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그의 이야기 (2)
서진이, 아니 명훈이 바에 다시 얼굴을 비친 건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난 뒤였다.
불행 중 다행인지, 호원이 법원을 들락날락할 일은 없었다.
명훈이 이력서와 대학교 학생증을 직접 조작한 것과 호원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경찰에 증언해 준 데다, 명훈이 고등학교를 1년 유급해서 실질적으로는 미성년자가 아니라는 이유가 컸다.
이 대목에서 호원은 자식의 나이도 제대로 모르면서 부모랍시고 나선 그들의 행태에 헛웃음을 뱉었다.
호원 역시 예의 남성에게 폭행을 당했으므로, 경찰에서는 당사자 간 합의로 사건을 종결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명훈의 부모 측에서 돈을 요구해, 이야기가 굉장히 어려워지고 있었다.
호원은 얼굴에 반창고를 붙인 채로 명훈을 맞았다. 명훈은 이미 입구에서부터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대체.”
“미안해, 형. 내가 너무… 너무 미안해.”
명훈은 그 말 뒤로 또다시 한참을 눈물만 흘리다 이어 말했다.
명훈에게 들은 그의 집안 이야기는 ‘서진’에게 들었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뒤였고, 가끔 집에 들어와서는 명훈과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금전을 요구했다 한다.
어머니는 그나마 명훈을 가끔 챙기는 듯했으나 새 남자를 들이면서 명훈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모양이었다.
그사이 명훈은 고등학교를 자퇴했고, 충동적으로 훔친 지갑 속에 있던 신분증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듣자니 그런 식으로 일했던 곳이 비단 바 ‘3월’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날 가게에 쳐들어와 호원에게 폭력을 가한 남자는 명훈 어머니의 새 남자로, 이런저런 막일을 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돈을 요구했군. 호원은 기가 찼다. 그리고 딱 그만큼, 분노했다.
그의 눈에 명훈은 아직 어린애였다. 실제 나이가 더 어리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 더욱 그것이 실감 났다.
나이를 속이고 거짓말을 한 것은 괘씸했지만, 비참하기 그지없는 명훈의 사정을 듣고 나니 어쩔 수 없는 안쓰러움과 애처로움이 솟아났다.
“죄송해요, 형. 나는 그냥… 그냥 우리 사이를 인정받고 싶었어. 제대로 말하면 들어줄 줄 알았어.”
명훈은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몰래 바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 바의 주인과 연인관계라고. 그러니 인정해 달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어머니에게 일말의 애정이 남아 있던 명훈은 자신의 유일하다시피 한 가족에게 인정을 받으면 두 사람 사이가 공고해질 거라 믿었던 듯했다.
호원은 말문이 막혔다. 이토록 순진한 아이에게 폭력을 가하고, 아이를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는 부모란 작자들이 못 견디게 혐오스러웠다.
“형, 나… 이제 일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형이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내가 형 사랑하는 거 형도 알잖아. 나 형 없으면 안 돼. 형, 원이 형….”
자신을 껴안고 펑펑 우는 명훈을, 받아줄 수도 있었다. 돈이라면 마련해 볼 테니 그 집을 나와 여기서 같이 살자고. 공부를 더 하고 싶으면 학교도 보내주겠다고. 그렇게 말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명훈에게 호원이 돌려줄 수 있는 말은 ‘그만하자’뿐이었다.
자신을 속였다는 데 대한 분노도, 무고한 죄를 뒤집어쓰고 얻어맞았다는 데 대한 억울함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보다도, 호원은 명훈이 제대로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호원은 명훈이 자신에게서 부모의 애정을 바라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을 학대하는 아버지와 무관심한 어머니 대신, 그를 사랑하고 보듬어주는 사람에 대한 집착.
호원은 그것을 감히 사랑이라 부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호원은 명훈을 아꼈다. 그는 명훈이 제대로 학교에 가고, 친구를 사귀고, 사랑하는 사람과 쌍방의 애정을 나누길 바랐다.
그리고 호원이 명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중 아무것도 없었다.
“그 집에서 독립하는 것까진 도와줄게. 하지만 더 이상 여긴 찾아오지 마.”
호원은 처음으로 단호하게 명훈을 밀어냈다.
명훈은 세상을 잃은 사람 같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덜덜 떨며 호원의 앞에 무릎 꿇고 빌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러나 그 모든 말로도 호원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럼 죽을래. 형 없이 살 바엔 죽는 게 나아.”
명훈이 가게에 있는 과도의 위치를 안다는 건 가장 확실한 불행이었다. 호원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명훈은 과도를 집어 들고 손목을 그었다.
붉은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호원은 찢듯이 앞치마를 벗어 상처 부위에 대고 눌렀다.
명훈은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 쳤고, 그의 피가 여기저기 흔적처럼 튀었다.
다행히 빠른 신고로 명훈의 목숨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정말 죽을 생각이었는지 손목의 상처가 심해 평생 흉터로 남을 거라 들었다.
응급실 앞에서 호원은 다시 한번 명훈의 어머니, 그리고 새아버지라는 사람과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사실상 호원은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폭언을 듣고 견뎠을 뿐이었다.
명훈의 어머니에게 몇 대나 뺨을 얻어맞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몸을 휘둘리는 동안, 호원이 했던 생각은 단 하나였다.
왜 그랬을까.
왜 그 애를 받아주었을까. 왜 그 애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을까. 왜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을 때 더 캐묻지 않았을까.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풀리는 건 없었다.
호원은 피투성이인 채로 가게로 돌아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청소를 했다. 굳어버린 명훈의 피를 긁어내고, 그 위로 떨어지는 자신의 눈물을 닦아냈다.
“원이 형.”
마지막으로 명훈을 본 것은, 자살소동이 있은 후로 3달이 지난 뒤였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이전보다 삐쩍 말라 있었다.
“원이 형, 나 이제야 알았어.”
명훈이 웃었지만 호원은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돋는 듯했다. 그의 웃음이 기괴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꼭 인형처럼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나는 형 없으면 안 되는데, 형은 아니잖아.”
명훈이 저벅저벅 호원을 향해 걸어왔다. 호원은 그제야 그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형도 나 없으면 안 되게 만들면 되는 거야.”
호원은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호원의 배를 향했던 칼날은 두 손에 밀려 아래로 향했고, 호원의 허벅지를 깊게 파고들었다.
호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명훈은 아쉽다는 듯 허벅지에 박힌 칼을 뽑아냈다. 허벅지에서 콸콸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셨다.
“이 정도로는 안 되겠지? 아예 다리 한쪽을 못 쓰는 정도는 되어야 형이 나를 의지할 거야. 그럼 다시 나를 사랑해 주겠지?”
명훈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호원의 눈앞이 눈물로 흐려졌다.
다행히 명훈은 호원을 찌르지 못했다. 비명 소리를 듣고 뛰어온 옆집 사람이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명훈은 그대로 도망쳤고, 그 후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
그 후, 호원은 ‘특별한 누군가’를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주 가는 게이바에서 원나잇은 할지언정, 한 달 이상 관계를 지속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재 여행을 다녀오느라 사정을 모르는 친구 수현은 그런 그를 안쓰럽게 여겼지만, 호원은 그저 웃어넘겼다.
수현에게 이 일에 대해 말하는 걸 고민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착한 친구 수현은 분명 그 당시에 자신이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에 평생 죄책감을 가질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호원이 아는 이수현이란 남자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호원이 ‘어쩔 수 없이’ 겁을 먹고 있는 것도, 그것이 이호원이라는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똑같지 않아. 알고 있어.”
호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세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권무휼은 여명훈이 아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을 분리해서 생각하기엔, 너무도 비슷했다. 어린 나이도, 그를 바라보는 눈빛도, 그리고 호원에게 감추고 있는 비밀이 있다는 것까지.
무휼에게 설레면서도 그에게서 명훈의 그림자가 보일 때면 호원은 숨이 막혔다.
처음 그를 데려온 날, 신분증부터 확인했던 것도. 그에게 있고 싶은 만큼 있으라 한 것도.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다 생각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호원은 한 사람을 온전히 믿고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 두려웠다. 권무휼이 매력적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더 이상 그런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원이 형, 사랑해. 난 형 없으면 못 살아. 형도 그렇지?’
여명훈은 그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런 게 사랑이라면, 사람을 그토록 망가뜨리는 것이 사랑이라면 호원은 평생토록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상대가 무휼이든, 진혁이든 마찬가지였다.
호원은 사랑이 무서웠다.
***
오늘 분위기 왜 이래. 평소처럼 출근한 시영은 3월의 문을 열자마자 그렇게 생각했다.
권무휼은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선 좀비처럼 걸어 다니고 있었고, 오너인 호원은 잠 한숨 못 잤는지 퀭한 얼굴을 해 가지고선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시영은 일단 성큼성큼 걸어가 한 컵만 몇 분째 닦고 있는 호원에게서 컵을 빼앗아 들었다.
“어….”
“오너, 좀 쉬긴 쉰 거예요?”
시영은 얼빠진 소리를 내며 자신을 돌아보는 호원에게 톡 쏘아붙였다. 기껏 어제 빨리 올라가라고 등 떠밀어 보냈더니, 왜 산송장 꼴을 하고 있냐는 물음이었다.
“응, 쉬었어. 네가 어제 고생했지. 미안하다.”
호원은 그렇게 말하며 힘없이 웃었다. 거기서 더 쏘아붙였다간 정말 픽 쓰러질 기세라 시영은 입술을 말아 물 뿐이었다.
‘그래도 거울 볼 정신은 있었나 보네.’
그녀의 시선이 호원의 목 부근을 향했다.
그는 평소 잘 입지 않던 검은색 목티를 입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목의 흔적을 가리느라 그런 듯했다.
“몸 관리… 잘해요.”
시영은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을 건네고는 그에게 다시 컵을 돌려주었다. 호원은 머쓱하게 웃었지만 대답하진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쉰 시영이 오픈 팻말을 걸려 문밖으로 나설 때였다.
“저기.”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시영이 고개를 돌렸다. 낯선 사람이었다. 사람의 얼굴을 곧잘 기억하는 시영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시영의 얼굴을 마주하자 머쓱한 듯 뺨을 긁적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가 권무휼이 일하는 곳 맞나요?”
시영의 고개가 가게 문 안에서 기계적으로 테이블을 닦는 무휼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