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5)화 (5/101)

제5화. 생각보다 쓸모 있는

아차. 입 안에서 얼음을 굴리던 호원은 그만 그것을 무휼의 얼굴에 뱉을 뻔했다.

사레가 들려 컥컥거리던 호원이 남은 아메리카노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좀 진정된 얼굴로 흘금 무휼의 눈치를 봤다.

“그냥… 저번에 네 신분증 좀 봤어.”

“다른 것도 봤어?”

“아냐! 사람을 뭐로 보고… 그냥 신원 확인 겸 신분증만 본 거야.”

호원은 괜히 죄책감이 들어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무휼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곧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빨대를 물었다.

어차피 신분증이며 휴대폰은 다시 무휼의 손에 있기도 하겠다, 그로서는 호원이 당장 자신을 내쫓지만 않는다면 뭘 하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런 속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호원은 괜히 제 발 저린 사람처럼 화제를 돌렸다.

“그, 그나저나 상처가 금방 낫는다니 다행이네.”

“응.”

“이제 앞으로 어쩔 거야?”

호원의 물음에 무휼이 흘긋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그간 도와준 빚이나 좀 갚아볼까?”

무휼의 파란 눈동자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

시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셰이커를 흔들면서도 바 테이블 가까이에 앉은 손님들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탁월한 기억력과 섬세한 센스는 그녀의 주된 무기였지만, 까다로운 칵테일을 만들면서도 근처에 앉은 손님들을 완벽하게 케어하는 능수능란함이야말로 시영의 강점이었다.

그러나 오늘, 시영이 자랑하는 그림 같은 미소는 바 한쪽에 앉아 상기된 얼굴로 소곤거리는 손님의 말에 의해 처참하게 깨져 버렸다.

“야, 야. 오늘 봤어? 누구야?”

“원래 일하던 사람이야? 아니지?”

보통 바 ‘3월’에 오는 손님들은 왁자하게 떠들며 주변에 피해를 준다거나, 술병을 깨 먹는 등 소위 말하는 ‘진상’이라 할 만한 손님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한 명, 혹은 여럿이 방문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술과 음식의 맛을 음미하다 기분 좋게 돌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뭔가 달랐다. 가게 안의 사람들 모두 묘하게 들뜬 듯, 평소보다 상기된 얼굴과 높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마다 힐끗거리며 바라보는 자리엔 평소 3월에는 없던 새로운 인물이 컵을 닦고 있었다.

“연예인인가?”

“연습생 아냐? 요즘 아이돌들은 데뷔 전에 이런 데서 알바하고 그런다며.”

“데뷔 전에? 왜?”

“바보야, 이런 데서 저런 사람이 일해봐. 당장 사진 하나만 올려도 난리 날걸? 그걸로 인지도를 미리 쌓는 거지.”

이런 데라니…. 시영은 순간 입꼬리를 꿈틀했지만 이내 가게 내부를 한번 훑어보고는 납득했다.

바 ‘3월’은 손님과의 소통을 중시하고 싶다는 호원의 의도 아래 설계된 덕에, 다른 바와는 다소 차별화된 구조로 되어 있었다.

보통 지하에 위치한 바는 협소한 자리와 수납공간 때문에 바 테이블을 벽면 가까이 두고는 했다. 벽면에는 주로 보틀을 수납하고, 그 아래로 개수대와 냉장고를 넣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바 테이블과 벽면 사이의 직사각형으로 길쭉한 공간에는 바텐더가 오가며 벽면의 보틀과 아래 냉장고를 수시로 사용할 수 있게끔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3월의 바 테이블은 원형으로 만들어진 데다, 가게 정중앙에 있었다.

테이블 자체도 꽤 높은 편이었는데, 이는 비단 평균 신장을 웃도는 호원에게 맞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영은 아래로 손을 뻗어 작은 냉동실 문을 열고, 푸른색의 각진 병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바로 손 닿는 거리에 있는 원형 선반을 움켜잡았다.

조금 힘을 주어 한쪽 방향으로 밀자, 원형 선반이 부드럽게 돌아가며 칼과 도마 같은 도구와 과일이 담긴 바구니, 각양각색의 보틀들이 그녀의 앞으로 휘리릭 지나갔다.

그중 도마와 과도, 레몬을 잡아챈 그녀가 능숙하게 몸을 돌렸다.

바텐더의 움직임을 가게 안 어디서든 볼 수 있도록 3월의 바 테이블에는 높은 찬장이나 장식장 따위가 없었다. 대신 보관 공간을 늘리기 위해 곳곳에 마술처럼 수납공간이 들어차 있었다.

덕분에 바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많은 데다, 바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도 바텐더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아마 그 이유일 것이다. 오늘 이렇게 손님들이 들뜬 것은.

시영은 한숨을 삼키며 글라스 안에 장식용 레몬과 머들러를 꽂아 마무리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예의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7번 테이블. 진토닉입니다.”

그녀가 내미는 글라스는 가까이 있던 서빙 직원이 운반했다.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글라스 안의 술은 절대 흘리지 않는 것이, 다년간 훈련시킨 보람이 있었다.

시영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보틀을 정리하고 다음 메뉴를 위해 셰이커를 들었다.

“그리고 너.”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녀 가까이에 서 있던 무휼에게 들리지 않을 수 없는 소리기도 했다.

지문이 묻지 않게 조심하면서 글라스를 닦던 무휼이 흘긋 파란 눈동자를 굴렸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야?”

신기하게도 시영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그녀처럼 숙달된 기술이 없는 무휼은 대답하는 대신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다.

기묘할 정도로 새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얼굴이 ‘난 아무런 꿍꿍이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듯해서, 시영은 오히려 약이 올랐다.

그녀가 커다란 얼음을 잡아 들고 카빙을 시작했다. 카각카각 하는 얼음 깎이는 소리 사이에 시영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갑자기 일을 돕겠다니, 무슨 속셈이야. 이대로 눌러앉기라도 할 셈인가 보지?”

“글쎄.”

무휼은 피식 웃었다. 시영의 날 선 말투에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무휼은 더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고, 시영도 몰아치는 주문을 쳐 내느라 그에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시영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에 대한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장신의 미남자. 정체도 뭣도 모르지만 칼에 맞은 채로 발견된 걸 보면 질이 그다지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뭐니 뭐니 해도….’

시영은 바 테이블 구석에 앉은 손님을 상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흘렸다. 손님이 떠난 테이블을 정리하고 글라스를 옮기는 무휼의 모습이 보였다.

섬세한 유리잔이 겹치지 않게 트레이에 담는 손길이 민첩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그 행동에 시영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눈치껏 제 할 일을 찾아서 하는 것도 그렇고, 중간중간 요령 좋게 손님을 대하는 것도 그렇고, 평소 이런 일을 많이 해본 사람의 태도였다.

그럼에도 뭐랄까,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다. 이 공간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묘하게 이질적인 분위기였다.

‘재벌집 도련님이 사회생활 체험하러 나온 것 같네.’

시영은 그렇게 일축했다. 건들거리지 않는 걸음걸이, 꼿꼿하게 편 허리와 반듯한 목선, 자리를 안내하는 손짓 따위가 쓸데없이 우아하고 절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몸에 밴 것인 듯 본인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윽한 조명 아래 무휼은 시선을 단숨에 빼앗는 압도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옅은 미소를 띤, 이질적인 파란 눈동자와 맞물려 굉장히 신비로운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무휼의 존재가 바 ‘3월’에 해가 되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오히려 일도 썩 만족스럽게 잘하는 편이고, 얼굴마담 역까지 자처해 주니 오히려 득이라면 득이었다.

실제로 그날, 호원은 매상이 평소의 1.5배나 올랐다며 함박웃음을 짓고 기뻐했다.

시영은 그마저도 영 못마땅했지만, 호원은 아무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태평했다.

“빚 갚는다고 했잖아.”

무휼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에이프런 주머니에서 번호가 적힌 쪽지며 명함 등을 한 움큼 잡아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아니, 잘생겼다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호원은 그런 그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았다.

워낙 장신이라 흰 셔츠에 검은 슬랙스만 입혀 놔도 어지간한 모델의 뺨을 서너 대 후려쳤을 텐데, 그 위에 조각 같은 미모까지 더해지니 눈에 띄어도 너무 띄었다.

3월은 바 쪽의 조명이 다른 테이블보다 한층 밝은 데다 유니폼을 입은 무휼이 머리를 넘긴 덕에 트레이드 마크인 푸른 눈동자도 훨씬 영롱해 보였다.

“왜, 반하겠어?”

무휼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호원은 그저 피식 웃었다.

“까분다.”

“이런. 차였네.”

말과는 달리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는 태도에는 실망한 기색조차 없었다. 어쩐지 친한 사이처럼 가볍게 티격태격하는 모습이며 퍽 가까운 거리에 시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그 예감은 무휼이 뒷정리를 하는 호원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시영은 퇴근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호원을 냉큼 붙잡았다. 그녀의 시선이 흘긋, 계단 층계참에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는 무휼을 향했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오너.”

“얘기?”

“네. 중요한 얘기예요.”

그녀의 말에 호원이 뒤를 돌아보며 손을 휘적거렸다. 먼저 올라가라는 신호였다.

무휼은 여전히 생각을 알 수 없는 푸른 눈으로 두 사람을 잠시 쳐다보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그래, 무슨 얘기?”

호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시영을 바라보았다. 시영은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저 사람 말이에요. 권무휼이라던.”

“아….”

그 한마디에 호원은 시영이 자신을 불러 세운 이유를 눈치챈 듯했다. 그는 난감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더니 배시시 웃었다.

“역시 좀 신경 쓰여?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서 그럴 거 같긴 했어. 그래도 일은 나름 잘하지 않아?”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시영은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대체 이 사람은 뭐가 문제기에 이 나이를 먹도록 이렇게 위기감도, 경계심도 없을 수 있는 걸까.

시영은 평소라면 마냥 좋게만 보이던 그의 해맑음이 오늘따라 한탄스러웠다.

“저 사람 언제 나간대요? 오늘 보니까 움직이는 것도 멀쩡해 보이던데.”

“어, 음…. 그게….”

호원은 시원시원한 성격의 그답지 않게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사이 뭔가 사정이 생긴 모양이었다.

“일단 당분간 여기 머물기로 했어.”

“당분간? 그게 얼마나 될 줄 알고요?”

“그게, …당분간?”

호원이 설명하기 애매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시영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긴가 싶었다.

“아니, 정체도 모르고, 더군다나 칼에 찔린 사람을 그렇게 막 받아줘도 되는 거예요? 그러다 무슨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렇게 나쁜 애는 아냐.”

호원은 불같이 따지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 호원이라고 마냥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보기에 무휼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고, 다년간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길러온 자신의 직감과 사람 보는 눈을 믿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해봤자, 오히려 시영의 성질만 건드릴 터였다.

“뭐 아무튼 그렇게 됐어. 앞으로 가게에 곧잘 도우러 올 모양이니까 너무 날 세우지 마. 혹시라도 쟤가 너한테 무슨 짓 하면 꼭 나한테 말하고.”

“정말 오너는….”

시영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문득 머리 한쪽을 스쳤던 추측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 오너. 아니, 호원 오빠. 이건 그냥 친한 동생으로서 묻는 건데.”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호원의 입으로 확답을 듣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시영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혹시… 저 무휼이란 사람이랑, 그… 그렇고 그런 관계…야?”

“뭐?”

호원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못 알아듣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래? 내가 아무리 그쪽이라지만,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어!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 애한테는 절대 손 안 댄다고!”

“정말?”

“그래!”

호원은 고개까지 세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신 어린 대답에 시영은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너무 빈틈 보이지 마.”

“빈틈? 내가?”

호원은 어림도 없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모습마저도 빈틈투성이처럼 보여, 시영은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조심해. 사람은 겉보기나 나이만으로는 속을 알 수 없다는 거, 이미 오빠도 잘 알잖아.”

“그래. 걱정해 줘서 고맙다.”

진심 어린 걱정에 호원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괜한 걱정이다 싶었다.

그는 열 몇 살이나 어린 놈한테 손을 댈 만큼 파렴치한이 아니었고, 애초에 무휼이 그와 같은 성향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아니, 설령 같은 성향일지라도 서로의 취향이라는 게 있는데, 그렇게 쉽게 눈이 맞는다거나 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시영이 걱정하는 관계가 될 가능성은 전무했다.

적어도 그때의 호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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