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승리를 거머쥔 듯 잔혹한 황홀감에 도취한 두 눈이 피로 축축해진 어깨에 닿았다. 조마구는 혀를 세워 어깨에 난 상처를 핥았다.
“으윽, 아, 그만…….”
하지 말라며 발버둥 치는 몸을 두 손으로 터트릴 듯이 꽉 누른 조마구가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마음껏 핥고 또 핥았다. 갈증마저 가시게 하는 달고 감미로운 맛에 조마구가 부리를 요란스럽게 털었다.
“너를, 어떻게, 먹어 줄까?”
들기름을 발라 화덕에 구워 먹을까? 아니면 솥에 넣고 찐 다음에 남김없이 발라 먹을까?
아니, 전부 틀렸다. 날것 그대로 신선한 가죽과 살을 음미하며 발부터 머리까지 아작아작 뜯어 먹어야 보람 있을 듯했다.
기왕이면 그 칼잡이 앞에서 산 채로 먹는 것도 좋아 보였다. 골짜기로 굴러떨어진 내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 있을 정도면 필시 돈독한 사이가 아니겠는가.
칼잡이는 일족을 모조리 죽인 철천지원수였다. 그 앞에서 어린것을 잡아먹으면 피눈물을 줄줄 흘릴 테고, 결국 애가 끊어지며 죽어 버릴 터였다. 이만한 복수가 어디 있겠는가.
기대감에 부푼 조마구가 홀로 시시덕거리며 방심한 사이, 몸부림을 치던 유원이 급기야 조마구의 팔목을 힘껏 깨물었다.
“끄악!”
만만하게 보던 사냥감에게 물린 조마구가 소리를 지르며 소금 맞은 지렁이처럼 펄떡펄떡 제자리에서 뛰었다. 비로소 스르륵 힘 빠진 손아귀에서 떨어져 나온 유원이 눈을 헤집으며 엉금엉금 기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발목이 조마구 손에 붙들리며 몸이 끌려갔다.
“네, 이놈.”
검은자위에 핏발이 붉게 도드라진 눈이 유원을 매섭게 쏘아봤다. 정강이로 배를 걷어찼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저리 가! 가라고!”
부글부글 끓어오른 화를 참지 못한 조마구가 깽깽거리는 하룻강아지처럼 발버둥 치는 유원을 향해 발길질했다.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쌓인 눈 더미 위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감히! 감히!”
조마구는 사정없이 유원을 걷어찼다. 쿨럭, 기침과 함께 입가에서 옅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한쪽 귀에서만 삐이, 이명이 울렸다. 눈앞은 흐려지다 못해 어둡고 밝기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새 발처럼 구부러진 조마구의 손에 힘이 점점 실리며 이내 숨통이 조여들었다.
“끄흑…….”
숨이 막힌 유원이 꺽꺽 신음하며 두 손으로 조마구의 손등을 마구 할퀴고 긁었다. 그럴수록 목을 조르는 힘은 더욱 거세지기만 할 뿐이었다.
죽어, 죽어! 입 모양이 벙긋거리며 악독한 말을 내뱉는다. 마치 유원이 고통스러워하는 꼴을 두고두고 봐야 성미가 차기라도 하겠다는 듯 잔악한 기세였다.
오장육부를 후벼 파는 듯하던 고통이 극치에 다다르자 저릿저릿한 격통 대신 몽롱한 기운이 서서히 올라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몸에선 더는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아.
일단은 그 사람이 안전하니까.
이 정도로 시간을 오래 끌었다면, 그도 상황을 파악하고 이미 자리를 벗어났으리라. 산 아래턱으로 내려갔겠지. 굳이 길잡이가 없더라도 태백훈 또한 길눈이 있는 듯했으니 그다음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흉포한 요수를 상대로 맨몸으로 도발할 때부터 각오했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둘 다 죽을 바에는 한 사람이라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게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라서 다행이었다.
어머니가 슬퍼하시겠지. 아니, 아버지라면 죽었다는 부고조차 알려 주지 않을지도 모르니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라.
“왜, 왜 웃어! 왜 웃냐고!”
창백한 얼굴에 걸린 옅은 미소에 노발대발한 조마구가 유원을 쥐어 터트릴 듯이 마구 흔들었다.
새파란 어둠과 해가 뒤섞인 새벽녘으로 바람이 소슬하게 불면서 나뭇잎을 흔들어 댔다. 다각, 다각, 말의 발굽이 지면을 두드리는 소리에 조마구가 휙 몸을 돌렸다.
다가오는 상대를 파악할 겨를도 없었다. 탁, 도약한 몸이 조마구를 향해 칼을 직각으로 내리쳤다. 동시에 조마구의 오른 손목이 뎅겅 잘려 나가고 피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끄아악! 찢어지는 비명이 눈보라 사이로 울러 펴졌다. 깨끗하게 잘려 뭉툭해진 손목을 붙잡은 조마구는 제 몸뚱이를 이리저리 나무에 들이박으며 요란을 피웠다.
가까스로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유원은 너덜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눈물로 범벅이 된 눈꺼풀이 천천히 깜빡일 때마다 풀렸던 초점이 차츰 선명해졌다.
세 발걸음, 아니 그보다 좀 더 가깝다. 손을 뻗으면 닿을 자리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칼날 끝에 고인 피가 뚝뚝 흘러내리며 눈 위에 꽃잎 같은 무늬를 새겼다. 밑단이 헤진 가죽 장화, 피와 흙먼지로 너저분해진 소복 아랫단.
좀 더 위로 시선을 들어 올리자 훤칠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에 걸친 검은 두루마기 자락이 바람에 휘장처럼 펄럭거릴 때마다 은실로 수놓인 흉배가 번뜩였다.
임금이 그의 공적을 칭양하며 하사했다는 가문의 상징. 동백, 그리고 북방의 흰 범.
“영감, 어, 어떻게…….”
목이 아파서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유원을 방비하듯 완전히 앞을 가로막았다.
“칼잡이가, 내, 손을, 내 손을 잘랐어!”
울분에 찬 조마구가 목이 부러진 새처럼 꽥꽥 소리를 질렀다. 조마구는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를 우두둑 꺾어 되는대로 태백훈을 향해 던졌다. 재빨리 들고 있던 칼로 나무를 튕겨 낸 태백훈이 비틀거리며 무릎을 굽혔다. 왼팔과 옆구리에 난 부상 때문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만류하고 싶어도 목구멍이 부어올라 좀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소리를 쥐어 짜내도 말 못 하는 천치처럼 악, 악, 쇳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아, 피 냄새가, 진동한다.”
조마구가 코를 벌름거리더니 끽끽 웃었다. 난폭한 흥분에 들뜬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장되며 눈앞의 사냥감에 초점을 맞췄다. 척 보기에도 위태로운 꼴이었다. 갑주도 입지 않은 데다 왼쪽 옆구리에선 고름과 피가 뒤섞인 냄새가 풍겼고 움직임이 투박했다.
저 꼴로 감히 제 앞을 가로막다니. 아픔에 머리마저 이상해진 것인가.
조마구로선 제 발로 입까지 찾아 들어온 먹잇감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기력이 쇠할 때까지 가지고 놀다가 손톱부터 아작아작 씹어 먹으리라. 뼈는 남겨 뒀다가 그 이름 모를 도사한테 넘겨줘도 좋겠지. 이번 일에 협조해 준 보답을 주면 마을 하나를 통째로 먹게 해 줄지도 몰라. 난 정말 머리가 좋아!
신이 난 나머지 어깨춤이 절로 으쓱 나왔다.
“뭐가 그리 좋아서 웃지?”
한 차례 숨을 내쉰 태백훈이 우습다는 듯이 물었다. 육중한 몸으로 덩실거리던 조마구가 화색을 띠며 대답했다.
“당연히! 네 놈을 잡아먹을 생각에, 기쁘니까.”
“나를? 내가 언제 내 몸을 내어 주겠다고 했나?”
“멍청한! 멍청한 놈, 그 꼴로 내 앞까지 기어와 놓고도, 멀쩡한 척을 다 하는구나. 하지만 나는, 다 알아, 다 알지. 네 뼈는 부러지고, 살은 짓물러 피를 철철 쏟고 있잖나!”
큰 소리로 비웃은 조마구가 날렵하게 태백훈에게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그가 더운 숨을 내뱉으며 후들거리는 몸을 나무에 기댔다.
문득 그의 눈이 쓰러져 있는 유원에게로 향했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피, 쿨럭거리는 기침 소리.
만일 한시라도 늦었다면 손쓸 새도 없이 절명했을 터였다. 지금도 이미 송장 같은 몰골이라 자칫 한눈팔았다간 깃털 같은 미약한 숨소리마저 완전히 사라질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악다문 이를 빠드득 갈았다.
혼자서 요수를 상대하려 하다니. 대범하다 못해 무모한 짓거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타박할 때가 아니었다.
노여움을 애써 갈무리한 태백훈은 조마구를 향해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로 다 안다고?”
“그럼, 나는 다, 알……!”
방금까지 저 아래에 힘겹게 서 있던 몸이 어느새 조마구의 눈앞까지 들이닥쳤다. 태백훈은 부러진 칼을 망치처럼 잡고 그대로 요수의 눈에 찍어 눌렀다.
우레 같은 괴성이 안개를 타고 메아리쳤다. 튀어 오른 피에 얼굴과 옷이 전부 젖은 태백훈이 칼을 든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찢어진 망건 사이로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흐늘거렸다.
“다 안다면서 어찌 막지 못했는가?”
“이 망할, 칼잡이!”
살벌한 비아냥거림에 칼에 찢긴 눈을 찌푸린 조마구가 흘러내리는 제 핏물을 혀로 핥았다. 역하고 떫었다. 불타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보다도 환멸에 가까운 증오로 털 하나하나가 곤두섰다.
칼잡이를 잔인하게 찢어발겨 육포로 만들어야만 속이 시원하리라.
하지만 저런 꼴로도 당장은 신묘한 몸놀림을 보이니 제풀에 지치기 전까지는 대놓고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칼잡이의 허점을 찾아 들쑤셔야 했다.
어디가 좋을까? 피 냄새가 스멀스멀 풍기는 옆구리? 아니면 부자유스러운 왼팔?
아니, 전부 틀렸다. 그보다도 뒤에, 마치 충실한 개처럼 지키고 있는 저것.
굳이 도망가지도 않고 상대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저 어린놈 때문이다. 저 약한 것 하나를 지키겠다며 버티고 서 있는 꼴이었다.
끼긱, 끽, 고통과 희열이 섞인 웃음을 터트린 조마구가 쿵쿵 발을 울렸다.
“좋아, 계속 놀아 보자꾸나.”
조마구가 고개를 좌우로 크게 비틀었다. 몸이 더욱 크게 부풀어 오르면서 살가죽은 단단한 바위처럼 굳어졌다.
“실컷! 때려 보거라. 네가 지칠 때까지 때려도 소용없을 거다. 그 전에 네 오른팔부터 부러지고, 네 다리도 몽땅 부러질 것이다!”
“그래?”
으름장에도 태백훈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의연했다.
“이걸 어쩌나. 내 팔다리가 부러져도 네까짓 하수 정도야 상대하기란 일도 아니거든.”
칼을 움켜쥔 그가 빙긋 웃으며 손을 까딱거렸다.
“그러니 어디 한번 제대로 분발해 보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