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선왕 때 편찬된 도감에선 조마구에 대해 이런 구절이 기록되어 있었다.
목천의 한 민가에 들쥐만 한 크기의 흉측한 괴물이 나타나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망가트릴 뿐만 아니라 노소를 막론하고 잡아먹는데, 밟으면 밟을수록 도리어 덩치는 커질 뿐이니 오로지 불로 태워 죽이는 방법뿐이다.
태백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눈앞의 조마구를 노려봤다. 눈대중으로 잡아도 대략 구 척에 가까운 거구는 닥치는 대로 짐승과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방증이었다. 잘린 팔목과 칼에 찢긴 상처 부위는 눈 깜짝할 사이에 굳은 촛농처럼 단단하게 아물었다. 가히 징그럽단 표현에 걸맞은 재생력이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의 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아물어 가던 상처가 벌어지며 재발한 격통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식인으로 힘을 기른 조마구는 최상의 상태일 때도 사냥하기 까다로운 편에 속하는 요수였다. 당장은 어떻게든 받아칠 수 있다 하더라도 시간을 끌수록 불리했다. 이미 조마구 또한 태백훈의 상태를 파악하고 배짱을 부리고 있지 않은가.
“후우….”
축 늘어트린 왼쪽 팔을 반대 손으로 움켜쥔 그가 숨을 골랐다. 지금으로선 난공불락(難攻不落)이니 훗날을 도모하고 이탈해야만 했다. 그러나 뒤쪽으로 달아나면 벼랑이었고 퇴로조차 조마구가 가로막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빈틈을 봐서 옆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우지끈, 뿌리 뽑히는 소리와 함께 조마구 손에 들린 나무가 통째로 날아들었다. 망할. 욕지거리와 함께 쓰러져 있는 홍유원을 다급히 한 팔로 붙잡아 챈 태백훈이 옆으로 빠르게 굴렀다.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나무에 군마가 놀라 펄쩍거렸다.
콜록, 콜록, 터져 나오는 잔기침 소리에 태백훈은 제 옆에 누워 있던 그를 곁눈질로 살폈다. 다행히 의식을 차렸는지 홍유원이 두 팔로 바닥을 짚고 몸을 가누고 있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태백훈은 기꺼이 그의 팔을 잡아 일어설 수 있도록 힘껏 당겼다. 충혈된 눈자위 가운데 녹색 눈동자가 서서히 선명해졌다. 빛무리가 번진 동공에 태백훈의 창백한 얼굴이 비쳤다.
“아…….”
놀람과 불안이 뒤섞인 탄식도 잠시, 조마구가 발을 구르며 두 사람을 향해 커다란 몸을 내던지듯이 뛰어들었다. 피할 새도 없이 태백훈은 칼을 힘껏 휘둘렀다.
부러진 칼날에서 하얗게 일어난 섬광은 곧 돌풍이 되어 달려드는 조마구를 밀어냈다. 쾅! 강풍에 떠밀린 요수가 뒤쪽 나무들에 이리저리 부딪히자 흔들린 나뭇가지에 쌓여 있던 눈이 후드득 떨어지며 불탄 재처럼 휘날렸다.
절호의 기회였다.
“말을 타고, 될 수 있는 한 여기서 멀리서 벗어나세요.”
“그럼, 영감은 어, 어쩌시려고요.”
“빨리 가라고 했잖아!”
손에 쥔 칼자루를 바짝 움켜쥔 태백훈이 살벌한 목소리로 크게 명령했다. 화가 잔뜩 난 얼굴은 무시무시하다 못해 거스를 수 없는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경황없이 엉거주춤 서 있던 유원은 뒤로 주춤거리다 이내 그가 시키는 대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온몸이 으스러진 것처럼 후들거렸다.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유원은 눈 위에 웅크리고 있던 탄이를 챙기고, 겁에 질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군마를 찾았다.
유원이 안장에 올라타기 무섭게 말은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휙, 휙, 호젓한 숲속을 가로지르는 동안 차가운 눈과 바람이 뺨을 마구 때렸다. 질끈 감았다 뜬 눈은 어질어질 흔들리고 목은 여전히 뭔가에 눌린 것처럼 답답하고 욱신거렸다.
정말 이대로 달아나는 게 맞는 걸까.
자꾸만 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가지고 있던 칼은 날이 부러졌으니 제대로 상대하기도 버거울 터였다. 그 사실을 무인인 태백훈이 인지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여차하면 죽을 각오로 남은 것이다.
싫어.
생각만으로도 괴로운 나머지 눈앞이 시큰거렸다. 그를 비참하게 죽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고작 저 하나 살리겠다고 태백훈이 죽는다니. 하지만 돌아간다 해서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저는 무술이 출중하지도, 도술을 부릴 줄도 몰라 이도 저도 쓸모없는 꼴에 거치적거리기만 할 터였다.
그래도 지금 여기엔 저 아니면 태백훈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혼자서 산을 내려가 다른 사람을 찾는다는 건 그를 죽게 내버려 두겠단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돌아가야만 해.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
겁에 질려 뛰는 말의 고삐를 간신히 붙잡은 유원이 힘껏 잡아당기자 말이 달리는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쉬, 쉬, 착하지.”
유원은 말의 고개를 뒤에서부터 끌어안고 능숙하게 말을 달래며 진정시켰다. 부드러운 손길에 거친 콧김을 내뿜던 말이 서서히 얌전해졌다. 크게 심호흡한 유원이 말의 귀에 작게 속닥거렸다.
“무섭지? 나도 알아. 무섭고, 두려워.”
급박하게 뛰느라 힘차게 맥박 치는 말의 심장 소리가 유원한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런데 그분한테 빨리 안 가면…… 돌이키지 못할 일이 생길 거야. 널 힘들게 하고 싶진 않지만 나한테는 빨리 달리는 재주가 없어.”
그러니 조금만 더, 도와줘.
간절한 목소리를 알아들은 걸까. 귀를 쫑긋거리던 말이 이내 우렁차게 울며 앞발로 콱콱 바닥을 내리찍고 꼬리를 휙휙 털었다. 마치 유원이 원하는 곳으로 달려가겠다는 듯 늠름한 몸짓이었다.
이윽고 검은 말이 몸을 돌려 왔던 길을 힘차게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도주할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임에도 마치 상공을 나는 것처럼 가뿐한 발놀림이었다.
유원은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 몸을 납작 숙여 기댄 채 대책을 궁리했다.
지금의 무력으로는 조마구를 제압하기란 역부족이었다. 설령 창과 검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태백훈에게 칼을 쥐여 주고 싸우게 할 때가 아니라 도주로를 만들고 같이 피신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 커다란 요수로부터 주의를 돌릴 만한 무언가가 없을까. 네발짐승보다는 달리기가 느리다곤 해도 유원도 지쳐 있어 쉽게 따돌리긴 힘들었다. 게다가 이미 한 번 해 본 짓이니 조마구도 쉽게 걸려들진 않을 터였다.
역시 소리나 불빛으로 위협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겠지. 대부분의 요수는 특히 불을 무서워하니 구석에 몰아넣고 큰불로 겁을 주면 꼼짝도 못 할 터였다.
아까 횃불만 꺼지지 않았어도 충분했을 텐데. 침울함도 잠시, 말 안장주머니에 따로 챙겨 뒀던 물건들이 떠올랐다.
유원은 서둘러 말의 옆구리에 걸어 둔 안장주머니를 뒤적였다. 위급 시에 필요하리라 여긴 도구들은 대부분 안장에 챙겨 뒀었다. 돌돌 말린 붕대용 헝겊이라든지, 장도칼이라든지.
그리고 한 주먹의 종이 뭉치.
동굴에서 불을 피울 때 쓰고 남은 부싯돌 대용 부적이었다. 고작 한 주먹 정도로는 모닥불이나 피울 정도로 약한 불씨가 생기겠지만 만약 이 근처를 에워쌀 만큼 불길이 커질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불을 크게 일으켜야만 한다.
때마침 말이 멈춰 섰다. 저 멀리 안개와 눈보라 사이로 조마구의 육중한 인영이 드러났다. 끽, 끽, 쇠붙이로 철판을 긁어 대는 듯한 섬뜩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치자 종이 뭉치를 쥔 손이 벌벌 떨렸다.
만약 이조차도 실패하면 그때는 정말로 끝장이다. 세찬 눈보라에 덮인 불이 꺼져 버린다거나, 마른 검불이 제대로 타지 않아 타다 만 재가 되거나. 운이 나쁘면 저조차도 불길에 갇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에서 내린 유원은 보이는 대로 검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잔가지와 낙엽, 바싹 마른 덤불, 심지어 모포까지 갈기갈기 찢어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차곡차곡 쌓았다.
허리보다 높게 쌓인 땔거리 더미를 내려다본 유원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산짐승들의 터전에 일부러 불을 피우려니 좀처럼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쯤이라면 불길이 일더라도 저 뒤쪽 숲으로는 번지지 않을 듯했다.
조마구가 도망가지 못하게만 하면 돼.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더미에 쑤셔 넣은 뒤 눈을 한 움큼 집어 들어 두 손으로 힘껏 문질렀다.
차가운 눈이 손바닥 온기에 차츰 녹아내린다. 손이 아플 정도로 한참 비빈 끝에 유원은 축축하게 물이 밴 눈덩이를 부적 뭉치 위로 떨어트렸다.
바람 사이로 실낱같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 * *
휘청거리는 몸의 중심을 간신히 지탱한 태백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출혈 때문인지, 아니면 날아드는 돌과 나무를 피하느라 이리저리 구른 탓인지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들었다.
“뭐 하는 것이냐, 칼잡이, 좀 더, 빠르게 움직여. 시시하다! 시시, 하구나!”
조마구는 대롱 같은 혀를 날름거리며 태백훈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같잖은 도발에 칼자루를 쥔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상만 아니었어도 검기로 가죽을 찢어발기고 뼈를 산산이 도륙 내고도 남았으리라. 그러나 고갈된 기력으로는 검기조차 미약한 수준이었다.
아마 이대로 가면, 죽을지도 모르겠군. 절명(絶命)을 목전에 뒀음에도 그는 별반 두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칼을 잡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죽음은 그의 또 다른 벗이었다.
이 죽음으로 인해 전하께서 바라던 바가 어그러지진 않는가. 군자께서 충견 하나 죽었다 하여 어심(御心) 흐트러질 리는 없겠지.
다만 어린 누이가 조금 슬퍼하겠구나.
전장에 나갈 때마다 매번 가지 말라며 울던 어린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형제의 죽음을 겪은 그녀를 두고 욕하는 입은 조금이나마 줄겠지.
그러면 되었다. 누이를 지키려고 받아들인 자리였을 뿐이니 목적은 이룬 셈이었다.
문득 홍유원의 얼굴이 스쳤다. 그대 역시 슬퍼하려나. 저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무 감정도 내어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도 왜 그리 아둔하게도 정이 깊은지, 왜 그렇게 갸륵한 얼굴이었는지.
제정신이 아니긴 한가 보구나. 이런 와중에 누구를 떠올린단 말인가. 탄식 섞인 웃음이 마른 입술에 스쳤다.
“죽어! 죽으라고!”
갈고랑쇠 같은 손톱을 피하려던 몸이 끝내 비틀거렸다. 상투가 풀리며 길게 늘어진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곧, 죽는다! 죽게 된다!”
조마구가 파안대소하며 덩실덩실 두 발을 굴렸다. 태백훈이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참으로 끔찍한 춤사위로군.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낼 것이지.”
“혀부터 잘라 먹는다, 잘라 먹는다!”
빌어먹을. 악다문 잇새로 탁한 숨이 흩어졌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은 물론이고 손등마저 더 이상 흘릴 피도 없는 듯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때였다. 들이쉰 숨 끝에 뭔가 매캐한 느낌이 걸렸다. 마치 불에 그을린 목재나 건초에서나 날 법한 탄내였다.
“뭐지?”
고개를 위로 젖힌 조마구가 코를 벌름거렸다. 짙은 안개가 섞이며 흩날리는 부스러기 눈 가운데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기만이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랗게 피어난 불이 보였다. 심지어 바람 때문에 조마구가 있는 곳을 향해 불길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불, 불이다! 불이야!”
당황한 조마구가 빠르게 번지는 불을 보고 펄쩍거렸다. 놀랍기는 태백훈도 마찬가지였다. 인적도 없는 곳에서 단순히 우연하게 일어난 산불이라기엔 뭔가 미심쩍지 않은가.
자욱한 안개 사이, 멀리서부터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울렸다. 희뿌연 시야 앞으로 말 한 마리가 우뚝 멈췄다.
“영감, 어서요!”
재와 그을음에 갈까마귀처럼 엉망이 된 유원이 태백훈을 향해 제 손을 내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