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입장 차이
“비밀 얘기는 다 끝냈어?”
호원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무휼은 그새 씻었는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허리에 달랑 수건 한 장 두른 상태였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를 봤던 호원은 순간 얼어버렸다.
‘아니, 잠깐. 갑자기 이건 좀 아니지!’
호원은 얼른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야속한 망막은 찰나에 본 절경을 더없이 선명하게 뇌리에 띄우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선에 달라붙은 물기를 머금은 검은 머리카락, 쭉 뻗은 목선과 도드라진 쇄골, 광활하다는 말이 어울리게 넓은 어깨와 그 아래 붙은 근육질의 몸.
그린 것처럼 이상적으로 갈라진 복근 사이로 결을 따라 흘러내리던 물방울과, 그 아래 보이는 선명한 장골 라인까지,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 좀… 옷이라도 입어.”
“빌릴 옷을 줘야 입지.”
무휼은 능글맞게 웃으며 머리를 털던 수건을 목에 걸쳤다. 지금까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만 꺼내 입었으면서, 오늘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호원은 눈만 끔뻑거렸다.
“옷장에 옷 있잖아.”
“속옷은 안 보이던데?”
무휼은 말을 하면서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그것이 꼭 먹잇감을 발견하고 천천히 숨통을 조여오는 뱀 같아서, 호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서, 서랍장 안쪽에 있어. 내가 저번에 말해주지 않았나?”
“그랬나? 아, 얘기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무휼은 호원의 말을 끊으며 동시에 팔을 뻗었다. 근육으로 잘 짜인 탄탄한 팔이 호원의 양옆을 막아섰다.
무휼의 시선이 꽂혀 있는 오른뺨이 따가웠다. 호원은 눈을 질끈 감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쪽 속옷 말이야.”
한 뼘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무휼이 속삭였다. 미지근한 숨결에 솜털이 쭈뼛 섰다.
‘대체 얘는 왜 이렇게 거리감이 없는 거야.’
호원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무휼은 유독 스킨십도 많고 사람을 대하는 거리 자체가 가까웠다.
그냥 해도 될 말도 굳이 지척까지 와서 얼굴을 맞대고 한다거나, 불러 세우면 될 걸 말없이 덥석덥석 팔이며 허리께를 잡곤 했다.
아무래도 원래 습관이 그런 모양인데, 호원은 슬슬 주의를 줘야 하나 싶었다.
“야, 너….”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려던 호원은 말과 함께 숨을 멈췄다.
바로 눈앞에 푸른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 밝지 않은 센서 등 아래에서도 그 푸른색만은 선연하게 보였다. 바닷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듯 까마득한 기분에 호원은 못 박인 것처럼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너…, 그러니까….”
바보처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거리가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호원이 제대로 말도 못 잇고 말꼬리를 씹는데, 돌연 푸른 눈동자가 장난기를 담아 곱게 휘었다.
“요 며칠 입어보고 안 건데.”
무휼이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팔랑팔랑 움직였다. 흘긋 자신의 몸 쪽을 눈짓한 그가 이내 느릿느릿 덧붙였다.
“당신 팬티, 좀 꽉 끼더라.”
순간, 당황해서 발갛게 달아올랐던 호원의 얼굴이 멍해졌다.
“…뭐?”
“몸은 좋은 편인 거 같던데 거긴 평균 사이즈인가?”
무휼이 대놓고 호원의 사타구니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허리에 손을 척 짚었다.
닿을 것만 같았던 숨결이 떨어지고 나니 그제야 녀석이 한 말의 의미가 호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호원의 얼굴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붉게 달아올랐다. 까마득하게 어린 놈에게 농락당했다는 수치심과 직설적인 표현에 전신이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었다.
“이…, 이 미친…!”
“에이, 그런 표정 짓지 마. 사이즈가 그냥저냥이어도 스킬로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다고.”
무휼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호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위로하는 듯한 그 태도에 급기야 호원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야, 이 개새끼야…!!!”
채찍처럼 휘두른 호원의 팔이 무휼의 맨살에 내리꽂혔다. 물기 어린 피부에 쇄도한 손바닥이 찰싹, 찰싹. 차진 소리를 냈다.
“아! 왜, 뭐! 왜 그래?!”
“이 미친 새끼! 이 개새끼야아!!”
호원이 악을 내지르며 손바닥을 휘둘렀다. 덕분에 무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옆구리를 끌어안은 채 한참 동안 얻어맞아야 했다.
***
“아이씨, 갑자기 왜 저래? 미친 거 아냐?”
무휼은 씩씩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불퉁한 얼굴로 쾅 닫힌 문을 노려보던 그가 거칠게 제 머리를 털었다.
‘기껏 친해져 보려 했더니만….’
그래도 신세 지는 처지에 친분이라도 좀 쌓아보려 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주제가 잘못됐나? 괜히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기도 하고…. 무휼을 쯧, 하고 혀를 찼다.
“아니, 같은 거 달린 남자들끼리 이런저런 얘기 좀 할 수 있지. 뭘 저렇게 예민하게 굴고 난리야?”
무휼이 투덜거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예상했던 반응과는 영 딴판이었다.
같이 샤워를 하다가도 이런 얘기에 낄낄거리며 농담을 주고받았던 팀메이트들을 떠올리자,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어졌다.
괜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는데, 옆구리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샤워할 때도 최대한 물에 안 닿게 조심했건만, 저놈의 아저씨가 등판을 마구 두들겨 팬 덕에 붕대 위로 살짝 핏물이 번져 있었다.
짜증스럽게 붕대를 내려다보던 무휼이 이윽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 서바이벌 나이프를 들고 위협하던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음에도 말 한번 제대로 섞어본 적 없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무휼은 그가 왜, 어떤 심정으로 자신에게 나이프를 들이댄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게다가 잘 둘러대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곧 주변에서는 무휼의 부재를 눈치챌 터였다. 코치님한테는 배 짼다 해도 이 일이 어머니에게 알려지는 것만은 안 됐다.
일단 이곳에서 가능한 한 오래 버티면서 상황을 봐야겠다. 무휼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혹여 누군가 무휼을 찾으려 해도, 그와는 조금의 연관조차 없는 이곳까지 찾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터였다.
‘일단 그러려면 집주인이랑 친해지는 게 좋겠는데.’
무휼의 시선이 흘긋 벽 쪽을 향했다. 그가 머물고 있는 옷방과 호원의 방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저 벽 너머에 있을 집주인을 떠올린 그가 짜증스럽게 목 뒤를 주물렀다.
이 집 주인은 호구다. 그것만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가끔 그를 가출 청소년이나 길거리에 방치된 미아를 보는 눈으로 보곤 했다.
연민, 측은함, 안쓰러움 그런 복합적인 감정들이 눈에 훤히 보여, 무휼은 종종 당혹스러웠다.
대체 자신에 대해 뭘 안다고, 아는 사이라도 되는 양 아낌없이 친절을 베푸는 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는 한편, 그 마르지 않는 친절과 호의에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그건 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 저토록 순수한 호의를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호의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
그것은 무휼에겐 무척이나 생경한 일이었고, 자신의 생애에 또다시 마주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일이었다.
‘뭔가 원하는 게 있겠지.’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방심하지 말자.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밑에 무엇을 숨기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무휼은 겉으로 친한 척하면서 호원의 심중을 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이 그에게 원하는 것은 비슷비슷했다. 그중 호원만은 다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첫 번째로 떠오른 건 돈이었다.
그러나 호원은 무휼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는 상태.
그렇다면 돈을 노리고 그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첫날 빼앗겼다 돌려받은 지갑 속에도 사라진 건 없었다.
두 번째는 남에게 과시할 만한 친분이었다.
지금이야 한낱 대학생 신분이라지만 그를 눈여겨보고 있는 구단이 많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때문에 과 동기는 물론이고 다른 학과 학생들도 그와 친분을 쌓으려 접근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그가 요 며칠 사이 관찰한 호원은 모든 종류의 스포츠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스포츠 신문은 읽던데, 그마저도 야구랑 축구 경기 결과만 보고 내팽개쳤던가.’
아마 손님과의 화제가 떨어지지 않도록 보는 정도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하지만….
그럼 몸인가. 무휼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상대는 남자인데?
“에이, 설마….”
무휼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호원이 남자치고 예쁘장하게 생긴 타입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연히 만난 사람이 그쪽 성향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호원이 만약 그런 쪽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진즉 티를 냈었을 것이다.
무휼은 한숨을 내쉬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원이 그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가만-’
무휼이 벽에 기대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곧바로 올라오는 격통에 신음을 내뱉었지만, 그의 눈은 호원이 있을 벽 너머를 향해 있었다.
“진짜 그쪽인가?”
무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러고 보면 호원은 그의 얼굴을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
종종 멍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던 모습이라거나, 맨가슴을 보고 얼굴을 붉히던 걸 떠올리니 무휼의 생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
그럼 그렇지, 아무런 흑심도 없이 타인을 도와줄 리가 없었다.
‘근데 왜 달려들진 않지?’
무휼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가 이곳에 온 지도 일주일을 채워가고 있었다. 호원이 흑심을 품고 있었다면 부상자인 데다 갈 곳도 없는 그에게 손을 뻗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패턴을 생각해 보자면 그게 맞는다고, 무휼은 생각했다.
보기 드물게 잘생긴 얼굴 탓인지, 또래에 비해 크고 육감적인 몸 탓인지, 같은 성별에게 대시를 받는 일쯤이야 무휼에겐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만큼, 자신을 향하는 타인의 감정에도 예민한 편이었다.
무휼은 딱히 그런 성향의 사람들을 혐오하지 않았다. 그저 흥미가 동하지 않아 대충 무시했을 뿐.
하지만 만약 호원이 그런 성향이라면-
‘…나쁘지 않겠는데?’
오히려 상황적으로는 좋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이곳에 오래 신세 져야 하고, 호원은 그의 얼굴만은 취향인 모양이니까.
일단은 호원이 정말 그쪽 성향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아둬서 나쁠 거 없었다.
생각을 마친 무휼이 입꼬리를 올렸다. 심해와도 같은 푸른 눈이 곱게 휘며 시선이 벽 너머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