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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19)화 (19/101)

제19화. 역공당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호원이 낮게 속삭였다.

“너 주문 제대로 받은 거 맞아? 진토닉.”

“어… 어?”

무휼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제야 손님이 추가로 부탁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호원이 더 빨랐다.

“베이스가 되는 진, 따로 주문하지 않았어? 저 손님 봄베이 안 먹는 사람인데.”

“앗….”

실수했다. 무휼은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골손님의 입맛대로 오더를 바꾸는 거야 바 ‘3월’에선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늘 같은 것만 먹는 단골손님에게 다른 걸 내놓는다면 섭섭해할 것이고, 그건 곧 바의 고객 관리가 잘되지 않았단 뜻이었다.

“유혹이니 뭐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일부터 똑바로 해.”

얕은 한숨과 함께 호원이 말했다. 할 말이 없는 무휼은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해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호원이 픽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지척에 위치한 고운 눈매가 한껏 휘어졌다.

“알겠냐, 멍멍아?

자, 이제 가서 다시 신나게 꼬리 흔들어. 그렇게 말하며 호원이 타이를 놓아주었다.

무휼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트러진 타이를 다시 맬 생각도 못 하는 듯했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영이 고개를 저었다.

직원의 실수에 관대한 건 호원의 장점이지만, 이번만큼은 차라리 따끔하게 혼내주었으면 싶었다.

‘저렇게 물러서 어쩌냐, 진짜. 내가 똑바로 교육시키든가 해야지, 원.’

이참에 제대로 버릇을 고쳐놓을 심산이었다. 시영의 시선이 다시금 무휼을 향했다.

“…어?”

시영이 얼빠진 목소리를 내며 눈썹을 까딱했다.

바 조명 아래, 한 손으로 입가를 덮은 무휼의 얼굴이 환히 보였다. 커다란 손으로 가렸지만, 그 얼굴은 분명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맙소사. 시영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건 어떻게 봐도….’

당했네, 당했어. 시영은 피식 웃었다.

평소 호원은 타인과의 거리가 가까운 편이었다.

이 말에서 ‘거리’는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것이었다. 스킨십이 많은 편인 데다 기본적으로 다정한 성격이라 오해도 많이 샀었다.

그런 호원에게 ‘당해서’ 나 홀로 실연의 아픔을 겪었던 손님의 이름을, 시영은 적어도 다섯 명 이상 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손님들이 짓곤 하던 표정을, 저 정체 모를 미남자가 짓고 있는 것이다.

문득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정색을 하며 대답하던 호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내가 아무리 그쪽이라지만,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어!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 애한테는 절대 손 안 댄다고!’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막는 천하의 이호원이 그렇게 정색을 하다니.

그 정도면 호원은 권무휼이란 남자를 전혀 연애 상대로 보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결국, 짝사랑이란 소리.

시영은 어쩐지 측은해져, 무휼을 혼내려던 것을 포기했다.

***

그 후, 무휼은 보는 사람이 다 감탄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오죽하면 홀 서빙 담당 직원이 자신은 할 일이 없다며 한쪽에서 설거지를 도맡아 할 정도였다.

무휼은 3월 안을 쉼 없이 다니며 결제를 하고, 손님이 가고 난 자리를 정리하고, 오더를 받고, 글라스와 안주를 날랐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손님의 컨디션 체크도 잊지 않았다.

“블랙러시안은 도수가 꽤 높은데, 괜찮으신가요? 비슷한 도수라면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나, 갓파더도 추천드립니다만.”

주문을 받던 무휼이 손님에게 되물었다. 바 안쪽에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호원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메뉴판을 다 외웠지?’

호원이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바 ‘3월’은 기본적으로 손님의 오더에 치중하는 바였지만 처음 오는 손님들을 위한 메뉴판도 존재했다.

그것도 커다란 책자에 칵테일 종류만 4~5페이지를 할애하며 만든, 거의 사전 크기의 메뉴판이었다.

메뉴판에는 칵테일의 대략적인 도수나 맛도 함께 쓰여 있었다. 그러나 호원이 공부나 하라고 메뉴판을 던져줬던 건 어디까지나 참고용으로 쓰란 말이었다.

칵테일은 들어가는 술의 종류며 레시피, 그리고 도수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그런 걸 하나하나 다 외운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와중, 손님이 답변을 했는지 무휼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커피 향을 좋아하신다니 블랙러시안보다는 도수가 낮고 달콤한 깔루아밀크를 추천드립니다.”

게다가 이어진 설명과 추천도 손색이 없었다. 의외였다. 늘 설렁설렁, 쉽게만 일하는 줄 알았더니 뒤에서 몰래 공부도 하고 있던 걸까.

“나쁘지 않네요.”

옆에서 시영이 말을 걸었다. 그녀 역시 손님과 무휼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네.”

호원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꼭 말 안 듣고 사고만 치던 강아지가 처음으로 ‘손’ 훈련에 성공한 것처럼, 뿌듯하고 기특했다.

“5번 테이블,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하나, 깔루아밀크 하나요.”

그래서 호원은 무휼이 주문을 위해 바 쪽으로 왔을 때, 저도 모르게 툭 내뱉어 버렸다.

“잘했다.”

주문서를 향해 있던 무휼의 눈이 호원을 향했다. 커다랗게 뜨인 파란 눈이 바의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아니, 빛나는 건 눈만이 아니었다. 호원의 한마디에 꽃봉오리가 터지듯 무휼의 얼굴이 활짝 개었다.

반듯하게 잘생겨서 쌀쌀맞아 보이던 얼굴이 단번에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변화에 옆에서 지켜보던 시영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무휼이 천진한 미소 그대로 물었다. 그 얼굴이 칭찬 고픈 아이처럼 보여서, 호원은 선심 쓰는 기분으로 다시금 칭찬해 주었다.

“그래, 정말로 잘했어.”

호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휼이 눈꼬리를 휘었다. 영롱한 푸른 눈이 가늘어지며 은근한 색기를 흘렸다.

“그럼 상 줘요.”

“무슨 상? 간식 주랴?”

호원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완전히 강아지 취급이었다. 순간 무휼의 미소에 금이 갔지만, 그는 이내 더 농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네. 간식. 맛있는 걸로 줘요, 오너.”

뭐, 기특하게 일 잘했으니 그 정도는 줘도 괜찮겠지. 호원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간식이라니, 이럴 때 보면 완전히 어린애였다.

‘가만, 안에 과일이랑 크림치즈가 있으니까….’

가볍게 집어 먹을 수 있는 카나페라면 적당할 것 같았다. 일하면서 주워 먹기에도 부담이 없고, 크림치즈라면 무휼도 꽤 좋아하는 듯했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호원은 마침 다 만들어진 칵테일을 무휼에게 건네며 말했다.

“서빙하고 주방으로 와.”

무휼은 대답 대신 눈을 휘어 웃었다.

그가 등을 돌리자마자, 호원도 바를 빠져나왔다. 주중인 데다 새벽을 향해가는 시간대라 그런지 손님이 많이 없었다.

시영이나 다른 직원들에게도 만들어 줄 생각에 호원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작게 자른 바게트와 크래커를 꺼내 그릇 위에 놓은 호원이 냉장고를 열었다.

시영은 단 것을 별로 안 좋아하니 훈제연어와 리코타 치즈를, 기특한 무휼에게는 크림치즈와 꿀에 버무린 과일을 얹어줄 생각이었다.

호원은 바게트 위에 새싹채소와 연어, 작게 자른 방울토마토와 리코타 치즈를 얹었다. 발사믹 소스를 뿌리고, 반으로 가른 샤인머스켓에 꿀과 레몬즙을 뿌려 뒤적거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막힘 없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예쁘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버터나이프로 크림치즈를 뜨던 호원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목소리 때문에 놀라서가 아니었다.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허리를 감싸 안은 단단한 팔의 감촉 때문이었다.

‘이 자식이 또…!’

밀어내려던 호원의 팔이 멈칫했다. 닿을 듯 말 듯 은근하게 옆구리를 스치는 손에 덜컥 숨이 멎었다.

이윽고 천천히 허리선을 따라 앞으로 이동한 커다란 손이 배에서 교차되며 그를 옭아맸다.

밀착된 등에 단단하고 너른 가슴팍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허리를 단단히 안은 팔뚝과 목덜미에 흩뿌려지는 뜨거운 숨에 호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린 티가 나는 얼굴만 보면 그다지 실감 나지 않지만, 무휼의 몸은 장성한 성인 남자답게 크고 단단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과 넓은 어깨, 천 너머로 느껴지는 선명한 복근 등은 진한 수컷의 기운을 내뿜었다.

호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권무휼의 몸은 야하다. 지금까지 그가 봐온 그 누구보다도.

가뜩이나 요 근래, 일이 바빠 상대를 만들 여유도 없었다. 쌓이고 쌓인 욕망은 남자답게 듬직한 팔에 갇힌 순간 천천히 이성을 비집고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놔.”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호원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려 했지만 이미 버터나이프 위의 치즈는 접시 한복판에 뚝 떨어진 뒤였다.

“바라지도 않으면서.”

무휼은 자신의 품 안으로 호원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정말 놓길 바랐다면 호원은 진작 무휼을 밀쳐 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굳어 있을 뿐, 거부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호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간식 만드는 데 방해돼.”

“괜찮아.”

무휼은 대답하면서 오히려 호원의 몸을 당겨 접시에서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한 팔로 허리를 그러안아 호원을 돌려세웠다.

시선이 맞았다.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에 호원은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깊은 파란빛에 선명한 욕망이 일렁거렸다.

“상 줘야지? 주인님.”

무휼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고개가 기울어지고 숨결이 뺨을 스쳤다. 뜨거운 입술이 맞물리며 말캉한 살덩어리가 호원의 아랫입술을 스쳤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리려 하자, 뒤에서 뻗어온 무휼의 손이 호원의 뒤통수를 감쌌다.

“하… 읍.”

입술 사이로 호원의 숨이 흩어졌다. 허락을 구하듯,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이 당겨지며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되었다.

얇은 천 너머로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뚜렷했다.

무휼의 욕망에 이끌리듯, 호원의 몸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울었다.

등을 타고 찌르르 올라오는 뜨거운 감각에 호원은 매달리듯 그의 목덜미로 손을 들어 올렸다.

어디선가 땡그랑, 하고 스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호원은 화들짝 놀라 무휼의 몸을 밀어냈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밀쳐진 무휼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호원의 붉게 물든 목 부근을 향했다.

“주인….”

“건드리지 마!”

호원이 소리쳤다. 드물게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다. 명백한 거부에 무휼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당황한 듯, 두 주먹을 꾹 쥔 채 서 있던 호원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주방 뒷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잠깐만! 어디 가?”

뒤에서 무휼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호원은 뒤로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뛰쳐나왔다.

‘3월’이 있는 골목은 크고 작은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었다. 그 좁은 골목 한쪽에 벽을 짚고 선 호원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사고 칠 뻔했다.

아니, 이미 쳤나? 호원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무휼이 처음 끌어안았을 때 대번에 쳐냈어야 했다.

자신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리다니, 당장 새벽의 찬 공기에 몸을 식히지 않으면 큰일을 쳐도 단단히 칠 것만 같았다.

‘미쳤구나, 이호원.’

호원이 마른세수를 하며 자신을 나무랐다. 아무리 쌓였다지만 저런 어린애를, 그것도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당돌하게 꼬시겠다느니 뭐니 외치는 녀석을 건드리다니.

미친 거다. 미치지 않고서야 할 짓이 아니었다.

아마- 아니, 십중팔구 무휼은 이번 일로 기대감을 갖게 될 터였다.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던 거리감이 단숨에 좁혀져 버렸다.

이대로는 한집에서 머물 수 없었다. 무휼은 지독하게 매력적인 남자였고, 가끔씩 보이는 농염한 분위기는 자꾸만 그의 나이를 망각하게 했다.

그리고 그 눈. 파란 눈 가득 일렁거리는 욕망을 마주할 때마다 호원은 이성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무휼의 유혹은 상당한 효과를 내고 있었다. 호원이 아무리 밀어내고 무덤덤해지려 애써도 소용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휼의 욕망에 이끌리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이성을 내리누르려 했다.

“하아….”

호원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찬 바람을 쐬어도 좀체 몸의 열기가 식질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지금 상태로 무휼을 다시 마주했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호원 형? 왜 나와 있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떨구고 있던 호원이 눈을 들었다. 바 ‘3월’의 단골, 김진혁이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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