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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59)화 (59/60)

59화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내 아까 분명히 멀리 달아나라고……!”

“나중에 매질을 하시든, 처벌을 하시든 다 받을게요. 그러니 같이 가요.”

“뭐라고?”

“이러다 불길 때문에 못 지나가요. 손, 잡아드릴 테니 얼른요!”

기가 막히다는 태백훈과 다르게 유원은 절박한 표정으로 더욱 허리를 숙였다. 아슬아슬하게 내민 손끝을 바라보던 태백훈은 결국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안장 손잡이를 잡고 말에 올라타는 모습을 발견한 조마구가 그르렁거리며 손을 뻗자 유원은 헝겊에 싸 뒀던 재를 조마구의 안면에 확 끼얹었다.

“이, 망할! 망할!”

정통으로 눈과 콧구멍에 들어간 잿가루에 조마구가 비틀거리며 눈을 마구 비볐다. 그사이에 번진 불이 조마구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어디서 갑자기 산불이 났나 했더니 전부 저 곱상한 것이 벌인 수작이었구나.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조마구가 뻐드렁니를 드러내고 울부짖었다.

“진즉 죽였어야 했는데! 그 도사를 기다릴 바에야, 바로 잡아먹었어야 했다!”

단단히 성이 난 조마구가 핏발 선 눈알을 불룩거리며 두 사람이 탄 말을 쫓기 시작했다.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급기야 조마구의 등과 팔에 달린 터럭에까지 불이 붙자 육중한 몸이 주춤거렸다. 대체 어떻게 큰불을 피웠는지 몰라도 자그만 모닥불처럼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이 불에 닿았다간 금세 가죽이 쪼그라들고 몸집은 작아져 불에 탄 벌레만도 못하게 될 터였다.

쿵, 쿵, 분한 듯 발을 구르고 두 팔로 가슴을 두드리는 조마구를 뒤로하고서 두 사람을 태운 검은 말은 힘차게 숲길을 헤치고 달렸다. 지친 기색도 없이 날렵한 달음박질에 조마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산 아래까지 내려가자.

등에 닿는 태백훈의 온기와 숨으로 상태를 확인한 유원이 산길을 살폈다. 동굴 쪽 옆으로 흐르는 천이 하나 있었으니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내려가는 편이 현재로선 그나마 길을 찾기 나을 터였다.

그렇게 숲을 가로지르던 때였다. 바람에 섞인 눈발이 문득 미지근해졌다. 뺨에 닿는 물기에 유원은 말을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방금, 빗방울 같은 것이…….”

톡, 톡, 이마에 물방울이 떨어지더니 머지않아 정말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왜 지금 비가 내리는 거지.”

뭔가 이상했다. 눈보라가 날릴 때는 언제고 한 식경도 안 돼 갑작스럽게 비가 내린다니.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눈과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빗줄기는 서서히 굵어져 이내 옷깃이 흠뻑 젖을 정도였다. 눈길보다도 비에 젖은 길이 더 미끄러운 탓에 제아무리 궂은 길도 잘 달리는 군마라 해도 쉽지 않을 터였다.

텅 빈 안장주머니 안에는 까마귀 한 마리, 말 등에는 두 사람을 태우고 달린 탓에 무거웠는지 말도 점차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등 뒤를 돌아보자 태백훈이 제 등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부상당한 몸으로 여태 조마구를 상대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그는 툭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쓰러질 듯했다. 이런 사람더러 내려서 걸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영감, 이제 괜찮아요. 조금만 더 가면 될 거예요.”

그나마 멀쩡한 모포를 태백훈에게 덮어씌운 유원은 조심스럽게 말 등에서 내려왔다. 두 발로 땅을 딛기 무섭게 눈앞이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어깨며 팔다리 어디 하나 멀쩡한 곳 없는 것처럼 마디마디가 아팠다.

“으…….”

귀에선 삑, 삑, 달아오른 솥뚜껑이 들썩이는 듯한 이명이 반복적으로 울렸다. 눈물이 핑 돌 만큼 괴로웠지만 그래도 최대한 가야만 했다. 아직 비에 불길이 완전히 사그라들기 전에 산 아래로 피신해야만 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 하나가 불쑥 유원에게 달려들었다. 피할 겨를도 없는 빠른 습격이었다.

“어디, 어디로 가려고!”

거꾸러진 유원이 대롱대롱 손에 매달린 채 눈앞에 있는 조마구와 마주했다. 어느 틈에 쫓아왔지. 비가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불길이 아직 남아 있었을 텐데. 빗물에 젖은 몸으로 불을 비집고 뒤쫓아 온 모양이었다.

“아…….”

흐릿한 눈으로 보이는 조마구는 아까보다 상태가 나빴다. 거죽 곳곳이 심한 화상으로 쪼그라들고, 한쪽 눈은 제대로 뜨지 못해 외눈이나 마찬가지였다.

“제발, 그만 해…….”

고개를 저은 유원이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마구가 고개를 갸우뚱 흔들었다.

“그만? 뭘 그만할까?”

“…….”

“또 애원, 해 봐. 빌어 봐. 그러면 저기 있는 칼잡이의 뼈는, 돌려보내 줄게. 응? 응?”

손에 든 유원을 노리개처럼 대롱대롱 흔들며 조마구가 히죽거렸다. 어질어질함도 잠시, 아래쪽에 말 등에 기대어 있는 태백훈이 보였다.

정신 차려야 해. 턱이 욱신거릴 정도로 이를 악문 유원이 허리춤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만일을 대비해 챙겨 둔 자그만 장도칼의 자루가 손끝에 걸렸다.

피와 살을 맛볼 생각에 조마구가 혀를 날름거리며 유원의 목덜미에 손톱을 세웠다. 목에 이가 닿는 순간, 유원은 품속에 숨겨 뒀던 장도칼을 꺼내 힘껏 내리찍었다.

“크악!”

남아 있던 눈 한쪽에 꽂힌 날붙이에 조마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손힘이 풀리며 눈에 찔러 넣은 장도칼 손잡이를 놓친 유원 또한 바닥에 나뒹굴었다.

기어코 두 눈을 잃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조마구가 흐흐, 웃으며 사방으로 손을 더듬거렸다.

“소용없어, 나는 냄새를 잘 맡아.”

엉금엉금 말을 향해 기어가는 유원의 목덜미를 갈고랑이 손이 잡아챘다. 그대로 손톱을 세워 가슴팍을 찢어발기려던 찰나였다.

고드름처럼 길쭉하고 새하얀 섬광이 조마구의 가슴을 관통했다. 꺽, 하는 신음과 함께 조마구가 입에서 피를 토해 냈다.

섬광이 날아온 방향에는 태백훈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만하라고 부탁까지 하는데, 들어줬어야지.”

얼음장 같은 창백한 얼굴에 살벌한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조마구를 산 채로 씹어 먹을 듯했다. 고통에 찬 조마구가 손을 마구 휘둘렀다.

“감히, 감히!”

울부짖는 조마구를 향해 그는 말없이 뛰어들었다. 검기가 맺힌 칼날이 벌어진 주둥이 사이로 내리꽂혔다. 퍽, 물컹한 덩어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갈가리 찢긴 몸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동이 튼 하늘 위로 안개와 매연이 어지럽게 섞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잠시 멍하니 서 있던 태백훈은 천천히 유원에게 다가갔다.

“……참으로, 못나셨습니다.”

도망가라고 해도 마음대로 돌아오질 않나. 시키지도 않은 불을 질러 요수를 상대하려 들지 않나. 매번 말로만 얌전히 있겠다고만 할 뿐, 결국 제 말 한 번 듣지 않는 천하의 애물단지였다.

힘없이 옹송그린 몸에 걸치고 있던 철릭과 모포를 덮어 준 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 * *

갑작스레 쏟아지던 비가 완전히 그치고 나니 장막처럼 뒤덮여 있던 안개마저 옅어졌다.

볕이 들기 시작한 숲속을 샅샅이 뒤지던 수색대 중 하나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깃발을 흔들었다.

“대장! 저기, 연기가 보입니다!”

이에 조견이 눈을 가늘게 뜨고 깃발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골짜기 남동쪽에서 매캐한 연기가 모락모락 일고 있었다. 이런 외진 골짜기에 이유 모를 산불이 날 만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숲에서 멀지 않은 암굴에서 발견된 취사 흔적도 그렇고, 난데없는 연기로 봐선 눈사태에서 행방불명된 생존자가 구조 요청 하려 피운 불이 틀림없었다.

곧 연기가 올라오는 방향으로 수색을 좁히라는 명령이 수신호로 전달되었다. 말을 탄 병사들과 사냥개를 데리고 나선 수색원들이 서둘러 같은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대장! 여기, 사람입니다!”

그들 중 먼저 사람을 발견한 수색대원 중 하나가 서둘러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검은 말 한 마리가 풀을 뜯다 말고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콧바람을 내쉬었다.

“어디서 온 놈이냐.”

홀연히 등 뒤에서 나타난 피투성이 사내가 수색대원의 목에 부러진 칼끝을 들이밀었다. 흡사 귀신같은 무시무시한 모습에 놀란 나머지 수색대원이 입도 벙긋 못 하고 억, 억, 어눌한 신음만 반복했다. 때마침 그 앞에 들이닥친 조견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급히 말 아래에서 내려왔다.

“도백 영감! 무사하셨습니까!”

조견의 말에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열흘 넘게 신변을 알 수 없어 죽었다고 짐작했던 도백이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니.

“일전에 만나 뵈었던 북계군 첨사(僉使) 조견입니다.”

“………그렇군. 어쩐지 낯이 익는다 싶었어.”

태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투는 부드러워졌으나 여전히 칼을 겨눈 채 경계를 풀지 않았다.

뒤늦게 요수의 사체 중 일부를 발견한 수색병이 조견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몸집이나 터럭 색, 가죽을 봐선 최근 암자에서 승려를 잡아먹고 달아난 조마구가 틀림없는 듯하단 말에 경악한 그가 말했다.

“설마…… 도백께서 그 조마구를 혼자서 잡으신 겁니까?”

“혼자는, 아니었네.”

태백훈이 뒤를 눈짓하며 말했다. 훤칠한 몸이 옆으로 비켜서니 비로소 누에고치처럼 철릭과 모포에 감긴 남자가 보였다.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곱상한 얼굴 하며 모로 봐도 훈련받은 병사는 아닌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조견은 이번 봄 사냥에 대해 들었던 말을 되짚었다. 저자가 아마도 이번 사냥에 따라오게 되었다던 새신부인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철릭에 싸인 남자를 내려다본 태백훈이 입을 열었다.

“기절한 지 반나절은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의식이 없어.”

“부상자를 실을 만한 마차를 가져왔으니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영감께서도 상태가 말이 아니신 듯하니 좀 쉬셔야겠습니다.”

차분한 대응에 태백훈도 군말 없이 조견의 부축과 함께 걸음을 움직였다.

덜컹덜컹 부드럽게 흔들리는 느낌에 유원은 서서히 눈을 떴다.

“으, 머리 아파.”

둔통에 머리가 깨질 듯한 나머지 눈가에 절로 눈물이 고였다. 흐리멍덩한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이자 어지럽게 번진 음영과 색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여기는, 어디지.

“마차, 같은데…….”

잠시만, 마차라고? 그제야 유원은 제 손부터 팔꿈치까지 둘둘 감긴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정식 의술을 배운 듯한 능숙한 처치였다. 누군가한테 구조를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고작 앉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창에 내려 둔 가림막이 걷혔다. 그 사이로 까마귀 한 마리가 빼꼼 고개를 들이밀더니 포르르 유원에게 날아와 품에 안겼다.

“탄아, 괜찮아?”

자연스레 까마귀를 안아 든 유원에게 탄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깍, 하고 작게 울었다.

“말 안장주머니가 흔들리길래 뭔가 했더니 그 녀석이 튀어나와 놀랐습니다. 기절한 척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부드러운 한편 염려가 퍽 묻어나는 목소리는 익숙했다. 가림막 사이로 갓을 쓴 인영이 비쳤다.

“그나저나 탄이 녀석이 왜 그리 우나 했더니, 아기씨 일어나신 걸 알아채서 그랬군요.”

이윽고 창문으로 보이는 얼굴에 유원은 놀라 앉은걸음으로 다가갔다. 손청준이었다.

“나리! 무사하셨습니까?”

“예, 보시다시피 무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요? 현욱 나리랑, 녹수 님은요?”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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