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깜빡,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타오르는 촛불에서 번진 빛이 눈꺼풀을 부드럽게 적시며 눈앞의 남자가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자꾸 생각이 난다니. 입맞춤이 못내 불쾌한 나머지 두고두고 되감기듯 떠오르기라도 한단 말인가. 입술을 위아래로 달싹인 유원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 때 당시 영감께서, 너무 괴로워 보이셔서, 앞뒤 겨를 없이 그런 짓을 했습니다. 부, 불쾌하고, 망측하다 꾸짖으시겠다면, 감히 달게 듣겠습니다.”
경거망동하다며 힐난하리라 여겼다. 그리 꾸짖으면 깊게 새기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자비를 구할 생각이었다.
“그렇겠지. 지금 내가 그대를 나무라야 두 번은 이러지 않으실 텐데.”
“송구, 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요? 말로는 내게 다시는 그러지 않는다면서, 정작 나를 곤란케 한 적이 한둘도 아니잖습니까.”
“영감.”
“그러면서 어찌 그 말을 믿으라 하십니까?”
반듯하던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가 유원에게 시선을 맞췄다.
“내 아직 여인과도 정을 나눠 본 적 없으며 하물며 입맞춤조차 경험이 없는데.”
“…….”
“첫 입맞춤마저 그대한테 이리 허망하게 빼앗길 줄은 몰랐습니다.”
다소 엄한 말투와 함께 태백훈이 눈썹을 좁히며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졸지에 죄인이 된 유원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했는데. 민망함과 부끄러움, 절박한 서운함이 뒤섞인 눈동자에 옅은 물기가 어룽졌다. 매정하게 눈을 치켜세우고 있던 태백훈이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해 봤습니다. 이리 쉽게 속으시니 더 골리기도 무안합니다.”
“그것이, 농담이라 하기엔 정말로 화가 난 얼굴이셔서요.”
“아무리 경우 없다 하여도, 이런 사소한 일로는 무엇 하러 화를 내겠습니까.”
사소한 일. 그 표현에 괜히 목구멍이 졸아붙는 듯 따끔거려 연신 침을 삼켰다. 아니, 두고두고 그에게 무안함을 살 바에야 수더분하게 넘기는 편이 낫겠지.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깊게 숨을 한번 고른 그가 유원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온후한 손길에 유원은 살그니 고개를 들었다. 나무 그늘처럼 어둑한 녹색 눈동자에 오롯하게 태백훈만이 맺혔다.
“불쾌하지만은 않아, 도무지 화를 낼 수가 없어.”
“…….”
앞머리를 슬슬 매만지던 손끝이 내려와 눈썹 옆을 가볍게 스쳤다. 도리어 나른함에 젖어 묘하게 음험했고, 얼핏 다정하게 보이기도 했다.
“응? 설마 나한테 무슨 술수를 부린 겁니까.”
“아, 아니에요. 술수 같은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말로?”
얼굴을 더욱 가까이 들이민 그가 되물었다. 인자하고 나긋하여 살살 달래는 듯도 싶은 부드러운 어투에 뺨이 달아올랐다.
“……약에, 비단, 삼이라는 약재가 양기를 촉진하여… 기분을 들뜨게, 한다고는 들, 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니까, 영감께선 불쾌하지 않으신 것도, 들뜨신 것도 전부, 약이 잘 들어서 그러신 거예요.”
습윤하고 뜨거운 날숨이 입술과 인중에 닿았다. 지극히 여상스러운 호흡일 뿐인데도 단전 밑이 찌르르 울렸다. 아니, 단전이라기보다는 허벅지 사이. 미지근한 숨기운이 스치는 것처럼 이상야릇한 간지럼. 손과 발끝이 옴쭉거린다. 심장이 북처럼 둥둥 울리며 귓속을 장악했다. 전율 같은 고동에 머릿속이 마구잡이로 뭉친 조각보처럼 헝클어졌다.
조금만 더, 살짝 몸을 숙이면 닿을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한 뼘.
그 순간 말이 푸르릉 콧김을 내뱉으며 앞발을 굴렸다. 저도 모르게 그에게 바짝 몸을 기대고 있던 유원이 뒤로 물러났다.
“시, 시장하실 텐데…… 진지 드실 만한 것 좀 준비, 해 오겠습니다.”
서둘러 멀찍한 구석으로 나온 유원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열이 올라 붉어진 뺨과 목덜미를 손으로 더듬었다.
* * *
미약하게 들썩거리는 소쿠리를 뒤집자 덫에 걸린 토끼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몸부림치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숨이 꺼져 가며 점점 총기가 사라지는 눈망울을 내려다보던 유원이 소쿠리를 덮어 버렸다. 살면서 개미 한 번 밟아 죽여 본 적도 없던 유원에게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어디인지도 모를 골짜기 사이 숲에 갇힌 지 일주일이었다. 언제 구조될지도 몰라 막막한 와중에 얼어붙은 숲에서 채집한 열매나 버섯 따위로 끼니를 이어 가기 쉽지 않았다. 당장 그의 보양과 안정을 위해서라도 불가결이었다.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문득 익숙한 꽃망울이 눈에 들어왔다. 꽃 생김새는 참나리와 비슷한데 줄기는 보이지 않고 이파리 밑 흙더미가 봉곳하게 솟아 있었다.
“어? 이건 살살이풀의 꽃 같은데……?”
연녹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산삼보다도 드물다는 영초가 하나도 아닌, 무려 세 다발이나 있었다. 도감에 그려져 있던 모습보단 이파리는 좁고 꽃만 탐스럽게 퍼져 있는 모습이 아직 완전히 숙성되진 않은 모양이었다.
좀 더 자란 녀석이었다면 곧장 태백훈한테 쓸 수 있었을 텐데, 못내 아쉬운 나머지 앞에 쪼그리고 앉은 유원이 이파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이 귀한 영초가 어째서 이런 곳에 자라 있는 걸까. 제아무리 현운산이 영초가 많이 나는 신령한 곳이라 해도 살살이풀은 두개골을 영양분 삼아 자라는 풀이었다. 즉, 지금 땅 밑에 못 해도 시신 세 구가 묻혀 있단 뜻이기도 했다.
이런 외진 골짜기 땅에 묻힌 사람이 셋이나 된다고……?
순간 소름이 돋은 유원이 뒷걸음질로 비켜섰다. 설마, 그저 우연이겠지. 산길을 지나다 눈보라에 휩쓸린 산지기나 사냥꾼들이나, 북쪽에서 넘어오던 상단이 좋지 못한 사고를 맞았을 수도 있었다.
동굴 앞에는 검은 말이 보초병처럼 우뚝 서서 주변의 마른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발소리에 고개를 든 말이 유원을 발견하곤 머리를 휙휙 흔들었다. 반가움을 듬뿍 담은 감정 표현이었다.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어?”
대답이라도 하듯 푸르릉, 콧김을 가볍게 내쉬는 말의 머리를 도닥인 유원이 동굴 안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해가 중천이니 태백훈 역시 일어나 있을 터였다. 봄 사냥을 떠난 이래로 매일 본 얼굴인데도 새삼스러운 긴장감에 몸속이 저릿저릿했다. 크게 심호흡하며 유원은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 안은 진눈깨비가 휘날리는 바깥과는 달리 모닥불과 솥 안의 끓는 물에서 올라온 온기로 훈훈했다. 밀랍이 거의 다 녹아 바닥에 들러붙다시피 한 초와 모닥불의 누르스름한 불빛 건너편에 인영이 보였다. 예상대로 태백훈은 진즉 일어나 정좌로 앉아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은 좀 멀리 나갔다 오신 모양입니다.”
가칠하게 쉰 목소리는 줄곧 진중하고 딱딱하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조금 권태롭게 들리기도 했다.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인 유원이 소쿠리에서 토끼를 꺼내 보였다.
“어제 영감께서 알려 주신 대로 길목에 열매를 뿌리고 덫을 놨더니 정말 토끼가 잡혔어요.”
“그래요?”
유원이 든 소쿠리 안을 슬쩍 확인한 태백훈이 웃음을 삼켰다. 토끼의 상태는 잡은 사냥감이라기보단 소중하게 데려온 애완동물 같았다. 말 하나 죽었다고 못내 속상해하던 사람이 오죽할까. 용케 덫을 놓고 토끼를 잡아 온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가죽은 벗겨 보셨습니까?”
“아. 아직 해 본 적 없긴 하지만…… 조금만 알려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해 볼게요.”
“칼 좀 이리 줘 보세요.”
불쑥 내민 오른손에 유원은 품에 넣어 뒀던 단검을 건넸다. 부상으로 불편한 왼팔 대신 두 발로 토끼를 꽉 잡아 누른 태백훈이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유원을 올려다봤다.
“눈, 감으세요.”
“예?”
“지난번에 말이 죽을 때도 못내 속상해하셨잖습니까.”
그러니 굳이 보지 말고 눈을 가리라는 소리였다. 생각지 못한 배려였지만 유원은 눈을 감는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보고 배울게요. 다음에는 제 손으로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백훈은 들고 있던 검으로 토끼의 멱을 땄다. 소쿠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새빨간 핏물에 유원은 얼어붙은 채로 입술도 벙긋하지 못했다.
“모름지기 죽일 때는 망설임이 없어야 하는 법입니다.”
턱에 튀어 오른 핏방울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등으로 닦아 낸 태백훈이 뒤이어 칼을 고쳐 잡고 능숙하게 토끼의 가죽을 벗겼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지 눈 깜짝할 사이에 내장과 뼈를 발라낸 살덩어리에선 원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상하기 전에 손질을 마무리하느라 막상 설명하는 걸 잊었네요.”
고개를 든 태백훈이 창백하게 질리다 못해 거의 울상이 된 유원을 보곤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도축이 우아하고 고상한 광경도 아니고, 한낱 짐승에게도 정이 깊은 유원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태백훈은 쓸모없는 잔여물을 모닥불 안에 휙 던져 버린 다음 손질한 살코기를 소쿠리에 담아 유원에게 도로 돌려줬다.
“가죽은 당장은 쓰지 못할 테니 볕에 잘 널어 두시고요.”
“예…….”
“혹여 속상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속상하지 않아요.”
고개를 가로저은 유원은 깔끔하게 손질된 고깃덩이를 펄펄 끓고 있던 솥에 집어넣었다. 금세 구수한 고깃국 냄새가 진동했다. 아무래도 고기만으로는 아쉬울 듯해 이것저것 캐 온 약용 풀과 버섯까지 더하니 나무랄 데 없는 보양식이었다.
큼직한 건더기는 전부 태백훈의 몫으로 덜고서 남은 찌끼는 제 그릇에 담았다. 딱 보기에도 불균등하게 나눈 양에 태백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못마땅하다 타박하려는 듯한 눈빛에 유원이 서둘러 변명을 덧붙였다.
“저는, 아까 삶아 둔 토란도 먹었고 열매도 이것저것 먹어 둬서 배가 별로 안 고픕니다.”
“그런 걸로 끼니가 채워집니까?”
“그럭저럭요. 그리고 지금 저보다는 영감 몸부터 챙기셔야죠. 이렇게 계속… 앉아만 계시기도 불편하시잖아요. 잘 드셔야 상처가 빨리 아물고, 그래야 편히 돌아다니시지요.”
달리 틀린 말은 아닌지라 결국 태백훈도 마지못해 수긍하는 눈치였다. 무릎을 꿇고 곁에 가까이 앉은 유원은 고깃국에 든 살코기를 먹기 좋게 잘라 그에게 한 큰술씩 내밀었다.
아, 하며 자연스레 벌어진 유원의 입술을 태백훈은 말없이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내키지 않으신가. 하긴 아무리 팔을 다쳤다고는 해도 번번이 남의 손으로 받아먹기가 영 답답할 만도 했다.
“정 불편하시거든 혼자 드실 수 있게 준비해 올게요.”
“아니.”
팔을 확 잡아챈 태백훈이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더니 텁, 숟가락을 물었다. 마치 사냥감을 낚아챈 포식자 같은 몸놀림에 유원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손힘이 풀린 나머지 쥐고 있던 숟가락이 손아귀 사이로 미끄덩하고 흘러내릴 뻔했다. 이윽고 몸을 뒤로 젖힌 그가 혀를 세워 육즙으로 촉촉해진 입 주변을 날름 핥았다.
“맛있네요.”
웃음기 없는 태연한 표정과 달리 말투는 사근사근했다. 자칫 느물거리는 것처럼 들릴 만큼 온화한 본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