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14)화 (14/101)

제14화. 사고 쳤다

바 ‘3월’은 기본적으로 손님들 간의 개인적인 접촉을 권장하지 않는다. 원치 않는 추근거림을 당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바 ‘3월’의 단골들은 혼자 조용히 술의 맛과 사색을 즐길지언정, 다른 손님의 테이블에 멋대로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 바 ‘3월’에서 예외가 있다면, 다른 곳에서 1차로 술을 마시다 합석을 해서 들어오는 손님이었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저들끼리 묘한 눈짓을 주고받으며 한두 잔 마시다 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만은 조금 달랐다.

처음 그 일행이 바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호원은 시영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주문을 소화하고 바에 앉은 손님을 눈여겨보느라 바쁜 와중에도 시영은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손님,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홀 담당 직원을 두고 그녀가 굳이 바를 나와 직접 그들을 안내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시영이 그들을 안내하는 자리를 확인한 호원이 씩 웃었다. 하여간 똑똑한 애들은 하나만 가르쳐도 열을 안다더니, 시영이 딱 그러했다.

시영이 그들을 안내한 자리는 테이블석 중에서도 구석 쪽, 다소 시끄러워도 다른 손님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위치였다.

‘3월’에서 바 매니저인 시영이 손님을 직접 안내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는데, 그 이유는 극과 극이었다.

하나는 상대가 바 ‘3월’에 있어 아주 중요한 손님인 경우. 즉, 주로 호원의 지인이거나 바 ‘3월’의 매상을 올려주는 VIP가 시영이 전담하는 고객층이었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바 테이블에 앉거나, 안쪽에 따로 마련된 유일한 룸으로 안내되곤 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홀 직원이 감당하지 못하는 손님인 경우. 한마디로 진상 고객이었다.

바 ‘3월’에 오래 다닌 손님이라면 예의 일행이 후자에 속한다는 걸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시끄러운 걸 유독 싫어하는 손님 몇몇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후일을 기약하고 문을 나섰다.

그 외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고 예의 일행을 주목했다. 자고로 진상 짓은 구경하는 맛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바 ‘3월’은 진상 고객을 손님으로 보지 않는다. 특히 호원의 진상 처리법은 구경할 가치가 충분했기에, 그것을 보는 맛에 방문하는 손님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등장부터 바 ‘3월’의 모든 이목을 집중시킨 일행은 모두 네 명이었다. 남자 둘, 여자 둘. 단조롭다면 단조로운 조합이었다.

이미 얼큰하게 취했는지,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짧은 지식을 자랑하며 큰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오빠가 술은 좀 아는데 여기 칵테일은 진짜야, 진짜.”

“근데 바 테이블도 아니고 그냥 테이블에서 한두 잔 시키긴 좀 그런데. 차라리 양주를 한 병 시키는 게…, 어머.”

여자 손님 중 한 명이 눈치가 보인다며 바 쪽을 흘긋거리다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냈다. 옆에 앉았던 여자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 손으로 살짝 입을 가렸다.

“와….”

“대박.”

그녀들은 저들끼리 눈짓을 교환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살짝 붉어진 얼굴은 비단 술기운 탓만은 아닌 듯했다.

“왜 그래? 뭐라도 있어?”

남자 한 명이 소외감에 상대를 다그쳤다. 그러자 홧홧한 뺨을 손으로 감싸 식히며 여자 손님이 답했다.

“아니… 여기 바텐더들 다 너무 멋있어서.”

“이런 곳을 왜 이제 알았지? 어쩜, 다들 키도 크고 너무 세련됐다…. 바 테이블에 자리 있었으면 좋았을걸.”

연예인 사진에 들뜬 소녀들처럼, 여자 손님 둘은 발간 얼굴로 재잘거렸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앞자리 남자들의 얼굴은 구겨져만 갔다.

“키가 크긴 무슨, 저거 다 바 안쪽이 바깥쪽보다 높아서 그래. 저기서 나오면 ×나 작을걸?”

“그래도 저 정도 얼굴이면 키 정도야 커버하고도 남겠다. 어깨도 엄청 넓어!”

“우리 자리 옮겨 달라고 할까? 바가 잘 보이는 테이블로.”

여자들이 부산을 떨자 팔짱을 끼고 인상을 구기던 남자 하나가 툭 내뱉었다.

“야, 바에서는 함부로 자리 옮기는 거 아냐. 하여간 촌스럽기는.”

남자의 말에 여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일단 참고 넘어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두 사람의 표정을 어떻게 오해했는지, 우쭐하며 테이블의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사건은 주문을 받기 위해 직원이 예의 테이블로 다가갔을 때 시작되었다.

바에서 잔을 준비하던 호원은 그쪽을 보고는 그만 혀를 깨물었다. 하필이면 그 테이블로 간 것이 무휼이기 때문이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낮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에 여자 손님들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멍한 눈으로 무휼을 바라보는 모습에 남자들의 심기가 상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이.”

남자 한 명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남자는 평균보다 살짝 작은 키만큼 앉은키도 작았기에, 무휼은 허리를 꽤 숙여야 했다.

남자는 막상 무휼의 얼굴이 가까이 오자 주춤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위압적일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자신에겐 그다지 흥미 없어 보이던 여자들이 호들갑 떨던 게 이해가 갔다.

괜히 자존심이 상한 남자는 무휼의 멱살을 잡아채다시피 하며 귀에다 속삭였다.

“여기서 제일 마시기 쉽고 센 걸로 두 잔. 그리고 두 잔은 대충 도수 낮은 걸로 아무거나.”

“도수가 센 건 60도가 넘어갈 텐데,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괜찮아. 거기에 여자들이 좋아하는 달달한 거 아무거나 섞어서 마시기 좋게 줘.”

누가 들어도 좋게 들리진 않는 말이었다.

평소의 무휼이라면 단번에 남자의 의도를 알아채고 호원에게 보고했을 터였다. 그러면 호원은 적당히 달고, 술맛만 살짝 나는 도수 낮은 음료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무휼은 상태가 조금… 아니, 많이 나빴다.

그래서 무휼은 다짜고짜 여자 손님들 쪽을 보며 물었다.

“술이 많이 세신가 보네요.”

“네?”

“이분이 두 분 드실 만한 달고 아주 센 술을 주문하셔서요. 원하시는 베이스나 도수를 말씀해 주시면 바텐더에게 전달하겠습니다.”

“하.”

여자 한 명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달고 센 술. 오늘 처음 본 남자가 여자에게 그런 걸 먹이려는 의도야 뻔했다.

“주문은 됐어요. 저희 이제 일어날 거거든요.”

여자 손님들이 가방을 챙겨 벌떡 일어섰다. 아무리 좋은 바고, 바텐더가 잘생겼다지만 저딴 남자들과 위험하게 술을 마시고 싶진 않을 게 당연했다.

“달고 센 술은 저 둘이나 마시라고 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여자 손님들은 바를 나섰다. 멍하니 있던 남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순식간에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야, 이 새끼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벌떡 일어선 남자가 무휼의 멱살을 잡아챘다. 무휼은 저보다 한참 작은 남자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니 새끼가 참견하는 바람에 다 망했잖아. 저년들 꼬시느라 얼마를 쓴 줄 알아? 어?”

“야, 진정해.”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흥분한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바의 이목이 쏠리는 것도 민망했고, 누가 봐도 남자는 무휼의 상대가 되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창피한 꼴 당하기 전에 나가는 게 바닥에 떨어진 체면이라도 챙겨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일행이 말렸지만 남자는 오히려 무휼을 밀치며 주먹을 쥐었다.

남자 입장에서는 지금 이 상황에서 화를 안 낼 수가 없었다.

기껏 헌팅 포차에서 3시간이나 죽치고 앉아 있다가 겨우 꼬신 여자들이었다. 그것도 술이 꽤 센지 술과 안주값으로만 5만 원 가까이 나왔다.

누가 보면 황당해서 웃을 금액이지만 남자에게는 큰돈이었다. 그래, 적어도 쓰레기 같은 제 계획을 달성할 순 있는 정도의 금액.

남자에겐 그 돈이 그 정도의 가치였다. 참으로 한심하게도.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남자의 화는 괜히 그의 일에 참견한 무휼을 향했다.

오히려 무휼은 그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도와준 셈이니 감사해야 마땅했지만, 30여 년 동안 똑같이 살아온 남자의 머릿속에선 그런 연산은 돌아가지 않았다.

퍽, 소리와 함께 무휼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고 쿠당탕, 하고 의자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일진 진짜 더럽네.”

무휼이 낮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러고는.

퍽. 곧장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남자가 테이블 위로 쓰러지며 장식용 화병이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요란한 소리에 달려온 호원이 무휼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야, 이게! 손님 괜찮으십니까?”

호원이 테이블과 엉켜 엉망이 된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얼굴이 코피로 범벅된 남자는 비명처럼 욕을 내지르다가 무휼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 미친 새끼 뭐야! 여기 직원 관리 이렇게밖에 못 해?”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치료비는 드릴 테니….”

“내가 지금 그깟 푼돈 받자고 이러는 거 같아?”

남자는 바락바락 악을 썼다.

호원은 바 안쪽에서 시영이 손가락으로 수화기 모양을 만들며 입을 벙긋거리는 걸 보았다. ‘신고할까요?’란 의미였다.

호원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무리 먼저 때린 게 아니라지만, 무휼도 손님을 때린 상황이었다.

게다가 누가 봐도 무휼보다 손님의 부상이 더 컸다. 잘못하면 무휼이 더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직원 교육에 힘쓰겠습니다.”

호원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정확한 상황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무휼이 손님을 때린 것만은 확실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손님을 때리는 행위는 바 ‘3월’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 너 말고 저 새끼! 저 새끼가 똑바로 사과해야 될 거 아냐?”

남자는 울분이 풀리지 않는지 무휼을 손가락질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에 무휼이 주먹을 쥐자, 호원이 나서서 말렸다.

“진정해, 권무휼.”

“…….”

무휼이 쳇, 하고 혀를 차며 손을 내렸다. 무휼이 또 주먹질을 할까 봐 움츠러들었던 남자는 이때라는 듯이 목소리를 키웠다.

“시발, 사과하라고! 내가 내 돈 들여서 꽐라 된 년 끼고 술 좀 마시겠다는데 끼어들고 지랄이야!”

“방금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호원이 정색하며 말했다. 남자의 발언이 뭔가 기묘했다.

갑작스럽게 위압감을 뿜어내는 호원의 분위기에 남자가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기보다는, 호원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움츠러든 모양새였다.

남자에게서 대답이 없자 호원이 무휼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딴 곳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말해, 권무휼. 무슨 일이야.”

호원이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세게 나오니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무휼이 입을 열었다.

“…같이 온 여자분께 도수 높은 술을 먹이려고 했어.”

“의도는? 확실해?”

“본인 말만 들어봐도 알잖아.”

퉁명스러운 말에 호원이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서늘한 시선에 남자가 몸을 움찔했다. 호원이 그를 노려보았다.

“손님이 아니라 발정 난 개새끼였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