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Muzzle control (2)
“…뭐?”
호원은 순간 자신이 제대로 알아들은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멍한 목소리를 냈다.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앞의 수려한 미간이 구겨지며 더욱 험상궂어졌다.
“답답하게 굴지 마. 뭔가 원하는 게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냐. 들어줄 테니까 차라리 말을 하라고.”
“뭔 개소리야.”
짧은 대답이 호원의 입술 사이로 튀어 나갔다. 생각보다 거친 반응이었는지, 무휼의 눈썹이 움찔했다.
호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호선을 그리던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지며 끝이 치켜올라 간 눈초리가 인상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오늘따라 상태가 이상하다 싶더니, 이따위 삽질을 하느라 그랬던 거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스산했다. 무휼의 파란 눈이 일순 흔들리며 재차 호원을 향했다. 갈색 눈동자가 새파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뒷말을 씹어 뱉었다.
“내가 너한테 원하는 게 있다고? 그래서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새끼 주워다 먹이고 입히고 이 지랄을 하는 거라고?”
화났다.
무휼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식탁을 꽉 움켜쥔 손이, 갈수록 낮아지는 목소리가, 무표정하게까지 보이는 냉정한 얼굴이 그의 분노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제야 무휼은 아차 싶었다. 호원의 속셈이 어떤지와는 별개로, 그는 지금 호원에게 잘 보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괜히 욱해서는 엄한 벌집을 들쑤신 꼴이었다. 무휼은 어찌해야 할지 맹렬히 머리를 굴렸으나, 그럴듯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호원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이건 뭐 도둑놈 심보도 아니고. 기껏 친절을 베풀어 도와줬더니만, 사람을 그딴 식으로 모네. 피해망상이야 뭐야. 아니면, 네가 뭐 누아르 영화 주인공 같냐? 세상 사람이 다 널 속여서 거대한 악의 세력에 넘기려는 것 같고 막 그래?”
신랄하게 쏘아붙이는 말에 무휼이 울컥해서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호원에게 걸어간 그가 식탁을 쾅 소리 나게 짚었다.
“아니면 뭔데. 정체도 모르는 외간 남자를 왜 도와준 건데? 그러고 보니 부모님이니 집이니 그딴 것도 물어봤었지? 왜, 아들내미 보살펴 줬으니 돈이라도 달라 하시게?”
“뭐 이런 개싸가지가-”
호원이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일순 어린애고 가정폭력이고, 그냥 밖으로 내던져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불신에도 정도가 있지, 마치 원하는 게 없는 사람은 작은 선의도 내보이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호원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그 표정에 사납게 그를 노려보던 무휼도 멈칫했다.
“너… 지금까지 계속 그런 식으로 살았냐?”
그렇게 타인을 밀어내고, 작은 친절 하나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면서. 고슴도치처럼 사방에 날을 세운 채 살아온 걸까.
호원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제 앞에 마주 선 커다란 남자를 쳐다보았다.
요 근래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무휼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물론 성격은 거짓말로라도 살갑다는 말은 안 나오고, 말투도 틱틱거리는 데다, 눈초리가 사나워서 무표정일 때는 퍽 위협적이었다. 키가 커서인지 습관적으로 사람을 내려다봐서 오만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새벽까지 일하고 점심때에야 일어나는 호원의 패턴을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해 주었고, 집안일도 곧잘 거들어 줬다.
시키는 일은 투덜대긴 해도 성실하게 했고, 가게 일까지 도와줬다. 식성도 까다롭지 않고 주는 대로 잘 먹었다.
한마디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자신과 함께 지내는 동안 줄곧 저런 생각을 했다는 걸 알게 되니, 호원은 화나는 것을 넘어 무휼이 안쓰러워졌다.
문득, 병원에 다녀온 날 카페에서 무휼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은 사람이 너무 좋은 것 같아.’
‘보통 아무리 착해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지.’
그때 이미 저런 생각을 품고 있던 걸까. 어쩌면 처음 만난 그날부터 단 한 순간도 진심으로 호원의 행동을 호의로 받아들인 적이 없을지도 몰랐다.
일순 어찌할 수 없는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호원은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무휼은 아무 말 없이 호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걸 보니 본인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숨통을 짓누르는 듯한 침묵 속에서 조금 거친 두 사람의 숨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이윽고 혼잣말처럼 작은 중얼거림이 호원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어떤 인생을 살면… 그렇게 될까.”
무휼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조용한 사위 덕에 그 목소리는 무휼의 귀에까지 들어와 박혔다.
비꼬는 건가 싶어 무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자신을 쳐다보는 잔잔하고 고요한 갈색 눈을 마주한 순간, 마치 누군가가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한테 원하는 거 따위 없어. 못 믿겠으면 아무 때나 너 좋을 때 나가도 돼. 어차피 아는 건 이름이랑 나이뿐이고, 뭘 요구하려 해도 아는 게 없으면 못 하잖아.”
호원의 목소리가 축 처져 있었다. 침착한 것 같기도, 지친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원하던 대답인데, 이상하게도 무휼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통쾌하지도, 속이 시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작은 옷을 억지로 껴입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잠시 망설이다, 무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장 오늘 나가라 해도 괜찮아.”
“여기 나가면 어디 갈 데는 있고?”
곧바로 돌아온 답변에 무휼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할 말이 없긴 했다.
민호의 집에 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 집은 대가족이라 오래 신세 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줄곧 호텔에 머물 만한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카드를 썼다간 어머니 귀에 소식이 들어갈 터였다.
집은… 애초부터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무휼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호원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무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호원이 말했다.
“있고 싶은 만큼 있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대체 무슨 말을 써야 이 기분을 표현할 수 있을까.
호원의 말엔 꼭 온도가 있는 것만 같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몸을 맡겨보고 싶어지는 온기였다.
무휼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마주한 식탁 테이블 위에 얹어진 호원의 손이 보였다. 길쭉하고 곧은 손가락이었다.
손마디가 튀어나오지 않은 손이라 셰이커나 글라스를 쥐었을 때 더 예뻐 보인다고, 손님이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길쭉하고 하얀 손을 가진 사람이었다.
‘네가 무휼이니?’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먼 기억이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다정한 미소를 띤 얼굴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왜 이 기억이 떠오른 걸까. 무휼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호원을 쳐다보았다. 호원은 그새 평소의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돌아와 쫑알쫑알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래도 밥값은 해야지. 지금처럼 집안일도 좀 나눠서 하고, 컨디션 괜찮은 날에는 가게 일도 좀 도와주고 그래. 웬만하면 아픈 애한테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은데 네 먹성 맞춰주다 내 허리가 휘겠….”
호원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무휼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무휼은 그저 신기한 기분으로 눈앞의 호원을 쳐다보았다.
대체 이 사람은 뭘까.
무휼의 머릿속에서 눈앞의 남자는 더 이상 호구 같은 집주인이 아니었다.
원하는 것 없이 내어주는 사람. 무휼의 생애 단 한 번 있었던 그 기적 같은 만남을 상기시키는 사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데, 믿고 싶어지는 사람. 이호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무휼은 이호원이 궁금해졌다. 그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무휼은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호원이 시키는 대로 집안일도 척척 도왔고, 가게에도 성실하게 드나들었다.
너무도 태연하게 구는 무휼의 모습에, 오히려 호원이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호원은 마치 폭풍전야처럼 고요한 그의 반응이 찜찜한 한편,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자연스럽게 시야 안에 무휼이 담기는 일이 늘었다. 무휼이라는 이름에 저도 모르게 반응하거나, 집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신경이 예민해지기도 했다.
그에 비해 무휼은 그날의 언쟁이 마치 꿈속의 일이라도 되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지금 역시 그러했다. 그는 어렵지 않게 높은 찬장의 문을 열고 접시를 꺼냈다. 그러고는 무덤덤한 얼굴로 호원의 앞에 내려두었다.
호원이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그는 외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거 꺼내려던 거 아냐? 다시 넣을까?”
“…아니, 맞아.”
호원은 한입 크기로 자른 토마토와 오이를 접시에 옮겨 담았다.
무휼의 눈치가 빠른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최근 무휼의 행동은 ‘눈치껏’이라는 정도를 넘어 호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그에 맞춰 반응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의 사소한 몸짓부터 버릇까지, 하나하나 눈여겨보고 있는 듯했다.
원하는 게 뭐냐며 억울한 사람을 닦아세우더니, 이젠 아예 밀착 마크를 하겠다는 건가 싶어 호원은 심란해졌다.
그리고 호원을 심란하게 하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토마토 좋아해?”
접시 위의 빨간 채소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무휼이 그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번엔 토마토인가. 호원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갓 말을 배운 어린아이처럼, 무휼은 시도 때도 없이 호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 시답잖은 내용이라, 처음에는 대충이나마 답변을 해주던 호원도 이제는 안 들리는 척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휼은 지치지도 않는지, 호원의 냉랭한 반응에도 끈질기게 대답을 종용했다. 그러다 진절머리가 난 호원이 대충 대답해 주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곤 했다.
무휼은 어미 닭 뒤를 쫓아다니는 병아리처럼 호원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 얌전한 모습이 귀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지만, 호원은 그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무휼이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할지 떠올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씁쓸함을 느꼈다.
반나절, 하루, 이틀이 지나도록 두 사람의 기묘한 대치는 계속되었다.
그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절정에 달한 건, 바 ‘3월’이 한 달에 딱 두 번뿐인 정기 휴일을 맞이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