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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26)화 (26/101)

제26화. 원점인 듯 아닌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호원은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은 채 생각했다.

제대로 된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난 것? 연락조차 한번 하지 않은 것? 그도 아니면 느닷없이 주방으로 들이닥친 것에 대한 사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등 뒤에서 흘러나온 대답을 듣는 순간, 호원은 자신의 생각이 모두 빗나갔다는 것에 허탈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갑자기 끌어안아서…. 그냥 눈앞에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몸이-”

아니, 아무것도 아냐. 미안. 미안해. 녀석은 그렇게 계속해서 사과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속닥거렸다.

그러니까, 결국 말도 없이 끌어안아서 미안하다. 그 소리였다.

“너 정말….”

이쯤 되니 호원은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이 녀석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직진밖에 모르는 점이 그랬고,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보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항상 호원의 생각이나 가치관과는 조금씩 초점이 어긋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녀석이 좋아진 게 아닐까. 호원은 순간 생각했다가 아차 싶어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밀어내고 상처 준 녀석이다. 이제 와서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좋아한다 운운할 수 있을까.

“화…, 났어?”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의 대형견 녀석은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선 호원의 시야에 그 잘나 빠진 얼굴을 비죽 들이밀었다.

말아 문 입술과 평소와는 달리 아래로 처진 눈꼬리, 그리고 처연하게 흔들리는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호원 앞에 있었다.

그 눈을 보고 나서야, 호원은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권무휼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나무랄 데 없이 잘생긴 권무휼. 다른 사람에게는 굶주린 짐승처럼 날을 세우다가도 호원의 앞에선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인 양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권무휼.

그리고…, 지독할 정도로 사람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는 권무휼.

그 권무휼이 지금, 호원의 눈앞에 있었다.

“정말 화난 건 아니지? 나 막 몰래 들어온 거 아니야. 뒷문이 열려 있어서 그리로 들어….”

주절주절 변명 같은 말을 늘어놓던 무휼이 돌연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야, 당신…, 우는 거야…?”

무휼의 말에 호원은 도마 위에 올린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울긴 누가. 양파 썰고 있는 거 안 보여?”

톡 쏘아붙이는 말에 무휼의 시선이 슬쩍 아래를 향했다. 과연, 도마 위에는 새하얀 양파가 반쯤 썰리다 만 채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

무휼의 입에서 맹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반은 허탈함이, 나머지 반은 실망감이 들어찬 목소리였다.

“근데 너, 누구 허락받고 여기 들어왔어?”

호원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채소를 마저 손질하며 물었다. 마치 어제 본 사람인 양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그냥, 뒷문이 열려 있기에 그리로 들어왔어.”

무휼이 당당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호원은 순간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스 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았다.

그가 파스타를 삶고 채소와 소고기를 볶는 동안, 무휼은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숨 막힐 것 같은 시선이었지만 호원은 애써 무시하며 부러 바쁘게 손을 놀렸다.

어느덧 완성된 파스타 위에 장식용 파슬리를 올리며, 호원은 그제야 작은 목소리를 나직하게 내뱉었다.

“잘… 지냈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슬쩍 쳐다보자, 무휼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얼굴 가득 만개한 꽃처럼 웃음이 활짝 피었다.

“…….”

할 말이 없어졌다. 무휼이 이곳을 떠나던 때의 그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는 지금 두 사람 사이에선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 정도로 밀어냈으면 정떨어질 만도 한데.’

곰곰이 생각하던 호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하다 하다 자신의 생각에 상처를 받고 난리였다.

‘그래, 보통 사람이라면 정떨어…지는 게 당연하지.’

호원이 흘긋 무휼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무휼은 도리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여분의 앞치마를 찾아 매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에 순간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던 호원은, 그가 앞치마 끈을 야무지게 매고 나서야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너, 너 뭐 해?”

“응?”

무휼은 가벼운 몸짓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그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뭐가 문제인데?’라고 말하는 듯해서, 호원은 도리어 말문이 막혔다.

“밖에 지금 바쁘잖아. 아냐?”

“아니, 그건 그런데…. 그래도 왜 네가 그걸….”

“혹시 나 말고 누구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있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네.”

명쾌하게 대답한 무휼은 그대로 등을 돌려 홀로 나갔다.

그 행동이 마치 휴식을 끝내고 업무에 복귀하는 직원처럼 당당하고 자연스러워서, 호원은 차마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에는 좀처럼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시영의 경악스러운 목소리도 끼어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주방에 덩그러니 남은 호원이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도대체 저놈의 개자식은 영 속을 모르겠다. 짐승 속을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호원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며칠이나 계속되는 비에 유리로 마감한 건물 벽은 마를 새가 없었다.

사장실의 커다란 의자에 몸을 파묻다시피 한 김진혁은 우울한 기분으로 창밖에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통유리 위로 물방울이 뭉쳤다 또르르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런 날씨엔 꽃이라도 하나 사 들고 바 ‘3월’의 문을 열었을 테지만, 그는 손에 쥔 차 키를 잡았다 놓았다 하며 하염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가 바 ‘3월’에 발걸음 하지 않은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몇 번이고 갈까 말까 고민했다. 한 번은 근처까지 다다랐다가 그대로 핸들을 꺾어 돌아온 적도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들어가려다가도, 그날 호원의 단호한 표정이 떠올라 발걸음이 멈췄다.

‘난 아끼는 동생을 잃고 싶지 않아.’

아끼는 동생. 그 말이 귓가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진혁에게 있어 그 말은,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 아끼는 동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선고처럼 들렸다.

그래서 더더욱 3월에는 갈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자신을 ‘아끼는 동생’으로만 취급하는 호원을 평소처럼 대할 만큼 무던해지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오늘만큼은, 절박하리만큼 그곳이 그리웠다.

그가 좋아해 마지않는 웃음을 지으며 반겨주는 얼굴이, 차에서 내리는 잠깐 사이 젖어버린 어깨에 수건을 걸쳐주는 다정함이, 지친 몸과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그리웠다.

결국 그는 한참을 잘그락거리기만 하던 차 키를 꽉 움켜쥐고 사장실을 나섰다.

데스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던 비서가 벌떡 일어서서 인사하는 것을 대충 받아넘기고 차에 몸을 실었다.

비가 와서인지 오늘따라 차가 거북이걸음이었다. 초조한 마음을 대변하듯 검지 끝이 빠르게 핸들을 두드렸다.

그 가게는 유독 추운 날, 유독 더운 날, 그리고 오늘처럼 쓸쓸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만석이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자리가 없으니까. 진혁은 그렇게 변명을 대며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산도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나 다를까, 바 ‘3월’은 마지막으로 왔을 때보다 더 북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나직하게 이야기하는 소리, 잔잔한 음악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

문 앞에 선 진혁은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바 ‘3월’ 특유의 너무 어둡지도, 너무 밝지도 않은 잔잔한 조명이 포근하게 그를 반겼다.

그 안으로 한 발짝 발을 내디디던 진혁이 돌연 움찔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녀석이다.

주인을 지키는 사냥개처럼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던 어린놈. 그놈이 틀림없었다.

그 녀석은 보틀을 고르는 호원의 뒤에 찰싹 붙어 그의 어깨에 턱 고개를 올렸다. 그러다 호원에게 거하게 등짝을 얻어맞고는 울상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 일련의 행동이 그들에겐 일상인 듯, 조금의 위화감도 보이지 않았다.

‘아끼는 동생…은 아닌 거 같네.’

진혁은 문손잡이를 꾹 움켜쥐었다.

오랜 시간 호원을 봐왔던 그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성가시다는 듯 녀석을 밀어내면서도 호원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게다가 등을 돌려 홀로 나서는 녀석의 등을 바라보는 눈빛. 그것은 절대로 친근한 동생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실수였던 모양이다.

진혁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내리치는 빗줄기가 더 거세졌지만 저 안으로 들어갈 마음은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

“형? 왜 이렇게 늦…, 비 맞았어?!”

집에 돌아오니 앳된 얼굴 하나가 걱정스럽게 일그러졌다. 비에 쫄딱 젖은 진혁이 현관에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발견하고는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그런 그의 위로 타올 한 장이 풀썩 내려앉았다.

“잘 닦아. 감기 걸릴라.”

“…고맙다.”

역시 챙겨주는 건 동생밖에 없네. 진혁은 힘없는 목소리로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머리를 대충 닦으며 집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일 있었어?”

대수롭지 않게 물어오는 말에 진혁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냥… 내 안식처에 불청객이 하나 들어섰거든.”

“불청객?”

“어.”

진혁이 툭 대답을 내뱉었다. 더 물어보지 말라는 속뜻이 느껴지는 어조였지만, 그의 동생은 호기심이 동한 눈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형이 잘 가던 곳이면 그 바 아냐? 거기에 뭐 진상 손님이라도 있었나 봐?”

“그건 아니고, 그냥 시퍼런 눈깔의 대형견이 하나 눌러앉았어.”

“대형견? 귀엽겠네. 나도 보러 갈까?”

“귀엽긴 무슨. 성깔 엄청 더러워.”

그래도 강아지는 뭘 해도 귀엽지. 동생이 덧붙이는 말에 진혁이 피식 웃었다.

“덩치 커다란 수컷인데 뭐. 나이는 너랑 좀 비슷하겠다.”

“뭐?”

동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제야 그는 진혁이 말한 것이 정말 강아지를 뜻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새파란 눈에, 나이가 비슷한, 덩치 크고 성깔 더러운 대형견.

‘설마….’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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