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길들여진 것은
호원은 여느 때처럼 단정한 차림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바 ‘3월’의 오픈 준비를 하러 내려갈 때의 시각이 으레 그러하듯, 하늘이 붉게 물들며 거리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어쩐지 몸이 한없이 가벼운 기분이었다. 꼭 발이 땅에서 조금 떠 있는 것처럼,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뿐했다.
어제 그 난리를 겪은 것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아, 호원은 의아한 기분으로 3월의 문을 열었다.
“이제 와?”
목소리를 인식하기도 전에 팔목이 잡혀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평소에는 열어두는 3월의 현관문이 자동으로 닫히며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잠겼다.
호원을 잡아끄는 사람은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눈에 다 살피기 벅찰 정도로 너른 등과 팔목을 보니 그를 잡은 커다란 손이 누구의 것인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무슨 짓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성급하게 벽에 밀쳐지는 바람에 낮은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호원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광원이 거의 없어 어둑어둑한 실내에서도 무휼의 파란 눈동자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선명했다.
“기다렸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이미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근하게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호원의 등허리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내가 오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덜컥 겁을 집어먹은 심정이 드러나는 건지, 내뱉는 목소리는 그 자신이 생각해도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호원은 순간 제가 너무했나 싶었지만,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무휼을 밀어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좀 솔직해지는 게 어때?”
그러나 호원의 말이 우습게 들리는지, 무휼은 오히려 더 바짝 그에게 다가섰다. 웃음기 어린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며 풍성한 속눈썹이 곱게 휘었다.
툭, 뭔가가 발치에 치인다 싶더니 뒤이어 호원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다른 가게보다 높은 바 테이블이 등 뒤에 닿아 서늘했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알고 있잖아?”
뭘 하려는 건지. 무휼이 나직하게 속살거리며 하반신을 붙여왔다. 밀어내려던 손은 쉽사리 잡혀 테이블 위에 꾹 내리눌렸다.
호원은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상하리만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역시 당신은 입보단 몸이 더 솔직한 거 같아.”
“…흡!”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허벅지가 호원의 중심을 지그시 눌러 자극했다.
저도 모르게 잇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삼키며, 호원이 몸을 버둥거리려 했다.
그러나 몸은 물먹은 솜처럼 좀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호원에게 더 이상 반항의 의사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무휼은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허벅지를 느릿하게 쓸어 올린 손가락이 얇은 셔츠 한 장을 사이에 두고 허리께에 닿았다.
여름 햇살에 달궈져 미적지근한 공기가 맨살에 닿는 감각에 호원이 눈을 질끈 감았다.
커다란 손이 움직이는 순간, 호원의 허리가 위로 튀었다.
헐떡이는 소리가 조용한 바 안을 가득 울렸다. 순간, 무휼이 손을 내려 호원의 무릎 뒤를 잡았다. 두 다리가 번쩍 들리며 호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자, 잠깐…!”
“그렇게 좋아, 형?”
뭐? 순간 호원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리를 잡고 몸을 붙이는 남자의 얼굴은 더 이상 그가 알던 무휼의 것이 아니었다.
“원이 형.”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호원의 눈을 직시했다. 앳된 얼굴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사랑해, 원이 형.”
여명훈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허억!!”
호원은 숨을 들이켜며 눈을 번쩍 떴다.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가빴다. 헐떡거리며 몸을 일으켜보니, 이부자리는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
호원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사랑해, 원이 형.’
마치 저주처럼 들리던 그 말이 다시금 뇌리에 틀어박혔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호원의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속옷 바람인 몸을 타고 내려간 시선이 허벅지 위에 하얗게 드러난 상흔에 닿았다.
신고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평생 다리를 절 뻔했을 정도로 깊은 상처. 여명훈이 남긴 상처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
잘근 입술을 깨문 그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에 억지로 무게를 싣고 밖으로 나오니, 휑한 거실이 그를 반겼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시간이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당장 준비하고 나가야 정상적으로 오픈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호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바쁘게 몸을 움직이다 보면 재수 없는 악몽 따위는 금방 잊힐 테니까.
긴 한숨을 내쉰 호원이 마른세수를 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
호원은 타이를 고쳐 매며 바 ‘3월’의 문을 열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미적지근한 공기가 그를 스쳤다.
“미안, 시영아. 오늘 좀 늦었….”
“이제 와?”
순간, 문을 열던 손이 굳은 것처럼 멈췄다. 호원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왜 여기에? 라는 의문보다도 먼저 찾아든 것은 기가 막히게도 부끄러움이었다.
‘이제 와?’
꿈속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소리에 얼굴로 열이 몰렸다. 설상가상으로 들어오자마자 보인 것은 반질반질하게 닦아놓은 바 테이블이었다.
“왜 그래?”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호원은 기겁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문에서 손을 떼니 반쯤 열리다 만 문이 자동으로 닫히며 그를 덮쳤다.
“오늘 진짜 이상하네. 당신, 어디 아파?”
문을 덥석 붙잡은 무휼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붉게 물들어 있는 얼굴이며,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정상은 아니었다.
“너…, 왜 여기에….”
멍하니 말하던 호원이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했다. 시선은 좀체 무휼을 향하지 못하고 자꾸만 아래를 향했다.
“왜 여기 있어?”
“기다렸어.”
젠장. 호원이 입술을 콱 깨물었다.
저 멍멍이 자식은 빌어먹을 독심술이라도 하는 걸까? 호원은 꿈속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는 그의 행동에 당장 구멍이라도 파서 들어가고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참 어린 녀석을 상대로 그따위 꿈을 꾸다니. 이제껏 여명호에 가려져 있던 발칙한 꿈의 내용이 무휼의 얼굴을 보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 …아니, 너 일단 가라.”
“뭐?”
“가라고.”
호원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다른 손으로는 무휼의 어깨를 꾹 밀며 다시금 말했다.
“제발 가.”
“…….”
무휼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상태가 이상한데, 왜 이상한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진짜 어디 아파?”
무휼이 제 어깨를 미는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걱정이 가득 어린 목소리에 호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찮으니까 좀 가라고!”
기어이 언성이 높아졌다. 무휼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미간을 구겼다. 틀어잡은 손을 강하게 움켜쥔 그가 다른 손을 뻗어 호원의 뺨을 잡았다.
“열이 살짝 있는데. 감기야?”
맞닿은 피부를 통해 무휼의 체온이 전해져 왔다. 달아오른 얼굴 때문인지, 물을 만지다 와서인지 무휼의 손은 조금 서늘했다.
순간 멍해졌던 호원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무휼의 손을 쳐냈다.
“너 진짜 말 안 들을래?”
“어. 안 들을래. 납득이 가야 듣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무휼은 매섭게 내쳐진 손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허공에 손을 몇 번 털고는 바로 호원의 어깨를 잡아챘다.
“도망가지 말고.”
몸을 돌리려다 붙잡힌 호원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얼굴에 몰린 열 때문에 눈가가 홧홧했다.
그가 다시금 어깨를 잡은 손을 뿌리치려는데, 무휼이 한발 빠르게 다른 손을 붙잡아 버렸다.
결국 똑바로 무휼을 마주 보고 서게 된 호원은 별수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고개 들어.”
가차 없는 목소리가 그의 정수리 위로 내리꽂혔다.
위험하다. 호원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매섭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낮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무휼에게 붙들려 꼼짝도 못 하는 채로 그는 일단 심호흡부터 했다.
머릿속의 사이렌이 작아지면서 점차 차갑게 식어갔다. 그러나 반대로 심장께가 뜨거운 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달아올랐다.
두근, 두근, 제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호원은 마른 입술을 훑고는 똑바로 서서 무휼을 쳐다보았다.
“내가 분명 얘기했지, 너 여기 있는 거 허락 못 한다고.”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던 무휼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그는 미약한 빛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 눈을 커다랗게 뜨고 호원을 쳐다보았다.
호원은 그 아름다운 눈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우린 일손 안 부족해. 굳이 아르바이트생을 더 늘릴 생각도 없고, 너도 하던 운동 열심히 해야 하는 시기고, 또….”
마지막 말을 하기까지는 좀 더 용기가 필요했다. 호원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무표정이길, 목소리가 담담하게 나가길 간절하게 빌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네 얼굴 보는 게 불편해.”
무휼은 답이 없었다. 호원은 더 그의 시선을 받아내질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강하게 쥐고 있던 손에게 스르르 힘이 풀렸다.
한참의 침묵 끝에 무휼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당신….”
“오너, 안에 있어요?”
느닷없는 낭랑한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시영이 한 손에 박스를 든 채로 바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어어, 여기 있어!”
호원은 급하게 대답하느라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고는 무휼의 손을 털어 버리고 그녀를 향해 몸을 틀었다. 이번에는 무휼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시영은 목석처럼 서 있는 무휼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이내 호원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뭐야, 둘이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것도 아냐. 손에 그건 뭐야?”
다급하게 말을 돌린 호원이 애써 과장된 손짓으로 박스를 가리켰다. 시영은 순순히 시선을 제 손에 들린 박스로 옮기더니 그것을 호원에게 내밀었다.
“모르겠어요. 밖에 모자 쓴 남자가 갑자기 주던데요?”
“뭐야, 지금 고백받았다고 자랑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시영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러고는 박스를 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팔뚝 정도 길이의 검은 상자에는 붉은색 리본이 멋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프러포즈용 아니냐며 호원이 너스레를 떨자, 시영은 허리에 손을 척 얹더니 상자를 고갯짓으로 까닥였다.
“어떤 남자가 갑자기 불러 세워서는 여기서 일하냐고 묻잖아요. 그렇다고 하니까 오너 전해주라고 떠맡기고 간 거예요.”
그녀는 ‘고백을 받은 건 제가 아니라 오너라고요.’라고 덧붙이며 씩 웃었다. 호원은 얼떨떨한 얼굴로 박스를 돌아보았다.
나한테? 대체 누가?
호원이 아리송한 얼굴을 해 보이자 그들 가까이 다가온 무휼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풀어보지 그래? 진짜 프러포즈면 안에 카드든 뭐든 있겠지.”
내용과는 달리 목소리는 오싹할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괜히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기분에 호원이 손을 들어 머리를 쓸었다.
“그것도 그렇네. 오너, 이거 풀어봐도 되죠?”
시영은 괜히 저가 더 신나서는 리본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엉성하게 매어둔 리본은 금세 풀어졌다. 상자를 벌컥 연 시영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상자의 내용물은 꽃이나 초콜릿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커터칼. 그것도 칼날 부분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흥건한, 어딜 봐도 ‘사용한 흔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오, 오너….”
겁에 질린 시영이 하얗게 굳은 얼굴로 호원을 돌아보았다. 호원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자리에 굳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순간,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무휼이었다.
“모자 쓴 남자라고?”
그는 그 말 하나만을 남긴 채 가게 문을 박차고 나섰다.
호원은 휑하니 열린 문을 쳐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뇌리에는 방금 전, 하얗게 질린 채 커터칼을 내려다보던 무휼의 얼굴만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