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주인님, …야?
뜨겁게 쏟아지던 물이 뚝 그쳤다. 무휼은 대충 물기만 닦고는 허리에 수건을 둘렀다.
갈아입을 옷은 있지만 그럴 시간조차 아까웠다. 어서 빨리 이 궁금증을 해소해 버리고 싶었다.
밖으로 나오니 호원이 널어두었던 빨래를 개고 있었다. 문 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호원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물기 좀 제대로 닦고 나와. 바닥에 물 떨어지잖아.”
역시 태도가 다르다. 그놈한테 했던 것처럼 사근사근하게 좀 웃으면 덧나나 싶어, 무휼은 괜히 오기가 생겼다.
“있잖아, 주인님.”
“너 또! 진짜 그놈의 주인님 소리….”
호원이 개던 수건을 팍 젖히며 말하려다 돌연 뒷말을 삼켰다. 무휼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아니, 가까운 건 얼굴만이 아니었다.
바닥에 앉은 호원의 양옆에 손을 짚은 그가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뭐, 뭔데?”
호원이 뒤로 상체를 빼며 되물었다. 무휼은 진지한 얼굴로 호원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갸름한 턱선을 타고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주인님, 게이야?”
허, 호원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그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무슨 의도로 묻는 거지? 아니, 그보다도 얘는 왜 갑자기 이런 걸 물어보는 건데?
호원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말이라고 할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순간, 호원은 무서워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게이냐고, 주인님. 묻고 있잖아.”
슬쩍 말을 돌려봤지만 무휼은 막무가내였다. 어떻게든 답을 듣겠다는 태도에 호원은 저도 모르게 그를 확 밀쳐 냈다.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네. 들어가 자라.”
“말 돌리지 마.”
저를 밀어내는 호원의 손목을, 무휼이 확 잡아챘다. 기다란 손가락과 잘 어울리는 얇은 손목은 커다란 무휼의 손안에 가볍게 틀어 잡혔다.
“같은 거 달린 사내새끼가 좋으냐고 묻잖아.”
“너…!”
호원이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어찌나 힘이 센지 무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 밀려날 수 없게 되었을 때, 호원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자연스럽게 그의 위로 올라온 무휼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호원을 내려다보았다.
“대답해, 이호원.”
당황한 호원의 얼굴이 무휼의 눈동자에 비쳤다.
호원은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숨겨온 정체성을 갑자기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그것은 단순히 커밍아웃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일상이, 평범하고 나름 즐거웠던 무휼과의 일상이 깨지는 것이 두려웠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함께 점심을 먹고 장을 보고, 3월에 출근하는 일상. 이미 익숙해져 버린 평화롭고 잔잔한 하루하루를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하길 꺼렸던 것이었다. 혹여 무휼에게서 경멸 어린 눈초리를 받을까 봐. 험한 비난의 말을 들을까 봐. 갈 곳도 없는 그가 이 집을 박차고 나가 버릴까 봐.
자신만 입을 다물면 아무 문제도 없을 줄 알았다. 지금은 만나는 사람도 없겠다, 얼굴에 정체성을 써 붙이고 다니는 게 아닌 이상 눈치챌 리 없을 테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대체 왜? 뭘 보고? 호원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왜 대답을 못 해?”
무휼이 재차 그를 다그쳤다. 그의 팔 사이에 갇힌 호원은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눈만 데구르르 굴리다,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맞아.”
무휼의 몸이 굳었다. 그사이 호원은 팔을 들어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물기가 남아 있는 피부가 뜨거웠다.
이제 보니 무휼은 달랑 허리에 수건 하나 걸친 채였다. 그런 차림으로 사람을 붙잡고 게이니 뭐니 했다니, 새삼 무휼의 저돌적인 성격에 호원은 긴 숨을 내쉬었다.
“얼른 가서 옷 입고 머리나 말…!”
겨우 일으켰던 몸이 다시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눈 깜짝할 새에 무휼의 아래에 깔린 호원이 당황해서 눈을 껌벅였다.
“뭐, 뭐 하는-”
“그러니까.”
무휼이 나직하게 말했다. 한결 가까워진 얼굴에 호원이 숨을 멈췄다.
“남자가 좋단 말이지.”
새파란 눈이 곱게 휘어졌다. 뜻밖의 반응에 호원은 멍하니 무휼을 바라볼 뿐이었다.
호원의 눈앞에서 파란 눈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무휼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호원의 뺨과 눈가에 흩어져 번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무휼의 입술이 닿아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호원은 그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숨을 멈췄다.
뜨겁고 말캉한 입술이 맞물렸다. 물기를 머금은 살덩이가 붙었다 떨어지며 야릇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퍼뜩, 호원의 정신이 돌아왔다.
“읏….”
호원이 무휼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오히려 무휼의 손에 손목이 잡히고 말았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 손으로 호원의 손목을 고정한 무휼이 다른 손으로 호원의 턱을 붙잡았다.
“흐, 무휼… 으음!”
무휼이 호원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입 안의 예민한 곳이 비벼지는 감각에 호원의 눈꼬리에 물기가 어렸다. 숨이 차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입술을 맛보듯 혀로 길게 핥은 무휼이 마침내 상체를 일으켰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붉은 혀가 훑었다.
가슴을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며 숨을 고르는 호원을 가만 내려다보며, 무휼이 웃었다.
“잘됐네.”
“…뭐?”
호원이 황당하단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나 무휼은 볼일 다 봤다는 듯 가뿐하게 일어서더니 호원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주인님.”
그러고는 푸른 눈을 휘며 씩 웃어 보였다.
호원은 한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가 주워 온 것은 개가 아니라 늑대였던 모양이다.
***
무휼은 방문을 닫자마자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뻥 소리를 내며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자꾸만 씰룩거리는 입꼬리가 위로 치솟는 것만은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선명했다. 박빙의 실력을 가진 팀을 만나 쉴 틈 없이 랠리를 이어가야 했던 이전 대회 결승전 때와 비슷했다.
무휼은 손등을 내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근육으로 두툼한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은 정상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작 키스 한 번에 이토록 스스로의 몸이 주체가 안 된다니, 정말이지 꼴사나운 일이었다.
“…짐작이 맞았어.”
웃음처럼 새어 나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입술을 닫았다.
꼭 말해선 안 되는 기밀이라도 말해 버린 것처럼 가슴께가 빠듯하게 벅차올랐다.
이호원이 남자를 좋아한다.
그 사실을 천천히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무휼은 이상하게 몸속 어딘가가 용광로처럼 들끓는 듯했다.
집주인이 게이라는 건 그에게 있어 좋은 소식이었다. 가뜩이나 잘 보여야 하는 상대였고, 그의 얼굴이 호원의 취향에 꼭 들어맞는다는 건 몇 번이고 확인한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호원 정도라면 그에게도 썩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오히려 환영이지.’
무휼이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잘만 꼬시면 이대로 이 집에서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숨어 있다….
‘아니, 잠깐만.’
순조롭게 이어지는 듯하던 사고회로가 어느 한 지점에서 뚝 멈춰 버렸다.
‘나는 이 집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저 사람을 꼬시고 싶은 건가? 고작 그 이유 하나로 남자를? 굳이?’
그는 이제껏 남자를 유혹하거나, 반대로 남자의 유혹에 넘어간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절박하다지만 평소 그런 성향이 아니었던 사람이 단번에 동성을 꼬시겠다 마음먹는 게 가능한 일일까?
한번 의심이 들고 보니 자꾸만 의식이 시간을 거꾸로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진혁인 처음 보겠네.’
다른 사람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던 호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느꼈던 감정도.
그건 분명 질투였다.
김진혁, 그 사람을 질투했기 때문에 부러 혼날 걸 알면서도 호원의 허리에 팔을 감았고, 그런 도발하는 듯한 말도 내뱉었다.
그 자식이 호원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걸 본 순간 머리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걸 웃으며 넘겨 버리는 호원의 모습에서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 배신감이었다.
자신은 챙겨야 할 어린애 취급이나 하면서, 그런 뻔히 보이는 얕은수 하나 내치지 못한다는 게 화가 났다.
‘주인님, 게이야?’
‘…맞아.’
그래서일까. 호원의 대답을 듣자마자, 그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김진혁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못하게. 어느 날 문득 오늘 밤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자신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게.
그건 이 집에서 오래 머물기 위한 계산된 행동 따위가 아니었다.
무휼은 그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깨달았다.
“미쳤네, 권무휼.”
무휼은 헛웃음을 지으며 한 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깜깜해진 시야 속에는 맞물렸던 입술을 떼어내고 시선을 마주했을 때, 당황해하던 호원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솔직히 말해서, 귀여웠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연상이라는 게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기분 좋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전 다른 사람 때문에 뛴 적이 없던 심장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소위 말하는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무휼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껏 진정 남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곁에만 있어도 가슴이 설렌다거나 그 사람 생각에 잠 못 이루는 일 따위, 그저 드라마 속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당장 호원을 향하는 이 이상하고 무거운 감정을 함부로 사랑이라 정의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대로 정체 모를 감정을 끌어안고 주저앉아 있을 생각도 없었다.
무휼은 속 시원하게 정리하기로 했다.
그는 호원을 전력을 다해 꼬셔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건 더 이상 이 집에 오래 머물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저 무휼이 그러고 싶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