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마님께서 내어 주시는 거야.’
성의 없이 소쿠리를 휙 건넨 집사가 생색을 내며 말했다. 품값 대신 음식을 받는 날이 벌써 닷새째였다. 이틀 내리 봄비 맞아 가며 땔나무를 해 온 노고에 비하자면 헐값이었다.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삯을 받았어도 끼니 해 먹을 쌀을 샀어야 했잖아.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감댁 안주인이신 큰 마님께서 내어 주신 음식이라 하니 더더욱 군말하기 어려웠다. 싫다고 마다했다간 이젠 염치마저 없다며 혼이라도 날까 무서운 탓이었다.
작년 가을에 큰 도련님이 진사시(進士試)에 붙은 것이 퍽 기뻤던지 부인 마님께서는 그 뒤로 매주 유원을 불러다 보약 몇 첩을 하사했다. 네 어미가 안쓰럽고 마음 쓰이니 꼭 달여다 잡수시게 하려무나. 지극히도 인자하고 너그러운 말씨는 없느니만 못한 귀신 취급받던 때와는 판이했다. 그렇게 여섯 달째였다.
소쿠리를 슬쩍 살펴보자 큼직한 떡과 밥, 각종 나물, 배와 사과 같은 귀한 과일까지 두둑하게 담겨 있었다. 잔칫날도 아닌데 꼭 제사상에 올린 음식처럼 정성스러운 가짓수였다.
식은 음식에서 슬쩍 비릿한 냄새가 났다. 삭힌 젓갈에서 풍기는 비린내인 듯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얼른 가서 어머니랑 이른 저녁을 먹어야겠다. 무거운 소쿠리와 다르게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어머니! 이거 보세요! 큰 마님께서…….’
마당에 들어서며 어머니를 찾던 유원은 들고 있던 소쿠리를 힘없이 떨어트렸다.
마을에서도 구석진 자그만 초가집, 봄비 내리는 마당 한 가운데에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아니, 어머니가 아니다.
창백한 낯은 몹시도 익숙했다. 누운 그의 몸 아래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어느 틈에 유원의 두 손마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새빨간 하늘에 검은 해가 떠올랐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고작 너 따위 때문에 죽었어.
마치 그를 흉내 내는 듯한 속삭임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유원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싫어. 하지 마. 뒷걸음질 치려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쑥 꺼졌다. 피 웅덩이가 늪처럼 몸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안 돼……!”
소리 지르며 일어난 유원이 어수선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렁이는 촛불과 이끼 덮인 바위. 문득 옆에 앉아 있던 말의 콧김이 어깨를 적셨다. 걱정스러운 듯한 눈망울에 유원은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잠깐 꿈자리가 사나워서 그래.”
아무래도 불편하게 몸을 웅크리고 잔 탓에 긴장해서 악몽을 꾼 모양이었다. 한차례 긴장했다 풀린 팔다리가 얻어맞은 듯 욱신거렸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유원은 작아진 불씨에 땔감을 집어넣었다.
맞은편에 누워 있던 그의 몸이 미동했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태백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둑한 사위를 느리게 훑는 눈길이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영감! 괜찮으세요? 예?”
반가운 나머지 목소리가 높아진 유원이 상태를 되물었다. 아, 하고 탁한 숨을 길게 끈 태백훈이 잠시 멍하니 유원을 올려다보더니 물었다.
“꿈인가……?”
오랜 침묵 끝에 그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꿈이길 바란 걸까. 아마도 그렇겠지.
“송구하오나, 생시입니다.”
“…그렇군.”
동요 없이 납득한 태백훈이 상반신을 일으키려 했다.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제기랄. 결국 자세를 잡지 못한 태백훈이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영감. 지금은 되도록 움직이지 마세요.”
“대체 내가…….”
하얗게 마른 입술을 핥은 태백훈이 재차 말을 이었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겁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사흘 정도 지났을 거예요.”
“사흘? 그럼 다른, 사람들은?”
그 말에 유원은 대답할 수 없었다. 헝겊을 움켜쥔 채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 몸짓만으로도 태백훈은 무슨 의미인지 금세 이해한 듯했다.
“행선 이탈에 생사 불명. 예상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군.”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이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죽다 살아났더니 설상가상으로 부하들 생사도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오죽하겠는가. 침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유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시장하신지요?”
태백훈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이제 막 깨어났을 뿐이라 식욕까지 돌아올 정도로 회복하기엔 아직 일렀다. 그래도 빈속을 너무 오래 두면 안 될 텐데, 기력이 쇠한 듯 지친 얼굴에 끼니를 선뜻 권유하기가 어려웠다.
열상은 그대로였지만 여분의 천과 헝겊을 이용해 압박한 덕인지 더는 피가 흘러나오진 않았다. 덜 마른 피와 진물을 닦아 낸 유원이 불에 쬐어 물기를 말린 헝겊을 그의 허리에 꼼꼼하게 감았다.
“혹시 답답하시면 말씀하세요. 다시 묶을게요.”
“……괜찮은 것 같네요.”
푹신한 이끼에 등을 댄 태백훈이 눈을 감았다. 파리한 얼굴이 고단해 보였다.
* * *
띵, 힘없이 떨어진 화살에 나무뿌리를 갉아 먹던 토끼가 서둘러 달음박질했다. 거듭된 허탕에 활시위를 내린 유원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식으로는 토끼는커녕 거북이도 못 잡겠네.”
살면서 풀이나 열매는 따 봤어도 사냥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활시위를 당기는 데만 한 세월이었고 토끼가 경계 없이 다가와도 빗맞기 일쑤였다.
주변에 이렇다 할 민가도 없는 판국에 칡이나 우슬, 도토리 같은 채집물로는 끼니를 연명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태백훈의 부상이 빨리 아물려면 고깃국을 먹여야만 하건만 사냥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토끼 발끝도 따라잡지 못한 유원은 단념하고 버섯과 열매를 한 움큼 따서 동굴로 돌아왔다
해가 떨어지자마자 동굴 바깥은 먹을 입힌 듯 새카매졌다. 날이 저물기 전에 땔감이며 나뭇가지 등을 부랴부랴 주워 온 덕에 모닥불이 꺼질 염려는 없었다.
칡 껍질로 꼬아 만든 새끼줄에 흉배를 수놓은 검푸른 철릭과 투박한 가죽 등거리가 나란히 널려 있는 모습이 어색했다.
채집한 산나물과 열매를 정돈한 유원은 누워 있던 태백훈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알아챈 태백훈이 눈을 뜨고 유원을 올려다봤다.
“좀, 어떠세요?”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태백훈은 힘없이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괜찮다는 고갯짓과 달리 여전히 안색은 백지장이었다. 아예 의식조차 없을 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딱 그 정도였다.
불가에 찌그러진 투구를 올리고 물을 펄펄 끓였다. 뜨거운 물에 칡과 버섯이 익으면서 구수한 냄새가 퍼졌다.
대충 모양만 그럴듯하게 깎은 나무 그릇에 찻물을 뜬 유원은 태백훈을 살짝만 일으켜 제 허벅다리에 머리를 베게 했다.
“버섯이랑 칡을 푹 끓인 차예요. 아직 뭔가 드시긴 부담스러우실 것 같아서 건더기 없이 마시기 좋게 끓였어요. 해열이랑 갈증에 도움이 될 거예요.”
후, 후, 정성스럽게 식힌 찻물을 수저로 뜬 유원이 태백훈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영감. 아, 해 보세요.”
따라 하라는 듯 아, 하고 작게 입을 벌린 유원을 쳐다보던 그가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꿀꺽, 목 넘김을 확인하고서야 유원은 재차 물을 식혀 먹이길 반복했다.
“쓰거나 떫진 않으시고요?”
이번에도 태백훈은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채 삼키지 못한 찻물이 입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걸 발견한 유원은 서둘러 헝겊으로 입과 턱을 닦아 주었다.
평소라면 작은 도움조차 됐다며 거절하고도 남았을 텐데, 이리 얌전히 품에 안겨 제가 주는 손길을 마다하지 않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꼭 어린 아기를 돌보는 기분이었다.
아니, 어린 아기라기에는 좀 과한 표현이려나. 훤칠하다 못해 거대하기까지 한 무인에게는 확실히 아기라는 말은 좀 그렇긴 하지. 훤칠한 정도가 아니라 거대하다는 말에 더 근접한 무인한테는 더더욱 안 어울리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 커다란 몸을 유원한테 순순히 내주는 날은 두 번 다시 없겠지.
“쉬실 동안 주변을 좀 둘러봤는데, 골짜기 안쪽이라 그런지 안개가 좀 옅은 편이더라고요. 다행히 요수는 안 보이고 토끼가 좀 보였어요. 아, 까투리 같은 산새도요.”
“…….”
“참, 내일은 새알을 주워 오려고 해요. 가끔 부화 안 된 채 버려지는 알도 있거든요. 어미 새가 구렁이한테 잡아먹힌 경우도 있고요. 불쌍하긴 하지만, 그래도 날아다니는 새를 잡는 것보단 나을 거 같아서…….”
딱히 묻지도 않은 말을 일부러 활기차게 재잘재잘 떠들었다. 태백훈의 긴장과 불안을 달래 주려는 의도였다.
더운 숨을 길게 내쉰 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괴로운 기색을 눈치챈 유원이 태백훈의 맥을 짚었다. 내려갔던 열이 다시 재발했는지 몸이 불덩이였다.
“괜찮으세요?”
“후우…….”
질끈 감았다 가늘게 뜬 눈언저리가 불그스름했다. 어쩐지 지나치게 얌전하다 싶더니, 열이 다시 오르면서 반사적으로 긴장이 느슨해진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뺨을 이렇게 만지는데도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진 않을 터였다.
지난번에 먹인 약 이외에 가지고 있는 비상약은 마땅히 없었다. 기껏 차도가 보였는데, 신열을 방치하면 통증에 둔감해지면서 좋아졌던 몸 상태도 다시 나빠질 수 있었다. 아무래도 밖에 나가 찬물을 떠오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를 제자리에 가지런히 눕힌 뒤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데, 억센 힘이 유원을 잡아당기며 붙들었다. 옆을 돌아보자 그가 유원의 소매를 꽉 움켜잡고 있었다.
“어디, 어디에, 가려고요.”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축축했다. 흐리멍덩한 먹색 눈동자에 유원의 얼굴이 음각된 것처럼 깊숙이 비쳤다.
“밖에서 차가운 물 좀 길어 올게요. 잠깐만 누워 계시면…….”
“가지, 마.”
“하지만 열이 이렇게 나시는데요.”
“가지 말라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