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본의 아니게
해가 중천에 뜰 즈음 호원은 잠에서 깨어났다. 이런저런 고민으로 밤새 뒤척거리느라 정신이 몽롱했다.
창문에서 새어 들어온 햇빛이 천장에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길게 늘어지는 하얀 빛을 멍하니 보다 호원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미친놈, 진짜-”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해봐도 어제의 일이 자꾸만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그러나 호원을 심란하게 하는 것은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다가오던 무휼의 대담함도, 아무리 당황해도 그렇지 다친 애를 죽자 사자 후려쳤다는 죄책감도 아니었다.
무휼이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에 다가왔을 때-
솔직히 좀 설렜다.
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 같은 놈한테. 나이 차이가 10살 넘게 나는 핏덩이한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산전수전 다 겪었다 자부하는 이호원이 사춘기 소년처럼 가슴 설레했다.
쪽팔리게.
“이호원, 이 미친놈아….”
호원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좌우로 마구 굴렀다. 이불을 팡팡 차대며 속으로 온갖 욕을 뇌까리던 그는 이윽고 죽상을 한 채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호원은 잠에서 깨고 나면 늘 그랬듯이 차근차근 이불 정리를 시작했다. 이불을 펼쳐 구겨진 부분을 펴고 침구를 정리하다 보니 한결 침착하게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이게 다 그놈의 얼굴 때문이다. 상하좌우 완벽하게 비율이 맞고, 숨만 쉬어도 색기가 흐르며, 치켜 올라간 눈꼬리부터 도톰한 입술까지 뭐 하나 취향이 아닐 수 없는 그 잘빠진 얼굴.
그 얼굴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동요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건 그러니까, 조건반사 같은 거였다. 정도가 지나치게 취향인 얼굴을 앞에 두면 잠시 이성이 희미해지는 그런-
“뭐라는 거야….”
호원이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침대 바로 옆에 주저앉았다.
상대는 애다, 상대는 애다. 그렇게 중얼거린 호원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제는 그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그런 거다. 직전에 시영이 했던 말 때문에 괜히 의식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자고 일어나서 차분해진 지금은 아무리 취향의 얼굴일지라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심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에 의해 와장창 깨져 버렸다.
“아침 안 먹어?”
무휼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호원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무심코 그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던 호원은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아무렇지 않긴 개뿔이. 대체 쟤는 뭘 먹고 컸길래 자고 일어나도 완벽하고 난리람.
호원은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얼굴에서 애써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제야 호원은 묘하게 시야 아래쪽이 휑하다는 걸 깨달았다.
공포영화에 나오는 목각 인형처럼, 호원의 고개가 딱딱한 동작으로 아래를 향했다.
“너, 너…!”
호원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휼은 보란 듯이 한 손에 들고 있던 국자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은색 국자가 크게 굴곡진 가슴 근육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저도 모르게 또 소리를 지를 뻔한 호원은 가까스로 이를 악물어 참았다.
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호원은 거나하게 술을 들이켠 다음 날처럼 머릿속이 꽝꽝 울리는 기분이었다.
“그… 일단 옷 좀 제대로 입자.”
호원이 무휼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무휼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제 빌려 입은 남색 파자마가 얌전히 그의 몸에 걸쳐 있었다.
말 그대로, ‘걸쳐’ 있었다.
무휼은 단추 하나 잠그지 않아 훤히 드러난 가슴 근육과 복근을 확인하고 흘끔 시선을 올려 호원을 쳐다보았다.
“더운데?”
진짜 개 새끼인가. 호원은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가만, 그렇게 생각하면 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호원은 물끄러미 무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 의아하게 쳐다보는 잘생긴 얼굴 위로 복슬복슬한 귀가 보이는 듯했다.
그래. 개다. 저건 그냥 개다. 그러니까… 그 뭐야. 그래, 허스키인지 말라뮤트인지 아무튼 그거다.
호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잘생겨 봐야 개는 개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니 달아올랐던 얼굴이 순식간에 차게 식는 듯했다.
“너 몸 좋은 거 알겠으니까 적당히 해라.”
호원은 시큰둥하게 말하며 무휼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고는 무휼의 어깨 너머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된장국이냐?”
“…….”
“맛있겠네.”
호원이 무휼을 지나쳐 부엌으로 향했다. 순간 무휼이 이상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린 것 같았지만, 정답을 찾아 홀가분해진 호원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
‘…이게 아닌가?’
무휼은 다소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복잡한 심경으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남자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가슴 근육과 매끈한 복근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봐도 저렇게 찬밥 취급을 당할 몸은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이제껏 그를 무슨 길가에 세워놓은 마네킹처럼 여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혹시 착각인 걸까? 그쪽 성향이고 뭐고 그냥 예쁘고 잘생긴 걸 좋아하는 타입일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시영인지 뭔지 하는 여자도 예쁘장한 편이었지.’
무휼은 문가에 기대서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호원 본인도 어디 가서 빠질 얼굴은 아니었다. 하얀 얼굴 때문에 예쁘장해 보여서 그렇지, 가만 보면 피부도 매끈하고 이목구비도 뚜렷한 편이었다.
그리고 시영이라는 여자도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도도하고 새침한 얼굴에 키도 크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상당한 미인이었다.
‘근데 나한테 저런 반응이라고?’
무휼은 진심으로 허탈해졌다.
머리가 굵어지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외모로 푸대접을 받아본 적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없는 권무휼이었다.
그런 무휼에게 시큰둥하기까지 한 호원의 반응은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허.”
무휼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된 이상, 자존심의 문제다.
무휼은 죄 풀어놨던 파자마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그러고는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단추를 끼워 넣었다.
정공법이 안 먹힌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그만이었다. 반드시 그 입으로 속셈을 실토하게 만들리라.
무휼이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는 호원의 동그란 뒤통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꼬시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무휼은 유혹을 받았으면 받았지, 단 한 번도 남을 유혹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
밥을 차려준 건 체하게 해서 괴롭히려는 속셈이었던 건가. 호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뜨끈한 국에 밥을 말았다.
그의 앞에서는 무휼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호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차려진 밥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모습이 꼭 연예인 화보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화보 속의 연예인은 주기적으로 눈을 깜빡거리면서 사람 밥 먹는 것을 뚫어져라 관찰하진 않는다.
‘엄청 부담스럽네.’
호원은 괜히 뭉친 밥을 푸는 척하며 국그릇에 숟가락만 지분거렸다. 신경을 온통 숟가락에 집중하고 있는 와중에도 뺨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왜 안 먹냐?”
결국 긴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항복한 것은 호원 쪽이었다. 그는 여전히 국그릇에만 시선을 집중한 채로 툭 내뱉듯 말을 뱉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의아해진 호원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무휼은 여전히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돌연, 무휼의 한쪽 눈이 깜빡깜빡 감겼다 떠졌다. 나비 날개처럼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그에 맞춰 팔랑팔랑 움직였다.
“…눈에 뭐 들어갔냐?”
“에이씨.”
무휼이 긴 숨을 내뱉으며 몸을 세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숟가락을 드는 폼이, 뭔가가 마음대로 안 풀려 잔뜩 골이 난 모양새였다.
‘왜 저래?’
미간을 찌푸린 호원은 이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시선을 내렸다. 어찌 됐든 드디어 저 부담스러운 시선에서 해방되었으니 허기진 배를 양껏 채울 셈이었다.
“너 의외로 요리 잘한다?”
식후 디저트로 사과를 깎으며, 호원이 무휼에게 말을 걸었다. 텅 빈 국그릇에 새 밥을 꾹꾹 채워 넣던 무휼이 그를 돌아보았다.
“의외야?”
“겉보기에는 남이 해준 것만 받아먹고 자란 도련님같이 생겼잖아.”
그런가, 무휼이 작게 중얼거리며 밥 위로 국을 부었다. 그러고는 남아 있던 햄과 달걀프라이를 국에 만 밥 위에 털어 넣었다.
그야말로 개밥 같은 모양새에 호원이 입을 다물었다. 진짜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논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내리눌렀다.
“그러는 당신도 의외야.”
“뭐가?”
무휼의 말에 호원이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되물었다. 혼자 먹으려면 사과 반 개로도 충분했겠지만, 맞은편에 앉은 놈이 먹는 속도를 보아하니 두 개 정도는 깎아 놔야 할 것 같았다.
그런 호원의 머리 위로 무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끔씩 좀 귀엽거든.”
무휼의 말에 날렵하게 과일 껍질을 깎아내던 칼이 우뚝 멈췄다. 멍하게 입을 벌린 얼굴로 호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무휼이 밥을 크게 한술 뜨다 말고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자신이 뭘 잘못 말했냐는 듯,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눈이었다. 그에 할 말을 잃은 호원이 고개를 저었다.
방금 그게 뭐였지. 아니, 생각하지 말자. 의미 부여하지 말자. 호원은 기계적으로 과일 껍질을 깎아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푹 숙인 얼굴에는 엷은 분홍빛이 번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