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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25)화 (25/101)

제25화.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호원은 시영의 안내를 받아 바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는 순간 말을 잃었다.

“안녕하세요.”

머쓱한 얼굴로 꾸벅 인사하는 남자는 이전, 이곳을 찾아왔던 무휼의 팀메이트였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무척 앳된 얼굴이라 호원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아마 남자의 외모가 어떻든 그가 온 날 무휼이 떠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호원이 남자를 기억할 이유는 충분했을 것이다.

이름이 분명, 최민호였던가.

남자는 이런 곳이 처음인지, 쭈뼛거리며 바의 한구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호원은 설명을 바라는 표정으로 시영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여 보이고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대로 다른 손님을 상대하는 시영의 모습에 호원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이거, 완전히 저더러 이 녀석을 상대하라는 꼴이었다.

“그, 저기….”

남자가 머뭇거리며 호원을 불렀다. 호원은 마치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랐지만, 철저하게 몸에 밴 서비스 정신으로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네, 주문하시겠어요?”

“아, 네. 일단…, 음….”

남자는 제가 불러놓고도 정작 주문 생각은 안 했는지 우물쭈물하며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이제 막 성인이 되어 갈팡질팡하는 그 나이대와 딱 어울렸다.

‘그러고 보면 무휼이 그 녀석이 쓸데없이 침착했던 거지.’

애늙은이도 아니고, 무휼은 늘 초탈한 사람처럼 차분하고 여유로웠다. 아마 처음에 신분증을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제 막 20살을 넘겼을 뿐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기…, 이 마티니라는 거 하나 주실래요?”

“네.”

드디어 주문을 정했는지, 남자가 그나마 익숙하게 들어봤던 칵테일의 이름을 내뱉었다. 호원은 생긋 웃어 보이고는 막힘 없이 칵테일을 제조해 나갔다.

남자는 셰이커를 준비하고 사용할 술을 꺼내는 절도 있는 동작을 홀린 것처럼 쳐다보았다. 꽤 흥미가 동하는지 호원이 셰이커를 잡은 손 모양을 얼추 비슷하게 따라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의 눈이 닿지 않는 바의 아래쪽에서 호원은 가늘게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었다. 손에 든 픽은 매끄러운 올리브 표면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바의 음악 소리를 뚫고 호원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무휼의 친구…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혹시 무휼의 소식도 알지 않을까?

그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왜 연락하지 않는지, 여기엔 다신 안 올 생각인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는 있는 건지, 그리고-

‘아니, 아냐. 진정해, 이호원.’

호원이 심호흡하듯 긴 숨을 내쉬었다. 권무휼이 뭘 하고 있든 알 바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저 한 명의 손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호원이 셰이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힘이 빠진 그의 손아귀에서 셰이커가 스르륵 흘러내려 버렸다.

챙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바 안을 울렸다. 바 ‘3월’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소음이었던지라, 가게 안의 모든 시선이 당혹을 담아 호원을 향했다.

“…죄송합니다.”

호원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님들에게 사과했다.

속으로는 죽고 싶을 만큼 민망했다. 오너씩이나 되어서는 이렇게 기본적인 실수나 하다니, 그것도 권무휼 본인도 아니고 그 친구 때문에 마음이 붕 떠서 말이다.

착잡한 마음으로 셰이커를 집어 드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울렸다.

“무슨 일이야, 호원 형님? 그새 손아귀 힘이 빠질 정도로 나이 드셨나?”

얄밉게 구는 말에 호원이 피식 웃으며 허리를 폈다. 2m는 족히 될 법한 장신의 남자가 이제 막 바 안으로 들어선 참이었다.

시원시원한 생김새에 슈트가 잘 어울리는 넓은 어깨가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이었다.

오랜 단골이자 호원의 지인인 윤민혁이었다. 그 옆에는 늘 그렇듯이 날카로운 생김새의 미남이 함께였다.

“꽤 오랜만에 왔네, 민혁이. 그리고 원진이 너도.”

반가움이 어린 호원의 말에 날카로운 생김새의 미남, 원진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여전히 귀염성 없게 과묵한 녀석이었다.

“형, 우리 일단 가볍게 파스타 하나랑 카나페 하나. 저녁을 못 먹어서 배고파 죽겠어요.”

원진과는 반대로 민혁이 특유의 능글능글한 어조로 말했다. 호원은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저녁을 먹으려면 식당으로 가야지 여길 왜 와?”

“에이, 형 솜씨 아니까 온 거지. 게다가 이 시간에 문 연 식당 많지 않다고요.”

“얼씨구. 말은 잘해요.”

호원은 그에게 눈을 흘기며 깨끗한 셰이커를 집어 들었다.

“잠깐만 기다려. 이 손님 칵테일만 만들어드리고 해줄 테니까.”

“네에, 네에.”

호원의 말에 남자, 민혁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응수하고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최민호의 바로 옆이었다.

“어?”

뜻밖에도 남자가 민혁을 향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윤민혁 선배 아니에요? 진환 체고 나온.”

“맞는데. 날 어떻게 알아?”

민혁이 두 눈을 끔뻑거리며 되물었다. 그의 수긍에 남자의 얼굴 가득 화색이 만개했다.

“저도 진환 체고 나왔어요! 선배하고는 좀 나이 차이가 나서 같이 다니진 못했지만, 중학교 때 멀리서 연습하는 거 몰래 보고 그랬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몇 톤은 올라갔다. 그는 꼭 동경하는 연예인을 앞에 둔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손을 꼭 맞잡았다.

민혁은 그의 열띤 반응에 피식 웃고는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척 꼈다.

“아, 하긴 우리 학교 중고등학교 붙어 있었지. 그런데 중딩도 와서 볼 정도면 내가 역시 인기가 많긴 많았나 봐?”

“당연하죠! 저희 학교 나온 애들 중에 선배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걸요?”

“오오, 이 자식. 말 예쁘게 하는데?”

민혁이 씩 웃으며 기특하다는 듯 남자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커다란 손으로 내리치는 힘에 아플 법한데도, 남자는 그저 신나는지 실실 웃는 얼굴이었다.

“민혁이 후배면, 그쪽도 운동하나 봐요?”

호원이 대수롭지 않은 척, 슬쩍 운을 띄웠다. 남자는 아, 하고 짧은 목소리를 내뱉더니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배구요. 잘은 못 해요. 항상 두 에이스한테 신세나 지고 있거든요. 1학년 때부터 선발로 나가서 뛴 무휼이 자식이랑은 천지 차이죠.”

여상하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그 말에 호원은 꼭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운동…한 게 맞았구나.’

게다가 민혁이 다녔던 학교라면 호원도 잘 알고 있었다. 실력이 출중한 선수들이 대거 소속되어 있는 데다, 매년 전국대회 우승을 거머쥐는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그런 곳에서 1학년 때부터 선발로 뛰었다니, 아마 지금쯤 프로팀에서 서로 데려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몸을 그렇게 함부로 굴렸단 말이야?’

갑작스럽게 괘씸해져, 억지 미소를 짓고 있던 호원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무휼…, 무휼이라…, 아, 혹시 걔 권무휼이냐?”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무휼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민혁이 남자를 향해 물었다. 남자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민혁이 놀랍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와, 너 걔 친구야? 이거, 나보다 유명한 사람 지인을 옆에 두고 괜히 허세 부린 꼴이 됐네.”

“아녜요, 선배는 저희 우상인걸요! 권무휼 그 싸가지 없는 놈도 선배는 존경한다고요!”

남자가 손사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호원은 그런 남자의 앞에 부드러운 몸짓으로 마티니를 내려놓고는 슬쩍 민혁을 돌아보았다.

“왜? 그… 녀석도 유명해?”

“말도 마요. 그러잖아도 그 녀석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으니까.”

민혁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지간해서는 그렇게 칠색 팔색을 하지 않는 녀석인데, 말 그대로 죽을 만큼 시달린 모양이었다.

“그 녀석이랑 같은 고등학교 나왔다고 다리 한번 놔달라는 감독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무리 내가 프로 판을 떴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얼굴 한번 못 본 놈한테 다리를 놓을 정도로 얼굴에 철판 깔지는 않았다고요.”

민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직 프로 배구 선수였던 그는 부상으로 직종을 바꾼 뒤에도 여전히 그쪽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도 워낙 칼 같은 녀석이라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구분 못 하는 사람은 단칼에 자르는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을 뻔히 알면서도 무리한 부탁을 할 정도로 권무휼의 실력이 좋은 모양이었다.

‘이걸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호원은 씁쓸한 기분으로 발길을 돌렸다. 무휼의 이야기가 궁금하긴 했지만 더 들어서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녀석은 다신 여기 오지 않을 셈인 듯하니까.

주방으로 들어선 그가 냉장고를 열어 아껴두었던 소고기를 꺼냈다. 그래도 이야기의 물꼬를 터준 민혁이 기특해서 조금 손이 많이 가더라도 맛있는 걸 먹여줄 생각이었다.

한입 크기로 자른 고기에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양파를 써는데, 돌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

돌아볼 새도 없었다. 뒤에서 뻗어온 뜨겁고 단단한 팔이 호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호원의 손에서 반으로 잘린 양파가 툭 소리를 내며 떨어져 굴러갔다.

놀라 굳은 등에 탄탄한 근육질의 가슴이 닿았다.

호원은 마른 체형이었지만 기본적으로 남자답게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그런 그를 이렇게 가볍게 감싸 안을 만큼 우람한 체격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뜨거운 체온이 얇은 옷감 너머로 느껴졌다.

훅 끼쳐오는 시원한 체향과 군살 하나 없는 팔만으로도 호원은 등 뒤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미안.”

팔의 주인은 그 한마디를 내뱉고는 붙어 있던 몸을 살짝 떼어냈다.

옭아매듯 끌어안았던 손이 풀어지며 그대로 호원의 허리 옆을 지나 테이블을 짚었다.

호원은 뒤에 선 남자의 호흡이 귓가에 흩뿌려지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며 조용히 숨을 죽였다.

살짝 내린 시선 끝이 테이블을 짚은 손에 닿았다. 마디가 굵고 길쭉한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갈급한 사람이 물을 갈구하는 것처럼 강하게 끌어안은 것과는 상반되는 태도였다.

“…미안해.”

다시금 낮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호원의 옆을 짚었던 손이 테이블을 꽉 쥐는가 싶더니 스르륵 뒤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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