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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28)화 (28/101)

제28화. 훈련 실패

호원이라고 명훈의 일 이후로 사람을 만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인기를 끌기에 충분한 외모와 가벼운 관계만을 선호하는 성향 덕에, 그를 스쳐 지나간 사람은 꽤 많았다.

자주 가는 바에서 마주친 사람.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상대. 지인의 소개. 만나는 방법이야 많고도 많았다. 그런 이들과 짧게는 하룻밤, 길게는 몇 달간 가벼운 관계를 유지했다.

더러는 이름조차 모르는 이들도 있었고,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수두룩했다. 호원은 그런 관계가 편했고, 마음이 놓였다. 그 이상의 관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몸정도 정이라고, 결국 그들은 호원에게 진심을 품게 되었고 결국엔 같은 말을 하며 끝을 고했다.

‘너랑 있으면 지쳐.’

이제까지는 그런 말들이 크게 상처로 와닿지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그럴 수 있겠거니, 그렇게 생각했다.

애초에 정을 주려 한 적이 없으니, 상대방이 짝사랑이나 다름없는 연애놀음에 지쳐 떠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호원에게 무휼은 더 이상 떠나보내도 그만, 곁에 남아도 그만인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이미 가슴속에 싹튼 감정은 도려낼 수 없었다.

그래서 호원은 이 감정이 더 커지기 전에 무휼을 제 삶에서 내보내야 했다. 그는 무휼에게도 또 같은 일을 반복할 테니까.

또다시 상대방의 감정에 대답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상처만 입히는 일을, 무휼에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너한테 같은 말을 들으면… 아마 이번엔 버티지 못할 거야.’

호원은 개수대를 짚으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못내 겁쟁이인 자신이 끔찍하게 한심했지만, 차갑게 식은 이성은 이것이 최선이라고 거듭 그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택시비는 줄 테니까….”

“이럴 줄 알았지.”

호원의 말이 느닷없이 끼어드는 말에 뚝 끊겼다. 당황해서 돌아보니 언제 가까이 온 건지 무휼이 눈앞에 서 있었다.

“당신, 결국 내가 비밀을 가지고 있든 말든 상관없는 거지?”

무휼의 한 손이 개수대를 짚은 호원의 손 위를 덮었다. 호원이 손을 빼려 했지만 배구 선수답게 크고 강인한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슨 힘이…!’

이대로는 도망도 칠 수 없었다. 호원이 낭패라는 얼굴로 무휼을 돌아보았다.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는 거야. 그렇잖아?”

무휼의 목소리가 가까웠다. 고작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호원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바짝 마른 입술 사이로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바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목 부근을 흘긋 본 무휼이 피식 웃었다.

“이거 봐. 정곡을 찔리니까 이렇게 당황하잖아.”

“…놔.”

호원이 말했지만 목소리는 연약하기 그지없었다. 무휼이 조금 더 고개를 낮게 숙였다. 한층 가까워진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짧았다.

“나도 떨어져 있는 동안 생각을 좀 해봤거든?”

지척에 위치한 푸른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휘었다. 그 눈만 봐도 호원은 그가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당신은 그렇게 나를 밀어내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나를 좋아한다는 것쯤, 몸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말이야. 이어진 말에 호원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비켜!”

호원이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순순히 밀려나는가 싶던 무휼은 재차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엉킨 다리가 미끄러지며 중심이 흐트러졌다. 시야가 확 반전되고 입술 사이로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쿵, 하는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윽….”

호원은 충격으로 지끈거리는 허리와 뒤통수의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금 자신이 부엌 바닥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안 되지.”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를 덥석 움켜쥐었다. 그제야 호원은 자신의 위에 무휼이 올라타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무겁고 단단한 몸이 호원의 전신을 내리눌렀다.

“읏, 이 자식…!”

호원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팔목을 잡혔다.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상황에 호원은 애먼 입술만 잘근거렸다.

“거봐, 지금도.”

느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휼은 힘든 기색도 없이 호원을 완전히 제압하고는 그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빠져나가려면 할 수 있으면서 힘을 주진 않아. 아무래도 당신 몸은 날 거부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개소리하지 마.”

“그럼 왜 반응하는데?”

무휼이 무릎으로 호원의 중심을 지그시 눌렀다. 그의 아래 깔린 호원의 몸이 일순간에 굳어버렸다.

“너, 너…, 읏!”

“용케 숨기고 있었네. 아까부터 불편했을 것 같은데.”

무휼이 비죽 입꼬리를 올리며 계속해서 호원의 아래를 자극했다. 호원은 얼굴로 피가 몰리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 버리자,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여기서 당신을 안아도, 아마 당신은 거부하지 않겠지.”

저음의 목소리는 흥분 탓인지 평소보다 거칠었다. 뜨거운 숨결이 호원의 뺨과 목덜미를 스쳤다.

더 이상은 안 된다. 호원이 이를 악물며 몸에 힘을 주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니까 안 해.”

“…엇?”

그러나 호원이 주먹을 내지르기도 전에, 무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호원은 어정쩡하게 허공에 뜬 주먹을 어쩌지도 못한 채 무휼이 일으키는 대로 상체를 세워 앉았다.

무휼은 그 자리에 수그리고 앉은 그대로 씨익 웃어 보였다.

“당신이 왜 날 밀어내는진 모르겠지만, 난 이제 꿇릴 게 없거든. 당신이 날 밀어낼 핑계가 없단 말이야.”

호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듣고 보니 그랬다. 비밀이 많아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말은 방금 전 무휼이 스스로 사정을 실토함으로써 효력을 잃었다. 그리고 나이가 어려 안 된다는 말은….

“설마 어린애한테 발정해 놓고 아니라 발뺌할 건 아니지?”

무휼이 해맑게까지 느껴지는 표정으로 화사하게 웃었다. 더 할 말이 없어진 호원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오늘은 이만 가볼게. 아, 그렇지만 여기에서 그놈 찾겠다는 말은 진짜야.”

“…잠깐, 그건….”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호원이 인상을 찡그렸다. 호원이 다시금 거절하려는데, 무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현관으로 향하더니 얼떨떨하게 따라오는 호원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럼, 이따 봐.”

살랑살랑 손까지 흔들어 보인 무휼은 그대로 문을 나섰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상큼한 퇴장이었다.

“뭐, …뭐어?!”

때문에 호원은 따질 타이밍조차 잡지 못한 채, 한참이나 늦은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로 검은 가로수 그림자가 길어졌다.

길거리에는 일에 치여 지친 발걸음으로 집을 향하는 이들과, 생기를 회복할 장소를 찾아 헤매는 발걸음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그 가운데, 모자를 눌러쓴 덩치 큰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는 늦여름의 날씨에도 모자를 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와 계절에 맞지 않는 차림새가 눈에 띄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 몇몇이 얼굴을 꽁꽁 싸맨 그를 흘긋 쳐다봤지만, 이내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괜히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은 위험한 기운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2미터 가까이 되어 보이는 장신과 운동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몸도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에 한몫하고 있었다.

“…….”

그는 아까부터 꼼짝도 않고 한 장소만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나무로 만든 작은 입간판이 보였다.

직접 만든 것처럼 투박하기 짝이 없는 작은 입간판은 취객이 지나가다 툭 치기만 해도 맥없이 쓰러질 것처럼 초라했다.

돌연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대체 형은 저런 곳에 왜 다니는 거야?”

돈도 많은 사람이 왜 굳이 저런 작은 술집을 드나드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남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던 중, 역시나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가 흐릿하던 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그제야 남자는 그 바의 이름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바…, 3월? 무슨 이름이….’

취향 참 별나다며 남자가 다시금 혀를 찼다.

그때, 바의 문이 열리며 안에서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왔다.’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에서 나온 건 길지도, 짧지도 않은 머리카락의 젊은 남자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이 남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작게 흔들거렸다. 검은색의 허리 앞치마를 맵시 있게 둘러맨 허리가 남자치곤 유난히 가늘었다.

키가 크고 전체적으로 늘씬해서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찾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못 알았나?’

남자가 미간을 구겼다. 그런 특징의 사람이 흔하진 않을 테니, 어쩌면 그의 형이 말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정말 개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전에도 이 근처에서 마주치지 않았던가.

저 가게가 아니어도 이 근방 어딘가에는 그가 찾는 사람이 있을 터였다. 남자는 마른 입술을 초조하게 훑으며 가게 입구를 응시했다.

잠시 후, 예의 초라한 입간판을 똑바로 세워놓는 갈색 머리 남자를 향해 누군가 빠르게 다가왔다.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덩치가 큰 남자였다. 운동으로 탄탄히 다져진 군살 없는 체격이라는 것이 멀리서도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얼굴.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긋흘긋 쳐다볼 정도로 잘난 얼굴이 꼭 그곳에만 조명이 비치는 것처럼 환하게 빛났다.

두 사람은 잠시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갈색 머리 남자가 먼저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장신의 남자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그대로 갈색 머리 남자를 따라 들어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확인한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찾았다.”

늦여름의 더운 날씨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음습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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