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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60)화 (60/60)

60화

해쓱한 낯을 말없이 바라보는 얼굴에 일순간 수심이 비쳤다. 마치 말하기를 망설이는 듯한 낌새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말도 안 돼.

머릿속에 그날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레 같은 소리와 동시에 밀려오던 거대한 눈 더미에 도망치던 사람들의 비명. 눈사태를 막으려다 휩쓸린 연녹수의 뒷모습.

금세 안색이 어두워진 유원을 향해 그가 안면을 환하게 풀어 보였다.

“이탈자 하나 없이 다들 무사합니다.”

“녹수 님도 괜찮으신 거예요?”

“털끝도 안 다쳤다고 한다면 거짓이겠지만, 지금은 정정하시다 못해 평소 같으십니다.”

“평소 같으시다고요? 정말이죠? 진짜로 무사하셨던 거죠?”

“그럼요. 어르신이야말로 아기씨께서 여태 행방을 알 수 없어 근심이 많으셨을 겁니다. 아직 편찮으신 와중에도 부적까지 여러 장 써 주시며 꼭 아기씨를 찾아오라 하시더군요.”

걱정을 떨쳐 내지 못해 거듭 되묻는 유원을 안심시키듯 손청준은 차분하게 하나하나 대답했다. 그제야 유원은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여태 걱정하던 모든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었다.

“가까운 안전지대까지 들어가려면 한나절은 더 가야 하니 조금 더 주무세요. 의무병 말로는 기가 허해서 생긴 어지럼증은 잘 쉬는 수밖에 없다더군요.”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가림막을 도로 내린 손청준의 그림자가 마차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유원은 제 어깨에 앉아 있는 탄이를 쓰다듬다 말고 볼을 꼬집어 봤다. 아무리 꼬집어도 아프기만 할 뿐, 눈앞에 보이는 모든 장면은 생시였다.

그러면 태백훈도 무사한 거겠지. 적어도 손청준이 멀쩡하게 웃으며 유원에게 안부를 주고받은 것으로 봐서는 그 또한 여분의 마차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럼 그 무시무시한 조마구는 어떻게 된 거지. 따돌렸을까. 아니면 죽었을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잠시 지나간 일을 정리하던 그때였다.

마차가 멈췄다. 마차만이 아니라 말도, 사람들도 전부 우뚝 선 채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마차 앞쪽에서 누군가가 엄히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선두에서 동태를 살피고 온 부관이 급히 달려와 말을 올렸다.

“저 앞, 호숫가에 뭔가가 있는 듯합니다.”

“호숫가?”

“예, 무시하고 지나가도 그만이긴 한데, 앞쪽 말들이 겁먹는 바람에 좀처럼 움직이지 않으려 듭니다.”

“요수? 아니면 짐승?”

“불개라는 것 같습니다.”

불개라면 북도에서 노루만큼이나 흔한 요수이건만 험한 길도 평지처럼 다니는 군마들이 겁을 먹을 정도라니, 어지간히 사나운 족속인 듯했다.

“궁병을 보내서 활로 쫓아내라 하게.”

까악, 까악, 까마귀가 크게 울었다. 조견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마차에서 내린 태백훈이 손청준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왔다.

“문제가 생겼나?”

“큰 문제는 아닙니다. 이 앞 호수를 지나면 안전지대인데 불개들이 길을 가로막은 모양입니다.”

“불개가?”

태백훈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불개는 그 포악하다는 요수들 중에서도 나름 영리한 편이라 직접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 사냥꾼의 활과 총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불개 여러 마리가 대낮부터 길목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다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음이 분명했다.

“아무튼 별일은 아닐 테니 마차에 들어가셔서 쉬심이…….”

조견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그는 성큼성큼 행렬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거침없는 움직임이었다.

언덕 아래에 눈 덮인 커다란 호수에는 몸집이 송아지만큼 커다란 불개 세 마리가 있었다. 그들은 맞은편에 있는 바위 같은 것을 향해 털을 곤두세우고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발포 신호에 궁병들이 당긴 시위를 놓자 화살 여러 개가 언덕 아래로 날아갔다. 빗맞은 화살에 놀란 불개들이 움찔거리며 한발 물러났으나 여전히 앞을 노려보며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얼른 쫓아내라!”

결국 화살에 한 마리가 맞고서야 불개들이 캥캥 소리를 내며 꽁무니를 내뺐다. 길목을 막는 방해물을 멀리 쫓아 보냈는데도 말들은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저 눈 쌓인 바위틈 사이에 뭔가 있는 건가. 겨우 말을 다독여 언덕으로 내려오자 마냥 덮어 둘 수만은 없을 만큼 강한 기척이 바위 같은 덩어리 쪽에서 들려왔다. 가냘프면서도 악에 받친 울음소리.

“이건…… 범이 아닌가.”

자세히 들여다보자 바위가 아니라 커다란 호랑이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널브러진 몸이 눈에 덮여 있어 멀리서 보기에는 얼핏 커다란 바위로 착각할 만했다.

시신은 참으로 처참한 꼴이었다. 머리는 반쯤 파먹혔고 갈라진 뱃가죽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팔도 산중 특히 원경도 산속에 사는 호랑이는 대호(大虎)라 불릴 정도로 영묘한 존재였다. 어지간한 요수도 저리 가라 하는 호랑이를 힘으로 제압해 갈가리 뜯어먹을 정도면 상당히 강력하고 포악한 요수임이 틀림없었다.

그럼 방금 그 불개들은 이 죽은 호랑이가 무서워 경계하며 지켜보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남은 잔해라도 파먹을 참이었던 건가.

그 순간, 호랑이의 뱃가죽이 불룩 움직였다.

“영감, 조심하십시오.”

수상한 동태에 빠르게 반응한 손청준이 급히 칼을 들고 태백훈의 앞을 막았다. 가죽을 벌리며 시커먼 덩어리가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끽해야 사람 팔뚝 정도밖에 되지 않은 자그만 호랑이였다. 호랑이는 아기작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몰려 있는 사람을 향해 캭, 캭, 울부짖었다.

꼴을 보니 저 죽은 호랑이가 아무래도 어미인 모양이었다. 요수한테 잡아먹힌 어미 곁을 맴돌고 있다가 불개들한테 발각돼 뱃가죽 속으로 숨은 것이리라.

“이런, 이런. 어떡할까요.”

조견이 곤란한 듯 턱을 긁적거렸다. 태백훈이 뭐가 문제냐는 듯 그를 쳐다봤다.

“영감께서도 아시다시피 호랑이는 신령스러운 동물이잖습니까. 함부로 죽였다간 저주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저주가 무서워서 못 죽이면 사냥은 어찌하는가?”

“그래도…… 어린놈이라 내버려 두면 자연히 죽지 않겠습니까. 몸집도 작아 병약해 보이니 그냥 무시하고 가시는 편이 어떨지요.”

조견이 말한 대로 새끼 호랑이는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비틀거리며 떨고 있었다. 어미가 죽었으니 배고픔과 추위에 꽤 오래 시달렸음이라. 냉랭하게 호랑이를 응시하던 태백훈이 손청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 진사. 자네 칼 좀 빌려주게.”

그 말에 손청준이 들고 있던 칼을 두 손으로 잡아 즉시 태백훈에게 올렸다. 날 벼린 칼날이 새파랗게 빛나자 새끼 호랑이가 부들부들 떨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태백훈을 향해 목이 터져라 울었다. 흡사 어미를 지키기라도 하겠다는 듯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무시하고 내버려 둬 봤자 해가 지고 나면 눈이 밝아진 불개들이 다시 찾아와 새끼를 잡아먹으리라. 어차피 돌봐 줄 어미가 죽었으니 차라리 새끼도 편히 보내 주는 편이 나았다.

“영감……!”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태백훈이 고개를 돌리자 어느 틈에 마차에서 내렸는지 유원이 앞까지 나와 있었다. 태백훈은 들은 체도 않고 칼을 쥔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날아드는 칼에도 굴하지 않고 호랑이를 끌어안은 유원을 보고 태백훈이 노기에 찬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웅크린 유원이 마구 발버둥 치는 호랑이를 감싼 채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젖도 못 뗀 새끼입니다. 해악을 입히지도 않았는데 어찌 칼부터 들이미시려고요.”

“어차피 놔둬 봤자 굶어 죽을 텐데, 지금 편하게 목숨을 끊어 주는 편이 낫습니다.”

“영감…….”

“물러서세요.”

“싫, 습니다.”

“물러서래도요.”

“죽이지 마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손 진사. 조 장군. 저 사람을 마차로 돌려보내게.”

명령에도 두 남자 다 선뜻 나서지 않고 슬그머니 눈치만 살폈다.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하는 몸 상태로 겁도 없이 태백훈을 가로막는 유원의 태도가 제법 흥미로운 탓이었다. 거기다 평소의 태백훈이라면 괘씸하다며 끌어내라고 했을 텐데, 굳이 마차로 돌려보내라고 부드럽게 타이르기까지 하고 있었다.

“어미 대신 조금만 돌봐 주면 금세 괜찮아질 거예요.”

“돌본다고? 누가요? 그대가 저 호랑이 새끼를요?”

“예… 제가, 돌볼 수 있어요.”

“가당키나 한 소리라 생각하고 한 말입니까? 그 호랑이가 커서 그대를 해치면 어쩌시려고요?”

높아진 언성에 유원은 기가 죽어 쉽사리 대답을 받아칠 수 없었다. 품에 감싸인 새끼 호랑이가 갑갑하다며 유원의 손등을 할퀴어 대자 이를 보다 못한 태백훈이 유원에게서 호랑이를 잡아채려 했다.

“으윽.”

부딪친 손에 세게 얻어맞은 유원이 신음하며 몸을 웅크렸다. 덩달아 놀란 태백훈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화가 난 나머지 자제하지 못하고 손에 힘을 준 탓이었다. 노심초사하여 미처 유원에게서 호랑이를 빼앗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태백훈은 입술만 깨물었다.

“아기씨, 괜찮으십니까.”

손청준이 그를 부축하려 들자 유원이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물기가 스며든 두 눈이 태백훈을 뚫어져라 올려다봤다.

“비록 호랑이가 사람을 해친다고도 하지만 이 아이는 어미를 잃고 죽어 가는 새끼일 뿐이잖아요. 신령스러운 동물을 죽였다는 이유로 영감께 괜히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란 소리 나오는 것도 싫고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인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오래 데리고 있지 않을 거예요. 다 나아서, 어미 없이도 혼자 살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바로 산속으로 돌려보낼게요. 만약 그 전에 이 호랑이가 사람을 해칠 때는……. 죽인다고 하여 막지 않을 것이고요.”

고집스럽다 못해 단단한 눈동자가 간곡하게 허락을 청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닌지라 태백훈도 쉬이 다그칠 수 없었다. 원경도에서 호랑이는 사람을 잡아먹기도 하나 요수를 대적할 수 있는 영물이라 숭앙받기도 했다. 그러니 이 호랑이를 살려 보낸다 해서 반드시 해악이 되지만은 않으리라.

칼을 쥐고 있던 태백훈의 손이 스르륵 내려갔다. 무거운 한숨과 함께 그가 손청준에게 칼을 돌려주며 말했다.

“알았으니 추운 곳에 그리 계시지 말고 얼른 나오세요.”

“정말, 허락해 주시려고요?”

“영물이라 죽이지 못하시겠다며 휘두르는 칼 앞에 서서 고집부리는데 난들 어쩌겠습니까.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도 아니고. 칼 앞을 대체 누가 그리 무모하게 가로막는단 말입니까.”

문득 태백훈은 정월 초일 무렵을 떠올렸다. 이조참판 홍 씨가 올려 보낸 새신부의 꽃가마.

전복된 가마와 나뒹구는 시신들 사이에 오로지 그만이 살아 있었다. 아비의 욕심처럼 참으로 질기고 징한 목숨이려니 했다. 죽지 않았으니 살려만 두고 다시는 오지 못하도록 겁을 주고 내쫓으려 했었다.

싸늘한 주검이 된 사내를 온몸으로 감싸며, 홍유원은 들이민 칼끝을 가로막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가짜를 스스럼없이 제 인연이라 믿던 그 알량한 정분이 못내 우스운데도 그 눈이 잊히지 않았다.

언 땅으로 뿌리를 뻗고 막 잎을 틔운 겨울나무의 잎사귀 같은 눈. 잔불이 일렁거리는 듯하던 시선.

“영감, 제가 또 뭘 잘못했는지요?”

조용히 응시하는 그의 입에서 판결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며 유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쉰 태백훈이 말했다.

“잘못이야 한둘이 아니시지요. 지금만 해도 고작 호랑이 때문에 제 앞을 가로막지 않으셨습니까. 하여 어떤 벌을 줄지 고민 좀 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태백훈이 이내 유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유원은 천천히 그의 손을 붙잡고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움에 휘청거리자 그가 팔로 단단히 받쳤다. 태백훈은 유원이 호수 바깥으로 나오는 동안 한 번도 손을 풀지 않았다. 흡사 공예품을 다루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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