이 까칠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대체 이게 몇 번째야? 계속 이따위로 할 거면 안 나오는 게 오히려 도움이라고.”

시영이 답지 않게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쏘아댔다. 수면 부족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해서일까, 오늘 무휼은 연달아 주문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미안.”

“됐으니까 가서 재고 확인이나 해. 홀에 더 있을 필요 없어.”

무휼을 닦아세운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무휼이 입술을 잘근거리며 그녀를 보다 시선을 들어 호원을 돌아보았다.

평소라면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을 호원이지만, 그는 못 들은 척 글라스를 닦고 있었다.

최근 들어 무휼은 답지 않게 실수를 하는 일이 늘었고, 그럴 때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호원의 눈치를 봤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호원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무휼과의 거리감은 지금 이대로가 딱 좋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사실, 호원이라고 마냥 태평한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무휼에게 앙심을 품은 놈이 있고, 그놈의 타깃은 이미 무휼에서 바 ‘3월’로 넓혀졌다.

범인을 잡는 것. 그것이 지금 호원에게는 무엇보다도 최우선시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무휼이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그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낭패였다.

그리고, 집중해야 하는 건 무휼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실마리가 잡히질 않는군.’

호원은 닦던 글라스를 내려두고 생각에 잠겼다.

가게 주변 CCTV는 이미 한차례 뒤져봤지만,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인 데다 건물주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서인지 진즉에 전원이 나가 있던 상태였다.

집주인은 CCTV가 고장 난 것도 몰랐다며 앞으로는 주의하겠다 했지만, 설렁설렁 대답하는 표정에는 귀찮고 성가시단 기색이 역력했다.

‘차라리 신고를….’

거기까지 생각했던 호원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경찰에 신고하는 건 마지막 수단이었다. 까딱 잘못했다가 매스컴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무휼의 선수 생활에도 영향이 갈 테고, 바 ‘3월’의 이미지마저 안 좋아질 수 있었다.

설마 무휼의 인지도가 그 정도일까 싶어 안이하게 생각했던 호원은, 우연히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입력해 보았다가 기겁을 했다.

유독 눈에 띄는 얼굴 때문인지, 재능 때문인지, 아니면 그 둘 다 갖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스포츠계에서 권무휼은 상당한 인기 스타였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호원의 머릿속에서 일을 크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대번에 지워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호원은 경찰을 잘 믿지 않았다. 사람이 다친 것도 아니고 화재가 난 것도 아니니, 경찰에서는 끽해 봐야 주변 순찰을 강화하겠단 입에 발린 말만 해댈 게 뻔했다.

매번 그렇게 넘겨 버린 불티가 커다란 화재로 번지는 걸, 호원은 이미 여러 번 목격했다. 무휼의 말에 의하면 상대는 어린애 한 명. 그들 선에서 조용히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오너, 휴식 시간이에요.”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생각에 잠겨 있던 호원이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시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

“가서 좀 쉬고 와요. 그리고 오늘 물건 들어올 거 있으니까 여유 되면 그것도 받아주고요.”

“알겠어.”

호원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안쪽을 지나 나오는 뒷문에는 작은 창고가 딸려 있었다. 바 안에 정리해 두기 어려운 물건들은 그곳에 정리하고 있었다.

호원은 창고와 뒷문 사이에 1인용 소파를 꺼내두고 그 위에 눕듯이 기대앉았다.

소파는 가게가 한가할 때 좀 쉬려고 구매한 것이었지만, 결국 직원들이 짬짬이 돌아가며 쉴 때에나 겨우 쓰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가게가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다는 셈이니 좋아해야 하나 생각하며, 호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막상 몸을 눕히니 그동안 참아왔던 피로가 단숨에 몰려왔다.

아닌 게 아니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무휼과 사는 것은 그에게도 꽤나 피로하고 신경을 갉아 먹는 일이었던 것이다.

가게 일을 마친 무휼이 밖으로 나가 범인을 찾는 동안, 그는 혹시라도 범인이 집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무휼이 범인에게 해코지를 당하고 병원에 실려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낮 동안에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 손에 휴대폰을 쥐고 꾸벅꾸벅 존 것이 수면 시간의 전부였다.

몸의 피로가 한계에 다다르니, 정신은 조금의 휴식에도 흐려지며 수면을 종용했다. 호원은 자꾸만 감기는 눈을 문지르며 정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때, 누군가 뒷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호원은 튕기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경계심 어린 얼굴로 뒷문 쪽을 쳐다보니, 또다시 쿵쿵 하고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택배입니다. 사인 부탁드려요!”

그제야 호원은 시영이 물건을 받아달라 부탁했던 것을 떠올렸다. 잔뜩 긴장한 채로 꽉 움켜쥐었던 주먹이 스르륵 풀렸다.

살짝 문을 열자, 적어도 마흔은 넘겼을 것 같은 중년의 남자가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안에 있었으면서 왜 바로 나오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는 듯했다.

적어도 무휼의 동년배는 절대 아니군. 호원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긴장을 완전히 풀었다. 배달원이 내민 서명란에 대충 사인을 하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호원은 묵직해 보이는 커다란 상자 두 개와 비교적 크기가 작은 상자 하나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큰 상자 쪽은 시영이 발주한 주류 품목일 테고, 작은 쪽은 측면에 ‘유리, 취급 주의’ 표시가 붙어 있는 걸 보니 이전에 주문했던 글라스가 드디어 온 듯했다.

괜히 설레발 친 것이 민망해, 호원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고는 큰 상자를 가뿐히 들어 창고 안에 넣어두고 작은 상자 하나만 덜렁 든 채 주방을 나섰다.

차라리 일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저 소파에 앉아 있다가는 그대로 마감 시간까지 잠들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

바의 안쪽에 쭈그리고 앉아 남은 술과 과일들을 확인하던 무휼은 마지막 술병을 제자리에 돌려두고는 허리를 쭉 폈다.

홀을 한번 둘러보는데, 주방 쪽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오는 호원의 모습이 보였다.

무심코 말을 걸려던 그는 이내 무언가에 가로막힌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는 호원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섣불리 다가섰다간 다음 기회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어영부영 시간만 흐르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이호원은 연약한 살을 끌어안고 가시를 잔뜩 세워 주변을 경계하는 고슴도치 같았다.

무휼은 자신이 가시에 찔리는 것 따위야 아무 상관도 없었지만, 막무가내로 달려들다 그 가시에 호원 본인도 상처를 입을까 겁이 났다.

‘답답하다.’

무휼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한숨을 애써 눌러 삼키며 호원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영과 호원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뭐예요? 또 이상한 건 아니겠죠…?”

“아냐, 내가 주문했던 글라스인데 이제야 왔나 봐. 제대로 택배 확인하고 온 거니까 안전할 거야.”

“그래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시영이 그의 설명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무휼은 피 묻은 커터칼을 발견했을 때 눈에 띄게 두려워하던 시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록 짧은 시간 봤을 뿐이지만, 무휼이 아는 권시영이란 여자는 고작 피 묻은 칼 정도로 벌벌 떠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유독 날이 서 있는 것 하며, 초조한 기색으로 연신 주변을 살피는 모습은 명백히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영 감이 안 좋은데. 뭐 말 못 할 비밀이라도 있나?’

무휼은 고개를 기울인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막 손님에게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꺄아아악!!”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바 안을 가득 울렸다. 무휼은 물론이고 바 안의 모두가 일시에 정지한 것처럼 멈췄다.

무휼은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동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권시영이 하얗게 질린 얼굴은 한 채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방금 전의 비명은 그녀가 내지른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호원!!”

무휼이 들고 있던 트레이를 내던지며 호원에게 달려갔다.

호원은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붉은색의 액체가 흘러내려 바닥에 똑똑 떨어졌다.

무휼은 호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시영에게 버럭 소리쳤다.

“뭐 하고 있어? 당장 구급차 불러!”

그의 호통에 멍한 눈으로 덜덜 떨고 있던 시영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퍼뜩 놀라 휴대폰을 찾았다.

무휼은 호원의 손부터 살폈다. 다친 부분은 손바닥인 듯했고, 다행히 출혈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제야 조금 안심한 무휼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 테이블 위에 호원이 가져온 작은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유리, 취급 주의’라고 적힌 상자 안쪽에서 굵은 용수철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날카로운 아이스픽이 꽂혀 있었다.

상자를 열면 공격당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야말로 악의에 가득 찬 선물이었다.

김진수. 그놈이다. 무휼이 이를 으득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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