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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56)화 (56/60)

56화

그간 태백훈이 혈혈단신으로 요수 마흔 마리를 잡아 죽였든, 천 명의 적군을 베었든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는 깊은 부상을 입었고 그 때문에 거동 한 번도 쉬이 하기 어려운 몸이었다.

저 조마구는 얼핏 보기에도 구 척(九尺)은 족히 넘는 거구였다. 제아무리 대단한 무사라 해도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거대한 요수를 상대했다간 꼼짝없이 죽을 터였다.

설령 조마구를 죽인다고 해도 상처가 손도 못 쓰게 벌어지거나, 더 큰 상처를 입어 출혈이라도 생긴다면 그때는 유원이 치료하는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적어도 저 동굴에 조마구가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저 조마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조마구를 죽일 방도 같은 건 없지만 하다못해 그가 말을 타고 달아날 정도의 시간을 만들어야만 했다.

시선을 끌려면 뭔가 던지거나, 소리를 질러야만 해. 이를테면 나뭇가지, 돌. 정신없이 바닥을 더듬거리자 마침 돌멩이 하나가 잡혔다. 앞뒤 생각 없이 일어난 유원은 그대로 돌을 힘껏 조마구가 있는 방향으로 던졌다.

탁, 돌이 뒤통수에 명중했다.

“우하?”

돌이 날아든 쪽으로 돌아본 조마구가 눈알을 위아래로 희번덕거리더니 곧 덤불 사이에 서 있는 유원을 발견했다.

주먹을 꼭 쥔 유원이 재차 돌을 집어 조마구에게 던졌다. 꼭 도발하는 듯한 행동에 조마구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살펴봤다.

지난 며칠 동안 동굴을 몇 차례 탐색하는 내내 봤던 익숙한 얼굴이었다. 동굴에 숨어 있는 사람은 모두 둘로 그중 한 놈이었다.

하지만 조마구가 여태 벼르고 있던 사냥감은 어린 쪽이 아니라 저기, 동굴 안에 든 큰 놈이었다.

그러께에 동지를 죄다 잡아들인 칼잡이는 마치 사람을 잡아먹은 업보에 대한 본보기를 보여 주기라도 하듯 조마구들의 살가죽을 벗겨 여기저기 마을과 성문에 걸어 뒀다. 옆집, 앞집 피붙이 모두 칼잡이 손에 죽어 껍데기만 남은 뒤로 혼자 남은 조마구는 깊은 산속에서 은둔하며 복수할 날만을 기다렸다.

그리도 학수고대하던 칼잡이가 어느 날 피떡이 되어 골짜기 사이로 떨어졌으니 재수가 좋았다.

칼잡이는 기가 억세다. 하지만 그렇기에 필시 육질이 쫀득하고 씹는 맛이 있을 터였다. 단단한 육체에서 흘러넘치는 피 냄새만 보더라도 일개 상인이나 사냥꾼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싱싱했다. 육질만 좋겠는가. 체구도 훤칠하고 큼직하니 잡탕처럼 끓여 낸 고깃국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찬이 되리라.

하여 부상 입은 칼잡이를 찾아다녔는데 안개 때문에 피 냄새가 흐려져 결국 자취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다, 먹을 거야. 남김없이, 다.”

바야흐로 절호의 기회였다. 칼잡이를 죽여 고기는 먹고, 내장은 추려 제물로 바치고, 뼈는 땅에 심어 풀을 키울 작정이었다.

그런데 저 어린놈이 무서운 줄 모르고 도발을 해 대니, 굳이 무시하고 넘길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동굴 안에 있는 칼잡이는 움직임이 둔해졌으니 당장 저 야들야들한 먹잇감부터 잡아도 문제없으리라.

게다가 저 눈처럼 살이 흰 어린놈한테선 사람에게서 나는 누린내 하나 없이 정말로 향긋하고 달큼한 살냄새가 났다. 이를테면 승려나 무녀 같은 깨끗한 영물한테서나 풍길 법한 향미였다.

아니, 그보다도 더 맛있을 거야. 승려는 먹어 봤었으니 그와 비슷하거나 훨씬 더 좋을까. 아마 칼잡이와 달리 살가죽마저도 말랑말랑할 테고, 독특한 색을 띤 눈알은 사탕 같은 맛이 나리라. 생각만 해도 꼴깍, 군침이 넘어갔다.

“겁이, 없다, 겁이, 없는, 저 맛있는 놈부터 잡아먹어야지.”

헤죽, 부리를 벌리고 캑캑 울음소리를 낸 조마구가 창을 들고 힘차게 뛰어오기 시작했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며 드러나는 조마구의 모습에 유원은 옆에 서 있던 말의 궁둥이를 힘껏 때렸다.

“빨리 도망가!”

놀란 말이 동굴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확인한 유원이 반대편으로 냅다 뛰었다. 달리기는 어느 정도 자신 있었다. 거기다 네발짐승도 아니고 두 발로 둥실거리듯 뛰는 요수 정도는 충분히 제칠 만했다.

새벽빛으로 어두컴컴한 가운데 그는 숲속을 한참 동안 달렸다. 방향은 따지지 않고 무작정 반대로만 뛰고 또 뛰었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목구멍은 시큰거리며 피를 삼킨 듯한 비린 맛이 났지만 견딜 만했다.

여기서 잠시라도 멈추면 등 뒤에서 쫓아오는 요수한테 그대로 붙들릴 터였다. 간혹 조마구가 따라잡을 듯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질 때면 그는 들고 있던 자그만 횃불을 휘둘렀다. 사나운 북도 요수에게 그나마 통하는 위협이었다.

“이놈, 얌전히 있으라고!”

불에 닿을까 펄쩍거리던 조마구가 잔뜩 약이 올랐는지 형형한 눈알을 뒤룩거렸다. 유원은 지지 않고 조마구에게 횃불을 더욱 크게 들이밀었다. 연기를 몽땅 들이마신 조마구가 캑캑, 노쇠한 늙은이처럼 기침했다.

그사이에 유원은 멀찌감치 거리를 벌렸다. 조마구도 보이지 않고 어느새 눈에 익은 숲길은 지나고 처음 보는 바위와 나무들뿐이었다. 이쯤이면 태백훈도 말에 기대 어디론가 피신했을까. 적어도 동굴에서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외곽까지 왔으니 저 조마구가 다시 동굴을 찾아 돌아가기란 쉽지 않을 듯했다.

“하아, 하아.”

잠시 달리기를 멈춘 유원이 턱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뒤를 돌아보자 무시무시하게 쫓아오던 조마구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사히 따돌린 모양이었다.

다행히 요수는 지능에 비해 빠른 편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러면 적당히 틈을 봐서 태백훈을 찾아 나설 수 있을 터였다. 아직 왼쪽 팔꿈치가 부러진 상태니 스스로 말을 타긴 어려웠을 테고, 말에게 기대서 산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있지 않을까. 그도 아니면 동굴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뭐가 되었든 이제 그는 안전할 거야.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몸을 일으킨 찰나였다.

휘이익, 피리를 부는 듯한 같은 아스라하고 음산한 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그러더니 삽시간에 숲속으로 눈보라가 몰아쳤다. 얇은 칼날 같은 한기가 전신을 채찍질하는 듯해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곱아든 손과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얼른, 얼른 돌아가야 해.

그새 발목 위까지 차오른 눈을 딛고 한 걸음씩 내디뎠다. 눈보라는 그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사납게 유원을 몰아붙였다. 턱이 덜덜 떨리고 싸늘하게 식은 발은 둔해져 걸음 하나 떼기도 쉽지 않았다.

굵어진 눈발로 사위가 흐린 가운데 문득 저 앞에 새카만 인영이 꾸물거렸다. 어질어질한 눈을 깜빡, 감았다 뜨자 어느덧 인영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키킥, 키킥킥. 쩍 벌어진 부리 사이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검붉은 눈알 가운데 동공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찾, 았다.”

여태 저를 추격하던 조마구임을 알아본 유원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분명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 눈 사이를 뚫고 찾아낸 거지.

“저, 저리 가! 안 그러면 불로 지져 버릴 거야!”

들고 있던 횃불을 필사적으로 휘두르며 다급히 몸을 돌린 유원이 무작정 아무 방향으로 달음박질했다. 그러나 움직임을 틀어막는 듯한 바람과 쌓인 눈 때문에 아까처럼 달리기가 쉽지 않았다.

쉼 없이 도망치고 또 도망치느라 점차 달리는 움직임이 둔해지는 유원과 다르게 조마구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렵하게 눈을 파헤치며 펄쩍펄쩍 뛰어왔다.

“이리, 와, 이리 와.”

꾀꼬리 같은 울음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며 이내 키킥, 끽. 목구멍이 찢어진 것처럼 기괴한 웃음소리가 나무 사이로 메아리쳤다. 이윽고 조마구가 손에 쥔 창을 높이 들어 도망치는 등을 향해 던졌다.

“아악……!”

어깨에 빗맞은 것과 동시에 다리 힘이 풀린 유원이 그대로 넘어졌다. 저 멀리 날아간 홰는 눈 더미에 파묻혀 불씨마저 사그라진 뒤였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유원은 욱신거리는 오른쪽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하얀 눈 위로 후두두 쏟아졌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그 일념 하나만으로 앞만 보고 죽을힘을 다해 뛰어야만 하는데, 뻣뻣해진 몸은 아무리 힘을 줘도 물에 젖은 종이처럼 늘어질 뿐이었다.

앞으로 넘어진 유원의 등 위로 기다란 그늘이 드리웠다. 킁킁, 냄새를 맡은 조마구가 눈덩이를 움켜쥐고는 맺힌 핏물을 날름 핥았다.

“좋아, 좋아!”

마치 삼을 먹기라도 한 듯 활기차게 감탄을 터트린 조마구가 눈을 번뜩였다. 제 발로 굴러떨어진 먹잇감이다. 포식할 생각에 흥겨워진 조마구가 갈고랑쇠 같은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허공에서 자그만 것이 휙 날아오더니 그대로 조마구의 뺨을 갈겼다. 기습에 당황한 조마구가 휘청거리자 검은 그림자는 또 한 번 빠르게 조마구를 공격했다.

까악, 깍, 어린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혹시 손청준이 보낸 까마귀들일까? 아니, 아니다. 겁도 없이 날아드는 새의 날갯짓은 눈에 퍽 익숙했다. 날개가 한 번 부러졌던 탓에 유독 한쪽 날개만 부자연스럽게 펼치는 까마귀는 한 마리밖에 없었다.

탄이다.

무사히 살아 있었다는 안도와 반가움도 잠시, 쇠뇌처럼 조마구를 마구잡이로 공격하던 탄이를 날파리 쫓듯 손을 이리저리 흔들던 조마구가 발끈했다.

“이 지독한 검은 새!”

몽둥이 같은 팔을 그대로 휘두르자 직격으로 얻어맞은 탄이가 풀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깍, 깍, 눈 더미 사이로 자그만 몸이 파들파들 떨었다.

“하지 마!”

그대로 발을 든 조마구가 탄이를 짓밟기 전에 유원은 제 어깨를 맞췄던 창을 들고 조마구의 옆구리를 향해 있는 힘껏 찔렀다.

꺼헉! 트림인지 신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괴상한 비명이 울렸다. 반동에 밀려난 유원이 허둥지둥 탄이가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축 늘어진 탄이는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어미를 찾기라도 하듯 가냘프게 헐떡이는 숨소리에 울컥 터진 울음을 삼킨 유원이 제 옷 안쪽에 까마귀를 품었다.

“으윽!”

머리를 잡아당기는 힘에 안고 있던 탄이를 그대로 놓쳐 버렸다.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며 발아래가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갈고랑이 같은 손으로 유원을 덥석 잡아 쥔 조마구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두 눈을 부리라며 부리를 쩍 벌렸다.

“이제, 다,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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