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애견 교육
호원이 그의 가슴을 확 밀쳐 냈다. 무방비 상태에서 밀려난 무휼이 주춤거리다 테이블에 허리를 찧었다.
헉, 소리와 함께 그가 몸을 움츠리며 허리와 옆구리를 감싸 잡았다.
“뭐야, 갑자기? 아프잖아.”
무휼이 황당한 얼굴로 호원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호원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었다.
“주인님? …괜찮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무휼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 손은 곧 뿌리치는 손에 밀려 허공을 더듬었다.
“하.”
호원에게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뭘 해?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날이 선 목소리에 무휼은 입을 다물었다. 호원은 마른세수를 하고는 무휼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새파랗게 어린 게 꼬시니 뭐니 하면, 내가 좋다고 헤벌쭉할 줄 알았냐?”
“무슨 말을 그렇게-”
“아니면, 내가 말 몇 마디에 냉큼 넘어갈 정도로 쉬워 보였나? 남자가 좋다니까 우스워 보여?”
날카로운 말에 무휼의 인상도 구겨졌다.
그는 호원의 양팔을 틀어 잡고 당겼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호원이 무휼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더 단단히 호원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놔! 이 새-”
“놓으면 또 비관적인 말만 할 거잖아. 절대 못 놔.”
단호한 말에 호원의 몸이 굳었다. 얌전해진 그를 더 바짝 끌어안으며, 무휼이 귓가에 속삭였다.
“나 그쪽 생각만큼 어린애 아냐. 나름 경험도 있고 알 것도 다 알아. 남자한테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적어도 아무런 확신 없이 이러진 않아.”
“무슨 그런….”
호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손을 들어 무휼의 가슴팍에 대고 천천히 밀어냈다.
무휼은 이번엔 순순히 밀려나 주었지만 표정만은 좋지 않았다.
“당신은… 내가 싫어?”
애처로운 표정에 호원은 다시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하여간 권무휼,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빠져서는.
호원은 애써 그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싫은 건 아냐.”
“그럼…!”
“하지만 무휼아, 난 아직도 네가 누군지조차 몰라. 여태껏 뭘 하고 살았는지, 집에는 왜 돌아갈 수 없는지, 그날… 칼에 찔린 건 무슨 이유였는지. 아무것도 몰라.”
무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권무휼. 네가 그래서 어린애라는 거야. 호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확실히 무휼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본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호원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만 봐도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다만, 아직 그는 어렸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급급해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는 어린애였다.
“그건 내가 말할게! 그러잖아도 당신이랑 차근차근 얘기하려고 했어.”
“언제?”
호원은 담담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무휼은 퍽 곤란해하는 얼굴이었다. 파란 눈이 정처 없이 흔들리며 파문을 일으켰다.
“언제 말하려 했는데, 권무휼? 네 말마따나 어린애가 아니라면, 적어도 꼬신다느니 뭐니 하기 전에 다 말했어야 하는 거 아냐?”
“난….”
무휼이 시선을 돌렸다.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호원은 쓰게 웃었다. 덜 익은 라임이라도 머금은 것처럼 입안이 썼다.
“그리고 하나 더.”
이어진 말에 무휼이 고개를 들었다. 혼란으로 흔들리는 푸른 눈이 호원을 향했다.
“넌 너무 어려.”
무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꼭 강아지 같아서, 호원은 피식 웃어버렸다.
“아무리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지만, 그거랑 이건 별개지. 너랑 나랑 나이 차이가 얼마인 줄은 알아? 무려 14살 차이야.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안 될 건 또 뭔데.”
무휼이 울컥해서 말을 뱉었다. 그러나 이내 호원의 얼굴을 보고서는 흘긋흘긋 눈치를 보며 시선을 피했다.
호원은 어이없다는 얼굴 그대로 말했다.
“야, 네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고, 내가. 새파랗게 어린 애한테 그런 마음이 들겠냐? 너 태어났을 때 나는 중학교에서 문제집 풀고 있었거든? 또, 네가 초등학교에서 요구르트 빨고 있을 때 난 대학에서 소주에 맥주 말아 먹었다. 이제 실감이 가냐?”
“…….”
그의 말에 무휼은 까득 이를 악물었다. 호원에게 가까이 붙어 선 무휼이 몸을 숙이자 자연스럽게 호원의 등허리가 개수대에 닿았다.
무휼은 호원의 양쪽에 팔을 짚고 서서 그를 내려다봤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나이 차이가 어쨌든 지금은 나도 그쪽도 똑같은 성인인 건 마찬가지잖아.”
“아니, 내 말은….”
“내가 마냥 애새끼처럼 보여? 그럼 실감이 나게 해줄게.”
말과 동시에 무휼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왔다. 입술이 맞닿기 직전, 호원의 손이 무휼의 목줄기를 턱 붙잡았다.
“컥!”
무휼이 놀라 혀를 씹었다. 입가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는데, 호원이 그런 그의 배를 발로 차 밀었다.
“으앗!”
바닥에 나동그라진 무휼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호원이 두 손을 탁탁 털었다.
“한 번만 더 내 몸에 멋대로 손댔다간, 상처고 뭐고 당장 밖으로 내쫓아 버릴 줄 알아.”
호원은 말을 마치자마자 등을 돌려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무휼은 멍하니 닫힌 욕실 문만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뭐야, 어린애라더니.”
의식하고는 있네. 무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시영은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셰이커를 흔들었다. 늘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오늘따라 칙칙하기 그지없었다.
오죽하면 시영의 칵테일을 좋아하는 단골손님이 ‘오늘 어디 아프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시영은 몸 상태가 안 좋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컨디션이 좋은 편이었다.
문제는, 굳이 말하자면 ‘직장 스트레스’였다.
“시영아, 미안. 혼자 바빴지?”
호원이 안절부절못하며 바 안으로 들어섰다.
시영은 생긋 웃어 보이고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그녀가 폭발하기 직전의 얼굴이라는 걸 잘 아는 호원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시영의 눈치를 보았다.
“그, 저기….”
“오너, 주문이요.”
시영이 쌀쌀맞게 말을 끊었다. 호원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셰이커를 들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3번째였다. 주방에 들어가거나 새로운 보틀을 꺼내오는 그 잠깐 사이, 호원이 사라지는 것이다.
본래라면 늦어도 10분 이내엔 바로 복귀했을 호원이 20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처음엔 시영도 걱정부터 했었다. 뭔가 사고가 났거나 재고가 떨어져 급하게 사러 나갔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그 걱정이 분노로 바뀐 것은, 호원이 바를 비울 때면 꼭 함께 사라지는 남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서였다.
호원은 바를 비울 때 시영에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호원이 바를 나서기만 하면 득달같이 그의 뒤를 쫓는 것이다.
“하여간 권무휼….”
호원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래, 그 남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시영과 호원의 평화로운 바 ‘3월’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남자의 이름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시영이 흘긋 호원을 보며 물었다. 호원은 능숙한 손길로 보틀을 기울이며 대답했다. 보틀에서 쏟아진 가느다란 물줄기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셰이커 안으로 흘러들었다.
“나도 몰라. 어디 가기만 하면 쫓아와서는 입질…!”
씩씩거리며 말하던 호원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아차 싶은 얼굴로 시영을 돌아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보틀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뚜껑을 닫는 손길은 일말의 버벅거림도 없이 유려했다.
“입질?”
시영이 한쪽 눈썹을 슥 올렸다. 무슨 소리냐 묻는 얼굴이었다.
“그… 이, 입으로 지랄한다고! 응, 그래 그거야!”
호원이 서둘러 대답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대충 둘러대는 말투였다. 그러고는 더 말 붙일 새도 없이 셰이킹에 들어가 버렸다.
차칵차칵, 얼음 부딪히는 소리에 시영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물어보기가 애매했다.
감정 문제라면 둘 사이의 일이니 시영이 끼어들기도 애매했고, 영업이 힘들 정도로 일에 지장이 있는 것 또한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거슬렸다. 아주. 심히.
“쟤 그냥 자르면 안 돼요?”
시영이 레몬 껍질을 회오리 모양으로 자르며 툭 내뱉었다. 날카로운 나이프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 호원은 등허리에 소름이 쫙 끼치는 걸 느끼며 말을 골랐다.
“그… 일은 썩 잘하잖아.”
“요즘 일 잘하는 애들 널렸어요.”
“그래도 저 정도 얼굴은 흔치 않을걸?”
“…….”
그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시영은 신경질적으로 나이프를 내려놓고 예쁘게 잘린 레몬 껍질로 글라스를 장식했다.
“하여간 난 맘에 안 들어요. 오너한테 껄떡거리는 것도….”
“말은 바로 하지?”
시영의 말을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잘랐다. 언제 왔는지 트레이를 옆구리에 낀 무휼이 두 사람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맘에 안 드는 거야 어쩔 수 없는데, 그다음은 틀렸어.”
“뭐?”
시영이 황당하단 얼굴로 되물었다. 무휼은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껄떡거리는 게 아니라, 정식으로 유혹하는 거거든.”
엄연히 다르다며 무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영은 그의 미소를 보고 순간 얼굴로 몰렸던 열이 순식간에 싸늘히 식는 기분이었다.
“하.”
시영은 헛웃음을 뱉더니 그의 앞에 글라스를 탁, 내려놓았다. 꽤 거친 손놀림이었는데도 잔 속의 액체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서빙이나 해.”
차가운 말에 무휼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얌전히 글라스를 트레이 위에 올렸다.
등을 돌리는 찰나에도 자신을 향해 눈웃음을 치는 무휼의 행동에, 호원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마를 짚을 뿐이었다.
‘쪽팔려.’
무휼의 의도와는 아주 상반된 결과였다.
***
그 뒤로도 무휼의 집적거림은 계속되었다. 호원이 글라스를 건네줄 때 슬쩍 손가락을 얽는다거나, 그다지 중요한 얘기도 아닌 것들을 굳이 바싹 거리를 좁혀 말하곤 했다.
예를 들면, 지금도 그랬다.
“9번 테이블, 마가리타 하나, 맨해튼 하나, 진토닉 하나요.”
바 안쪽으로 깊게 몸을 기울이며 무휼이 말했다. 자칫 뺨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호원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다가 그의 어깨 너머로 9번 테이블을 보았다.
“야, 잠깐.”
호원이 무휼의 타이를 확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무휼이 푸른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앞에 호원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순간, 무휼은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