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24)화 (24/101)

제24화. 임시 보호하던 개가 주인을 찾아갔다

“뭔가 좀 허전하네.”

시영이 컵을 닦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화들짝 놀라 호원의 눈치를 보았다.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호원은 평소처럼 ‘그러게.’라며 웃는 대신, 말없이 바를 나왔다. 주방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시영은 자신의 입술을 말아 물었다.

권무휼이 집으로 돌아간 지 보름이 꼬박 지났다.

그동안 무휼은 꼭 다신 안 볼 사람처럼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

‘진짜 어떻게 사람을 쌩까도 이렇게 쌩까냐.’

시영은 괜히 열이 받아 미간을 구겼다. 새삼스럽게 무휼이 떠나던 날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 무휼을 찾아온 젊은 남자는 그의 친구로, 같이 운동을 하는 팀메이트라고 했다.

친구는 무휼을 보자마자 한바탕 요란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딱 한 마디를 했다.

‘사모님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 말에, 권무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3월을 떠났다.

매정한 새끼. 시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꿎은 행주만 내팽개쳤다.

호원은 나가겠다는 무휼을 굳이 잡지 않았다. 아니, 어찌 보면 오히려 무휼이 떠나는 것을 반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휼 또한 그것에 그리 섭섭해하지 않은 걸 보면 아마 자신도 모르는 새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고, 시영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흔히 칼로 물 베기라 비유되는 종류의 것일 터였다.

“정말 이놈이고 저놈이고….”

시영은 쯧쯧 혀를 차며 과일을 꺼냈다. 칵테일에 가니시로 사용되는 레몬이나 라임, 체리, 딸기 등이 도마 위로 올랐다.

그녀는 레몬의 껍질을 모양 좋게 잘라내고 라임을 잘라 즙을 냈다. 픽에 꽂은 체리를 칵테일이 든 글라스에 넣어 마무리하고 그 옆의 글라스에는 꽃 모양으로 자른 딸기를 꽂았다.

“맨해튼, 스트로베리 진 스매시 나왔습니다.”

“네, 네.”

홀 서빙 한 명이 다가와 글라스를 대충 트레이 위에 올렸다. 오늘부터 나오기로 한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시영은 손님들 몰래 눈썹을 구겼다. 새 아르바이트생이 글라스를 옮기다 트레이에 술을 흘리는 걸 본 탓이었다.

오늘 하루, 술은 흘리지 않게 조심하라 이른 것이 벌써 3번째였다. 대체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게 만드는 건가 싶어 한숨이 다 나왔다.

이렇게 보면 권무휼이 참 일 하나는 깔끔하게 잘했었다. 새삼스럽게 그의 부재가 아쉬워, 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있잖아요.”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에 시영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

자신의 기분이야 어떻든 손님에게는 늘 웃는 얼굴을 하는 것이 시영의 철칙이었다.

“네, 왜 그러시죠?”

“혹시…, 여기서 일하던 그분 오늘 쉬시나요?”

아하, 또 권무휼이다.

시영은 대략적인 내용만으로도 손님이 누구에 대해 묻는 건지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 근래 들어 적어도 하루에 두어 번은 권무휼의 부재에 대해 물어대는 손님이 있었던 것이다.

“아, 그 친구는 이제 그만둬서요. 다시 일할지는 모르겠네요.”

시영은 죄송하다는 듯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속으로는 벌써 몇 번째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연기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지만.

“아, 그래요? 아쉽네요.”

손님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더니, 원래 자신의 목적은 이거였다는 듯 칵테일을 한 잔 더 주문했다.

이마저도 이전에 같은 질문을 했던 손님들과 똑같았으므로, 시영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가 셰이커를 준비하는 사이, 주방에 들어갔던 호원이 돌아왔다.

그는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시영은 그 미소가 무리해서 띤 억지웃음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괜찮아요?”

시영은 호원 근처에 있는 글라스를 가져가며 낮게 소곤거렸다. 호원은 그녀를 향해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나 참, 권무휼이 뭐라고….’

시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느 날 갑자기 바 ‘3월’에 난입한 정체불명의 미남자. 권무휼은 그렇게 왔던 것처럼 홀연히 바 ‘3월’을 떠났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바의 오너 호원에게 예상치 못한 충격을 안겨준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민폐가 따로 없다며, 시영은 속으로 쯧 혀를 찼다.

***

“조심해서 들어가. 오늘도 고생 많았어.”

“오너야말로 고생했어요.”

“내가 뭘. 네가 고생했지. 얼른 들어가, 아직 어두운데 밤길 조심하고.”

호원은 어쩐지 평소보다 더 지쳐 보이는 시영을 배웅하며 활짝 웃으려 노력했다.

최대한 괜찮은 척을 하고 있었지만, 아마 오래 같이 생활해 온 시영이라면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오늘 하루 동안 억지 미소를 짓느라 안면근육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는걸.’

호원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으며 멀어지는 시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영은 뭐가 그리 불안한지 걷는 동안에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기어이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호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뒤돌아섰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요즘 들어 부쩍 힘들게 느껴진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일까, 이상하게 몸이 축 처지고 기운이 없었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마음은 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젠장….”

호원의 잇새로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난간을 잡은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하….”

누구에게 던지는지도 모를 욕지거리는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계단에 주저앉았다.

좁은 계단에 옹송그리고 앉은 모습은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처럼 위태했지만, 호원은 주변의 눈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입 안이 바짝 마르고 신경이 곤두섰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극도로 예민해지고, 자신의 것이 아닌 휴대폰의 전화벨 소리에도 우뚝 몸이 멈춰 버렸다.

분명 자신의 몸인데, 스스로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었다.

그것은 호원에게 있어 생경하고, 또 비참한 일이었다.

호원은 힘이 빠진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현관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등을 대고 스르륵 주저앉아 버렸다.

그의 머리 위에서 환하게 켜졌던 센서등이 이내 미약한 소리를 내며 꺼졌다.

사위가 고요한 어둠에 잠기자,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심장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래, 인정할게.’

호원은 천천히 눈을 떠 허공을 바라보았다. 캄캄한 어둠은 금방이라도 손을 뻗어 그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갈증으로 메마른 목구멍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심을 토해냈다.

“…보고 싶어.”

꾹꾹 억눌러왔던 본심을 말로 내뱉은 순간, 호원은 그것이 그리움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보고 싶은 거다. 보고 싶어서 이토록 괴로운 거다.

그리고… 원망스러운 거다.

말 한마디에 홀가분히 떠나 버린 매정함이? 그러고선 연락 한번 없는 무신경함이? 입으로는 좋아한다 말하면서 항상 선을 긋던 잔인함이? 비밀을 잔뜩 끌어안은 시한폭탄 주제에, 기어이 그의 마음을 낚아채 간 이기심이?

아니, 아니다.

“또 내가 문제인 거야.”

호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문에 닿아 있는 뒤통수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좋아한다는 그를 밀어내 놓고는,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도 않았으면서, 감히 그를 보고 싶다 여기는 자신의 마음.

그 마음이 호원은 원망스러웠다.

사랑이 무서워서 무휼을 밀쳐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다시 사랑을 하고 싶어 하는 자신이 가증스러웠다.

어디선가 톡,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에야 호원은 그 소리가 자신의 손등 위에서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손등을 흠뻑 적신 것이 자신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라는 것 또한.

“읏….”

호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앞의 어둠이 일렁거렸다. 호원은 그대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의 위로 센서등의 불빛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미약한 빛은 이내 다시금 어둠에 잠겨 버렸다.

***

무휼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고,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덧 한 달이 다 돼가고 있었다.

날도 점점 더워져, 이젠 한낮에는 반팔을 입은 사람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아마 곧 에어컨을 틀어야 할지도 모른다.

바 ‘3월’은 여름맞이로 새롭게 선보인 칵테일이 입소문을 타서 점점 더 호황을 기록하고 있었다.

금, 토요일에는 바의 문밖으로 길게 줄을 선 손님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손님이 늘어가는 건 좋았지만, 호원의 얼굴은 그에 반비례해서 점점 수척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일의 강도가 높아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영은 창백한 얼굴로 셰이커를 잡는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눈 밑이 거뭇한 걸 보니 또 잠을 제대로 못 잔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시영이 대체 왜 그러냐 물었을 때, 호원은 그저 힘없이 웃기만 했었다.

그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분통 터지게 하는 일인지, 그는 모를 것이다.

결국 시영은 바람이나 쐬자는 생각으로 문을 나섰다.

밖의 공기는 후텁지근했다. 축축한 공기가 불쾌하게 몸을 감쌌다.

에어컨이 있는 실내로 돌아갈까 했지만 호원의 죽상인 얼굴을 보고 있자면 괜히 열불만 날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한숨을 내쉰 시영이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가느다란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무는데, 그녀의 발치에 덩치 큰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어?”

시영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녀의 시야 안에 달빛을 받아 더 커 보이는 장신의 남자가 들어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