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그의 이야기 (1)
해가 뜬 지 한참 됐지만 호원은 쉬이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벽에 기대앉은 그의 앞에는 평소 입에 잘 대지 않는 소주병이 텅 빈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
깊은 한숨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미지근한 소주는 도저히 먹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지만 호원은 그마저도 달게만 느껴졌다.
‘잔인한 사람이네.’
무휼의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말을 하며, 무휼은 울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는 얼굴이 예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오히려 미치도록 예뻐서, 눈을 깜빡이는 그 짧은 순간마저 아까울 정도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의 눈물을 닦아주면서도 자꾸만 그 예쁜 얼굴을 잡아당겨 키스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미쳤어, 이호원.”
호원은 옆에 내려둔 술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벌써 몇 병째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지만 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병 입구에 입을 대고 기울이던 호원은 손에 든 병도 진작 비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신경질적으로 병을 내려놓은 그가 고개를 젖혀 뒤통수를 벽에 기댔다.
그래도 술을 마셨다고 체온이 올랐는지, 벽과 맞닿은 머리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미안하다, 권무휼.”
호원이 들리지 않을 사과를 중얼거렸다. 본인은 아마 받기 싫다 할 테지만, 호원이 그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과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바뀐 걸까. 호의의 진위를 의심하며 한사코 선을 긋고 벽을 치던 녀석이, 돌연 그의 애정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무휼은 절박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매달렸다.
그리고 무휼이 그의 애정을 갈구할 때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푸른 눈을 마주할 때마다, 호원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호원은 이 관계의 결말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안다’는 말보다는 뼈에 사무치게 ‘겪었다’는 말이 맞았다.
호원은 습관적으로 허리께에 손을 얹었다. 잠시 주저하던 손이 흘러내려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이곳엔 무휼의 배에 있는 상처와 비슷한 흉터가 남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살짝 베인 것에서 그친 무휼과 달리, 그는 자칫 잘못하면 생명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는 점이었다.
무휼의 상처를 처음 봤을 때도 그는 단번에 알았다. 그건 절대로 살의를 가지고 낸 상처는 아니었다. 실랑이 끝에 칼부림까지 하는 경우야 숱하게 봐왔기에 그것만은 자신할 수 있었다.
호원은 오래돼 하얀 흉터로 남아 있을 허벅지 부근을 손가락으로 한번 쓸어보았다.
‘그 녀석은…, 아직 나를 미워하고 있을까.’
올곧았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이, 이 세상에 자신과 호원 단둘밖에 비추지 않는 것처럼 맑게 빛나던 눈동자.
지금의 권무휼과 똑 닮은 눈동자.
그 눈동자에 홀린 것처럼 빠져들었던 때가 있었다. 하루하루가 꿈인 것처럼, 혹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서로에게 몰두하던 때가 호원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그리 오래지 않아 산산이 깨져 부서져 내렸다.
***
바를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슬슬 손님이 붙기 시작하면서 호원 혼자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홀 담당으로 아르바이트생을 하나 두기로 했다.
여서진은 그렇게 바 ‘3월’의 첫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다.
그는 이제 막 스물두 살이 되었다고 했었다. 본인도 첫 아르바이트라며 앳된 얼굴로 웃는 얼굴이 퍽 귀여운 아이였다.
서글서글하고 변죽도 좋은 데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넉살 좋게 말을 잘 거는 녀석이라 은근히 손님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첫 아르바이트생을 잘 뽑았단 생각에 호원도 내심 뿌듯했던 기억이 났다.
“원이 형, 이거 좀 가르쳐 주면 안 돼?”
서진의 말에 호원이 고개를 돌렸다. 서진은 바 스푼과 높은 글라스를 앞에 두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바 스푼 위에 술을 얇게 따라내어 층을 만드는 기술이 잘 안 된다는 모양이었다.
“그건 연습밖에 답이 없다. 손이 덜덜 떨릴 때까지 해봐.”
호원은 낄낄 웃으며 연습용 물과 음료수를 꺼내주었다. 서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술을 완전히 터득해냈다.
보란 듯이 그의 앞에서 기술을 선보이는 서진에게 호원은 크게 한바탕 웃어주고는, 축하주를 대접했다.
“오늘은 먹고 싶은 거 다 먹게 해줄게.”
“진짜? 나 술 완전 센데! 형 그 말 후회하게 해주지!”
서진은 신나서 활짝 웃으면서 정말로 양주 한 병을 모조리 비워 버렸다.
호원은 자신의 집 소파에 그대로 널브러진 서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술이 세다더니, 호원이 더 셀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야야, 일어나. 너 집에는 가야 할 거 아냐.”
“괜찮아….”
서진은 잔뜩 꼬부라진 혀로 연거푸 괜찮다 말했다. 호원은 걱정은 됐지만 부러 잔소리를 더 하진 않았다.
서진의 입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그의 집은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화목한 집안 그 자체였다.
대학생 아들을 아직도 손수 깨워 아침을 먹이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모닝 키스를 하는 아버지. 그런 두 사람에게 야유를 퍼부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 귀여운 외동아들.
호원으로서는 매번 들을 때마다 어쩔 수 없는 부러움에 젖곤 했었다.
“어차피 모를 텐데 뭐….”
그래서 서진이 그런 말을 중얼거렸을 때, 호원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상한 기시감. 뭔가 마음에 걸린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미 서진이 곯아떨어진 뒤라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 더해진 것은, 그다음 날, 집에 돌아갔던 서진이 얼굴 가득 멍을 달고 온 다음이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이거 다 맞은 상처잖아!”
꼭 자기 일처럼 화내는 호원에게, 서진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학교에서 좀 싸워서…. 괜찮아요.”
호원은 그 상처가 싸워서 생긴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반격을 했다면 손이든 발이든 작은 생채기 하나라도 생겨야 마땅한데, 서진의 양손은 늘 그렇듯 깨끗했던 것이다.
일방적으로 맞아서 생긴 상처였다.
그러고 보니 서진은 이전에 분명 학교를 다닌다고는 했었다. 야간대학이라는 것, 그것도 저녁반이라 수업이 끝나면 바로 출근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호원은 혹시 학교에서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걸까 싶어 많이 걱정스러웠다.
“너 혹시 돈 뜯기고 그러는 거 아니지?”
“에이 무슨 그런 말을 해. 내가 어디 가서 삥 뜯길 애로 보여?”
걱정 말라며 웃는 통에 호원은 답답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데 다그칠 명분이 그에겐 없었다.
그렇게 가슴 한편에 찝찝함을 안고 있던 어느 날, 퇴근을 하려던 서진이 그를 붙잡았다.
“있잖아, 원이 형. 혹시 말이야….”
“뭐.”
“혹시… 형, 게이야?”
호원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그릇을 놓칠 뻔했다.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서진은 ‘그렇구나.’라고 말하더니 웃으며 퇴근했다.
그리고 다음 날, 호원은 서진에게 사랑 고백을 받았다.
그때의 호원은 분명 서진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서진이 그저 동성에게 호기심을 느껴 그러는 것인지,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서진에게 느끼는 감정이 귀여워하는 친한 동생 이상의 것인지 확신할 순 없었다.
그리고 그런 호원의 의심을 눈치챈 것처럼, 서진은 끊임없이 그에게 구애하기 시작했다.
그는 호원이 밀어내도 집요하게 들러붙었고, 종내엔 자신과 섹스하지 않으면 아무 손님하고나 해 버리겠단 협박까지 해댔다.
서진이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은 절박하기까지 했다. 호원은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잠자리를 같이한 날, 여러 생각에 잠겨 말이 없어진 호원에게 서진이 말했다.
“형, 내가 매달려서 싫어졌어?”
“아니.”
“내가 지긋지긋해?”
“아니.”
“근데 왜 등을 돌리고 있어?”
호원은 말문이 막혔다. 뒤에서 뻗어온 팔이 허리에 감겨왔지만 그는 그 위에 손을 얹을 뿐,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문제였을까.
그날은 바람이 쌀쌀하게 부는 겨울이었다. 그날따라 눈이 오려는지 하늘은 잔뜩 흐렸고, 서진은 얼른 눈이 왔으면 좋겠다며 출근할 때부터 유독 들떠 있었다.
“여기가 그 새끼 가게야!”
일견 평화로운 듯했던 바 ‘3월’의 일상을 깬 것은, 카랑카랑한 중년 여자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누군가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사장 새끼 나와!”
화가 잔뜩 난 중년의 남자가 씩씩거리며 외쳤다. 호원은 당황했지만 잘 훈련된 포커페이스로 그들을 맞이하려 했다.
호원은 얼굴이 벌게진 중년 여자 앞에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제가 사장입니다만, 무슨 일…!”
순간 호원은 제가 무슨 일을 당한 건지 파악할 수 없었다. 왼쪽 뺨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린다는 걸 깨달은 뒤에야, 그는 자신이 뺨을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야? 네가 우리 명훈이 꼬신 그 변태 새끼야?”
명훈이? 호원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욕지거리가 목까지 올라왔지만 호원은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가게에 손님은 없었지만, 소중한 가게에서 소란을 피울 순 없었다.
“실례지만, 말씀하시는 명훈이란 사람이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요.”
“모르긴 왜 몰라! 당신 이거 불법이야, 알아? 어디 술집에 어린애를 고용해선 일을 시켜!”
“정말 모르는 일….”
“엄마?”
호원의 말은 갑작스러운, 그러나 귀에 익은 목소리에 잘려 사라졌다. 쓰레기를 버리러 잠깐 밖으로 나갔던 서진이 어느새 문가에 서 있었다.
“명훈아!”
지금껏 호원을 쏘아붙이던 여성은 그가 모르는 이름으로 서진을 부르며 뛰어갔다.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씩씩거리던 남성이 호원의 멱살을 잡아챘다.
“너 이 새끼, 이래도 모른 척할 거야? 너 쟤한테 무슨 짓 했어, 어?”
지체 없이 주먹이 날아들었다. 호원은 이성을 잃은 듯한 남자에게 무지막지하게 얻어맞으면서도 시선만은 서진을 향해 있었다.
그는 그제라도 서진이 아니라고, 모두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멍청하게도.
“엄마? 지금 이게….”
“명훈아, 그동안 혼자 맘고생 많았지? 엄마가 미안해. 이제 집에 가자, 응?”
“뭐?”
서진은 여성에게 꼼짝도 못 하고 잡혀 있었다. 팔에 감긴 손을 언제든 뿌리칠 수 있음에도 그는 멍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남자의 발길질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호원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게이 새끼끼리 붙어먹고 잘하는 짓이네. 왜, 저놈이 한번 하게 해줄 테니 일하게 해달라든? 이 변태 새끼야!”
남자는 악담을 마구 퍼부으며 계속해서 호원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내장이 터져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호원은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신음만 내뱉으면서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 서진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서진은 몇 번 뒤를 돌아보았지만, 끝내 되돌아오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