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아무렇지 않은 척
달칵, 하고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선명하게 울렸다.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와중엔 작은 소음마저도 커다랗게 들렸다.
그래서일까, 무휼은 마른 입술을 재차 핥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호원의 얼굴을 흘긋 쳐다보았다. 신발을 벗으려 허리를 숙인 옆모습에서는 그 어떤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이 자리에 무휼이 없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밥은 냉장고에 있는 거 알아서 찾아 먹고, 옷도 네가 저번에 쓰던 거 같은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까 마음대로 써.”
‘그게 왜 아직 그대로 있어?’라고 물으려다, 무휼은 이를 꾹 악물었다. 어째서인지 그 말을 내뱉으면 이대로 집에서 쫓겨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있고 싶은 만큼 있으라 했던 이전과는 달랐다. 이제 호원은 언제든 무휼을 이곳에서 내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무휼은 새삼 자신의 입장을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난 피곤해서 먼저 씻는다. 아, 이불도 그 방 옷장 안에 있으니까 꺼내서 쓰고.”
호원은 담담하게 설명하고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나는 물소리를 들으며, 무휼은 거실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어쩐지 자신이 이곳에 들어와 있다는 게 영 현실감이 없었다.
이곳에 있던 기간보다 떠나 있던 기간이 더 길 텐데도, 무휼에게 있어 호원의 집은 오래 지냈던 집처럼 안락하고 그리운 장소였다.
“…돌아왔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무휼은 제 말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정신 차려, 권무휼. 너 여기에 그 새끼 잡으러 온 거야. 조금이라도 흑심 비치는 순간 내쫓기는 거라고.
고개를 거세게 저은 무휼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그 행동을 후회했다.
‘…젠장.’
공기 중에 호원의 잔향이 가득 남아 있었다. 직업 때문일까?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호원에게서는 항상 상쾌하면서도 은은하게 단 향이 났다.
그대로 맡고 있다가는 씻고 나온 호원에게 수작이라도 부릴 것 같아, 무휼은 다급하게 제 방으로 들어섰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집이건만,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다지 녹록지는 않을 것 같았다.
***
“어쩌자고 집에 들였을까.”
호원은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였다.
무휼에게 그런 짓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가게에까지 그딴 물건을 보낸 범인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짓을 한 그 팔을 모조리 분질러 버리고 싶었다.
그다음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범인의 타깃이 가게라서. 혹시 만에 하나의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대처할 수 있는 범위 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범인이 그 칼을 무휼의 집으로 보냈더라면, 가뜩이나 정상적이라고는 보기 힘든 그 집에서 또 무슨 난리가 났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러고 보니 가족 얘기는 애매하게만 들었네.’
집 안에 귀와 눈이 많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복잡한 가정인 것 같아 부러 캐묻진 않았지만, 적어도 이번 일과 같은 상황에서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있는 집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호원은 하루라도 빨리 범인을 잡을 생각이었다.
놈이 노리는 건 권무휼이다. 그렇다면 무휼을 눈 닿는 곳에 두고 감시하면서 놈이 다시 움직이길 기다리는 게 가장 빠른 길일 터였다.
그러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권무휼에게 흔들리면 안 된다.
호원은 마음을 다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정수리를 타고 흘러내린 물줄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참았던 숨을 단번에 터트린 그가 벽을 짚었다. 충분히 데워지지 않아 미적지근한 물이 내리 맞은 몸은 이미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수전을 내린 그가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훑어 내렸다. 거울 속의 이호원이 힐난하듯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기대하게 하지 마. 어차피 넌 받아주지도 못할 상대잖아.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호원은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범인만 잡고… 홀가분하게 나갈 수 있도록 해주자.”
그 후에 좀 더 괜찮은, 받은 사랑을 돌려줄 줄 아는 사람을 만나 마음껏 사랑하도록 보내주자.
결심을 굳힌 호원이 긴 숨을 내쉬었다.
***
무휼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방을 보며 묘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마치 무휼이 이곳을 나선 것이 어제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방 안의 모든 것들이 그의 기억과 똑같았다.
그러나 무휼은 그 동일함에 오히려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호원의 집 안에 있는 모든 구성품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그것이 집주인인 호원의 의사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옷장 안에 가지런하게 개켜져 놓인 무휼의 옷들이라거나, 한쪽에 잘 정돈되어 있는 침구들, 그리고 머리맡에 꽂아두었던 휴대폰 충전기 같은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무휼은 어쩐지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치받는 느낌이 들어 명치께를 두드려야 했다.
‘기다려 주고 있었나.’
아마 치우기 귀찮아서, 혹은 친구들이 올 때를 대비해서, 그도 아니면 단순히 이대로 두는 게 편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호원이, 스스로의 의사로 이 방을 내버려 두었다는 데서 무휼은 어쩔 수 없는 희망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괴로워했다.
“어차피 받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무휼은 쓰게 웃으며 방바닥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 사람 한 명이 겨우 누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문득, 호원의 방 쪽을 향했다. 그는 마치 벽 따위는 없는 것처럼 호원의 방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작은 창문 아래 벽에 맞닿은 침대가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단순한 디자인의 보조등이 놓인 협탁이 있고, 협탁을 따라 벽으로 향하면 겨울옷을 넣어둔 커다란 장롱이 하나 있다.
장롱 아래쪽에는 시계며 액세서리들을 보관하는 서랍이 있지만, 시계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호원의 성격상 대부분의 공간이 비어 있다.
장롱 옆으로는 뜬금없게도 자그마한 공간 박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안에는 통일성 없는 주제의 책들이 중구난방으로 꽂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딱 발치에 거슬리는 위치라서, 무휼은 세탁물을 들여놓거나 호원을 깨우러 그의 방에 들락거릴 때마다 발걸음에 무진 신경 써야 했다.
일전에 한 번 ‘방 한가운데 이런 게 있으면 걸리적거리지 않냐’고 물어봤더니, 호원은 한껏 어깨를 으스대며 ‘그 장소에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고 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무휼은 아직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평생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무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벽 쪽으로 다가갔다. 손마디가 두껍고 길쭉한 손가락이 벽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마치 그 벽이 호원이라도 된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이토록 누군가를 격렬히 원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껏 무휼은 그 어떤 것에도 필요를 느끼지 못했었다.
뭔가를 가지려면 자신이 가진 것을 대가로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가진 게 없는 그는 대가로 지불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을 죽여버렸다.
장난감, 옷, 작은 필기구에서 음식에 이르기까지, 그는 뭐 하나 자신의 의지로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 세상은 오로지 사람 간의 크고 작은 거래에 의해 돌아간다는 것을, 너무 이른 나이에 알아버린 탓이었다.
‘소름 끼쳐.’
‘어쩜 매번 한 달도 못 가서….’
‘아무도 너 따위를 데려가려 하진 않을 거야.’
깔깔 웃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애써 고개를 휘저어 떨쳐내려 했지만 어차피 끈질기게 따라붙는 이 소리는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무휼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고 벽에 이마를 기댔다. 이마를 통해 느껴지는 서늘한 벽의 온도가 어지러운 머릿속을 잠시나마 식혀주었다.
‘너 같은 애는 정말 처음이다.’
‘어쩜 이렇게 무덤덤한지… 꼭 인형 같잖아.’
‘어쩌면 부모가 그렇게 된 것도….’
악의에 찬 목소리는 점점 더 크기를 키워갔다. 벽에 기댄 채로 스르르 무릎을 꿇은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날카로운 이명을 뚫고 들려왔다.
‘네가 무휼이니?’
그 말과 동시에 무휼을 괴롭히던 모든 소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번쩍 눈을 뜬 무휼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단번에 내쉬었다. 오랫동안 물속에 잠수했다 나온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리고 무휼은 깨달았다.
그가 이호원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마치 그를 위해 안배된 운명처럼, 호원이란 사람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던 이유를.
‘이런 날씨에 그러고 돌아다니면 감기 걸려.’
왜 진즉 깨닫지 못했을까. 이토록 분명하게 보이는 사실인데.
‘어쩔 수 없지. 대신 상처 낫는 대로 나가는 거다?’
무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방 안에는 아침 햇빛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얇은 눈꺼풀에 조각난 햇빛이 스쳤다.
미안해. 무휼은 입술만 달싹거려 속삭였다.
벽 너머에 있을 호원은 자는 건지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그러나 무휼은 조금이라도 큰 소리를 내면 그가 듣기라도 할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또 낮췄다.
아무래도 당신을 포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나 봐.
그래서 그게 너무 미안해.
달싹거리던 무휼의 입술이 그 말을 끝으로 굳게 다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