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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15)화 (15/101)

제15화. 좀 귀엽네

“뭐, 뭐가 어째?”

남자가 호원의 멱살을 쥐려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호원에게 잡혀 그대로 꺾였다.

“으아아악!”

남자의 팔에서 뚜둑, 하는 소리가 났다. 근처에 앉아 있던 손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섬뜩한 소리였지만, 호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러뜨리진 않을 거야. 서로 간에 귀찮은 일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호원은 그대로 남자를 문까지 질질 끌고 갔다. 남자의 일행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만 돌아가신다니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손님. 저희 직원 실수도 있으니 술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살펴 가시고 다신 방문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호원은 남자를 계단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길거리에 데굴데굴 구른 남자가 씩씩거리며 일어서려 했지만, 언제든 덤비라는 기세로 내려다보는 호원에게 눌려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치료비도 됐어요.”

남자의 일행이 호원에게 굽신거리며 남자를 부축했다. 남자는 몇 번이고 쌍욕을 지껄였지만 일행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노려본 호원이 뒤를 돌았다. 따라 나온 무휼이 서 있었다.

“권무휼.”

여전히 목소리가 싸늘했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을 때리다니, 무휼은 한 소리 들을 걸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머리에 따듯한 뭔가가 닿았다. 놀라 눈을 뜨자 호원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고 있었다.

“잘했다.”

순간 멍해진 무휼이 살짝 입을 벌렸다.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너무 뜻밖의 상황에 안면근육이 풀어진 것이었다.

“그만 들어가자.”

호원이 그의 머리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무휼이 그 손을 덥석 붙잡았다.

“잠깐만.”

“응?”

“다시….”

무휼은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상하게 목이 말랐다. 생침을 꿀꺽 삼킨 그가 재차 말했다.

“다시 해줘.”

“뭘?”

호원이 눈썹을 올렸다. 의아해하는 얼굴 앞에서 무휼은 자신이 잡은 호원의 손을 들어 보였다.

“이거.”

“…또 쓰다듬어 달라고?”

호원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무휼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음. 너 그런 거 좋아하는구나.”

다소 황당하긴 했지만, 일단 호원은 다시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감기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무휼이 눈을 감았다.

‘어째 좀… 커다란 개 같네.’

덩치도 커다란 놈이 머리 쓰다듬는 걸 좋아한다니, 어쩐지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호원은 무휼이 만족스러워할 때까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오늘은 어째 소란스럽네요.”

가게 안으로 돌아오니 그새 정리를 마쳐 놓은 시영이 픽 웃었다.

바를 운영하면서 이런 일이야 많고도 많았지만, 오늘처럼 요란한 건 오랜만이었다.

시영은 호원의 뒤를 따라오는 무휼을 흘긋 보더니 그의 앞에 잔 하나를 턱 내려놓았다.

“다 마실 때까지 좀 쉬고 와.”

유리잔 안에는 갈색 액체와, 픽에 꽂힌 체리가 앙증맞게 어우러져 있었다. 그걸 본 호원이 씩 웃으며 무휼의 어깨를 툭 쳤다.

“저거 시영이 오리지널이야. 아무한테나 만들어주는 거 아니니까 영광으로 알고 마셔.”

세심한 배려에 무휼은 뺨을 긁적거리고는 잔을 들고 주방 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바에서 조금 떨어진 주방은 호원만 가끔 왔다 갔다 하는 덕에 자리가 여유로웠다.

애초에 샐러드나 치즈 등은 바 한쪽에 미리 준비해 두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하지 않는 이상, 호원이 주방에 갈 일은 많지 않았다.

“…맛있네.”

무휼이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웃었다. 갈색빛이 도는 칵테일은 기본적으로 단맛이 났지만 은은하게 올라오는 바닐라 향과 진한 버번의 향이 잘 어우러져 풍미가 좋았다.

향이 강한 술을 많이 섞어야 해서 밸런스가 중요한, 먹기엔 쉬워도 만들긴 어려운 술이었다. 새삼 바쁜 와중에도 이것을 만들어준 배려가 고마웠다.

무휼은 두 손으로 칵테일 잔을 쥐고 테이블식 냉장고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앞머리가 눈앞에 살랑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방금 전 호원의 행동이 다시금 선명하게 떠올랐다.

‘잘했다.’

그 한마디가 뭐 대수라고. 무휼은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이상한 감각이었다.

호원의 손이 닿은 순간, 도수 높은 위스키를 쭉 들이켠 것처럼 몸 안쪽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무휼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켠 채 굳어버렸다.

다른 사람의 행동 따위에 이토록 갈팡질팡하는 건 자신답지 않다. 그걸 알면서도 무휼은 지금 느끼는 감각이 싫지 않았다.

상대는 그저, 잠시 잘 보이면 그만일 사람인데. 여길 나가고 나면 다신 안 봐도 그만일 사람인데.

‘대체 왜?’

모르겠다. 무휼은 남은 액체를 쭉 들이켰다.

달짝지근한 갈색의 칵테일은 생각보다 도수가 높은지, 들이켜자마자 속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무휼은 빈 잔을 들고 주방을 나섰다. 호원은 천천히 쉬고 오라 했지만 방금 전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가만히 앉아 쉬기만 하기엔 양심이 찔렸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홀은 묘하게 시끌벅적했다. 바 ‘3월’은 분위기상 이렇게 시끌시끌한 일이 없었으므로, 무휼은 다소 의아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지나가던 홀 서빙 직원을 붙잡고 묻자, 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분위기 망쳐서 미안하다고, 오너가 전 테이블에 서비스로 한 잔씩 돌렸거든요. 그랬더니 누가 골든벨을 울렸지 뭐예요?”

무휼의 눈이 동그래졌다. 누구냐고 물어보니 직원은 바 쪽에 앉아 호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자를 가리켜 보였다.

뒷모습만 보이는 남자는 입고 있는 옷이나 자세를 봐도 그다지 나이가 많은 것 같지 않았다.

바 ‘3월’이 아무리 작은 바라지만 가게 내의 모든 테이블을 결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골인가요?”

“저분도 오신 지 한 1년 정도 됐을걸요, 아마? 오시면 꼭 오너 쪽 바에 앉아서 다들 기억하고 있어요. 무휼 씨도 얼굴 잘 익혀둬요.”

“흐음….”

무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던 중 바에 앉은 남자가 호원을 향해 손을 뻗는 게 보였다. 남자답게 큰 손이 호원의 뺨 언저리를 가볍게 스쳤다.

얼핏 보면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을 떼어준 것처럼 보일 터지만, 무휼은 확실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남자의 손길은 분명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거슬리게….”

“네? 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휼은 가볍게 웃으며 직원을 지나쳤다. 바 안으로 들어가니 남자와 즐거운 얼굴로 얘길 나누고 있던 호원이 그를 돌아봤다.

“좀 더 있다가 오지, 벌써 왔어?”

“그냥-”

무휼은 호원을 보고는 그 앞에 앉은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빨리 와야 할 거 같아서.”

남자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무휼을 마주 보았다.

앞에서 보니 남자는 더 젊어 보였다. 아마 31, 32살쯤 되었을까. 앉아 있어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평균을 웃도는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체격이라는 것쯤은 훤히 보였다.

“그쪽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남자가 무휼을 눈짓하며 호원에게 말했다. 은근슬쩍 무시하는 행동에 무휼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진혁인 처음 보겠네. 사정이 있어 잠깐 같이 일하는 친구.”

진혁이? 무휼이 눈을 부릅뜨며 호원을 돌아보았다. 손님과 바텐더 사이라기엔 지나치게 가까운 호칭이 아니던가.

평소에는 손님이 아무리 어려도 깍듯하게 존대를 하는 호원이 편하게 말하는 것도 영 거슬렸다. 손님은 손님일 뿐이라더니, 예외도 있는 건가.

“처음 뵙겠습니다.”

무휼은 보란 듯이 호원에게 몸을 가까이 붙이며 인사했다. 그러고는 호원의 허리에 한 팔을 감고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누가 봐도 퍽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는 자세였다.

“우리 주인님의 애완동물입니다.”

“애완… 뭐?”

진혁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무휼은 호원의 손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이 자식이,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에이씨 진짜.”

무휼은 쳇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보나 마나 자신을 비웃고 있을 진혁 쪽은 쳐다도 보고 싶지 않았다.

“애완동물이라….”

그러나 정작 진혁은 진지한 얼굴로 작게 뇌까리고 있었다. 부드럽게 아래로 처진 눈이 뒷머리를 문지르는 무휼의 뒷모습을 향했다.

***

“너 진짜 나 쪽팔려 죽이려고 작정했지?”

마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호원이 무휼을 향해 눈을 흘겼다. 무휼은 괜히 딴청을 부리며 부산스럽게 옷을 벗어 던졌다.

“먼저 씻을게.”

“아직 내 말 안 끝났거든? 넌 잔소리 좀 들어봐야-”

“그래, 알겠어. 씻고 와서 들을게, 주인님.”

“야!”

호원이 빽 소리치는 걸 귓등으로 들으며 무휼은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니 피곤이 확 밀려왔다.

그깟 진상에게 시비를 걸린 거야, 그리 큰일도 아니었다. 잘나 빠진 무휼에게 그런 질투와 열등감 어린 시비야 늘상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보다도 그의 마음에 걸리는 건 다른 놈이었다.

“김진혁이란 말이지….”

무휼이 나직하게 그 이름을 불렀다. 놈은 그 뒤로 몇 잔 마신 뒤에 자리를 떴지만, 마지막까지 무휼의 신경을 사정없이 긁어놓았다.

무휼은 똑똑히 보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보라고 그런 행동을 했지 싶었다. 호원이 카드를 내밀자마자 그의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하던 행동 말이다.

호원은 당황한 듯했지만 웃어넘겨 버렸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손등을 쳐 내든가 하지, 사람이 물러도 정도가 있는 거 아닌가?

“대체 왜 거부를 안 해? 그러니까 더 들러붙는 거 아냐.”

무휼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김진혁과 자신을 대할 때 호원의 반응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놈은 손에 키스를 하든 말든 넘어가 주면서, 난 조금만 가까이 가도 호들갑이나 떨고.’

울컥 올라오는 서운함에 얼굴을 구기던 무휼은 불현듯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분명 그는 호원의 행동에 ‘서운함’을 느꼈다.

호원이 다른 사람에게 사근사근 대하는 게 보기 싫었고, 그런 호원에게 자연스럽게 스킨십하던 김진혁이 거슬렸다.

단순히 잘 보여야 하는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이라기엔, 도가 지나쳤다.

무휼은 정체 모를 이 갑갑하고 어두운 감정을 정의 내리고 싶었다.

그것이 단순히 이 집에 오래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이성이 만들어낸 착각인지, 아니면 이호원이라는 사람 자체에게 끌리는 제 본심인지 알아내고 싶었다.

‘아무래도 확실히 해야겠어.’

무휼의 푸른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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