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설광 (50)화 (50/60)

50화

관모봉, 현운산에서도 두 번째로 높은 영봉(靈峯)은 밤낮, 계절을 불문하고 서리와 얼음 안개로 덮여 있었다. 협곡 사이로 강줄기처럼 드리운 냉기가 마치 승천하는 용의 늘어진 턱수염 같다고 하여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용나룻봉이라고도 불렸다.

“이것 참, 희한하구나.”

까마득한 벼랑 아래에 짙게 깔린 안개를 내려다보던 연녹수가 턱을 쓰다듬었다.

“산쟁이들한테 목격될 정도로 커다란 놈이면 발자국이라도 남아 있는 게 정상이야. 여기 오는 내내 불개, 구마, 식인서, 심지어 그 보기 드문 백두야차 꽁무니마저 보였는데 그 돼지머리 괴물 놈이 안 보일 수가 있나.”

“그러면 고원으로 달아나 강을 건너갔을지요?”

손청준이 묻는 말에 태백훈도 어딘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뚫어져라 설산 위를 주시했다. 험준한 암벽으로 이뤄진 눈길이라 주변을 빙빙 맴돌기에는 위험천만한 수고로움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현운산 안쪽으로 무사히 입산했지만, 산 사람을 잡아다 국 끓여 먹은 흔적을 봤다던 산쟁이들의 목격담과 다르게 현운산 인근 봉우리 어디에도 조마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높은 곳에 오를 때마다 손청준이 까마귀 여럿을 날려 보냈지만 허탕이었다. 그렇게 산을 넘고 또 넘다 보니 어느덧 북단이 코앞이었다.

조마구는 먹으면 먹는 대로 몸집이 커지는 지능 높은 요수였다. 마지막 목격담에 따르면 벌써 담장만 한 크기라 했으니 서둘러 잡지 않으면 조마구는 점점 힘을 비축하여 북부를 닥치는 대로 들쑤셔 놓을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급하게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장장 열흘하고도 이틀 내리 눈보라 몰아치는 산속을 쉴 새 없이 지나온 탓에 말은 물론이고 관병들의 체력도 바닥이었다.

논의 끝에 그들은 가까운 고을로 하산해 몸을 데우고 재정비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있을 돌발 상황을 대비하려면 무엇보다 관병들의 사기를 잘 챙기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태백훈이 늘 관철해 온 견해이자 신념과도 같았다.

길을 가리키는 깃발이 나부끼고 멈췄던 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북단에서도 동부에 있는 성이었다. 성이라고는 하나 사람보다는 방위를 수호하는 북계군의 주둔지로 현재는 장수 조견이 군사들과 함께 배치되어 복무 중이었다.

행렬이 낭떠러지 사잇길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움직였다. 다행히 내려가는 길은 넓었으나 옆으로 보이는 깎아지른 벼랑에 말수레를 밀고 당기던 관노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을 한껏 움츠리고 걷던 막둥이가 쌩 불어온 눈보라에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콧물을 훌쩍이며 어떻게든 뒤처지지 않으려 꾸역꾸역 따라오는 막둥이를 보다 못한 유원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모포를 그에게 씌웠다.

“저, 저, 아, 아, 안 추, 추워요.”

“그러다 손이랑 발까지 꽁꽁 얼어 눈사람 되겠어.”

눈사람이 된단 말에 침을 꿀꺽 삼킨 막둥이가 머뭇거리다 몸에 두른 모포를 꽉 여몄다. 그제야 살 것 같은지 한결 안심한 얼굴이었다.

짙은 안개로도 모자라 눈보라까지 겹쳤다. 날카로운 강풍에 방한복으로 무장한 관병들은 물론 산길에 익숙해진 말들도 금세 지치는 바람에 스무 걸음마다 한 번씩 멈춰서기 일쑤였다.

그때였다. 휘휘, 문득 피리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인가 싶었으나 어딘가 이질적인 소리였다. 소리는 점차 선명해져 이윽고 골짜기에 메아리치듯 울렸다.

“뭔 소리지?”

연녹수가 거슬린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자 말을 멈춰 세운 태백훈이 앞을 노려봤다. 피리 소리가 순간 멈추더니 쿵, 하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단단한 바위나 얼음덩어리를 쪼개며 나는 굉음 같았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흥분한 말들이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홱! 높은 상공에서 수리가 퍼덕거리며 무언가를 알리는 기세에 태백훈이 귀를 기울이자 우르릉, 앞쪽에서 소리의 근원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대한 눈보라와 함께 얼어붙은 눈과 바위가 휩쓸려 내려오고 있었다. 눈사태였다.

하얗게 부서지며 미친 속도로 떠밀려 오는 눈 더미를 확인한 태백훈은 움켜잡은 고삐를 세게 당기며 말머리를 빠르게 돌렸다.

“뛰어!”

상황 설명을 덧붙일 여유도 없었다. 저 멀리 내려오는 눈 더미를 육안으로 발견하자마자 관병들이며 관노며 너나 할 것 없이 다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놀란 말들이 수레를 질질 끌며 달리는 통에 물자들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하여간 쉴 틈이 없네.”

말에서 뛰어내린 연녹수가 부적과 주구를 들고 휙 날렸다. 도깨비불이 휘장처럼 퍼지며 밀려오는 눈사태를 가로막았다.

술법에 집중하느라 하얀 이마에 금세 진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길게 막지는 못하겠지만 사람들이 대피할 정도로만 시간을 벌어 주기만 하면 태백훈이 알아서 퇴로로 유도할 터였다. 자신이야 축지를 쓰면 단숨에 안전한 높은 지대로 달아날 수 있으니 스스로의 안전에 대해선 대처할 이유가 없었다.

“으응?”

탁, 가슴팍에 무언가가 꽂히는 섬뜩한 감각에 연녹수가 고개를 내리자 몸을 꿰뚫은 화살대에서 피가 점점 번졌다.

대체 어디서 날아온 화살인 거지. 설마 누군가가 쫓아왔던가. 그런 기척은 한시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떻게……?

낯선 의문을 품기도 전에 흐트러진 술법 사이로 눈 더미가 파고들었다. 눈 더미가 삽시간에 연녹수를 하얗게 뒤덮었다.

“녹수 님!”

달리는 수레에 타고 있던 유원이 파랗게 질려 그를 불렀지만 커다란 굉음과 눈보라에 먹혀 버렸다. 하얗게 뒤덮인 구릉에 유원은 차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리 신묘한 도사마저도 눈사태에 휘말릴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었다.

“아, 아기씨! 아기, 씨, 빨리 도, 도망, 쳐, 야 해요.”

크게 외치는 막둥이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장 수레에 든 짐이 아깝다 해도 이대로는 말이 무게를 못 견디고 전부 파묻힐 판이었다.

“막둥아, 놓치지 않게 꽉 잡아야 해.”

“예, 예?”

막둥이를 잡아당긴 유원은 무작정 수레 앞쪽으로 뛰듯이 자리를 옮겼다. 혼비백산이 되어 달리는 말 등에 올라타기가 쉽지 않았지만 막둥이를 먼저 올려 태워야만 했다. 안장에 매달린 막둥이가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 자리를 잡았다.

“아, 아기씨, 빠, 빨리…!”

막둥이가 손을 뒤로 뻗으려는 찰나였다. 수레와 안장 사이를 잇던 매듭이 속도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투둑 끊어졌다. 수레 살이 뒤로 밀려나며 튕겨 나간 유원이 데굴데굴 눈 바닥을 굴렀다.

부딪힌 머리가 얼얼했다. 빨리 일어나야 하는데……. 흐릿한 시야 너머로 수레가 점점 멀어졌다. 점차 가까워지는 찬 기운에 이대로 죽겠거니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말 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황급히 뛰어내린 인영이 유원을 번쩍 안아 들고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빌어먹을.”

짧은 욕지거리와 함께 널찍한 품이 유원을 둥글게 감싸 안았다. 검푸른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곧 사위가 검은빛에 잠겼다.

* * *

둔탁한 두통과 함께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서서히 돌아오는 감각에 뒤틀린 속에서 메스꺼움이 역류했다. 옆으로 몸을 비튼 유원은 기침과 함께 헛구역질을 했다. 입에 들어갔던 눈덩이와 흙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으, 머리 아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잠시 옹송그리고 있던 유원이 흐리멍덩한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는 어디일까. 어둑어둑한 밤하늘 아래 우거진 나무에 잡초, 그 사이 빈 곳을 채우듯 바위가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싸락눈 섞인 바람이 뺨에 닿았다 멀어졌다. 아무래도 저승 길바닥은 아닌 듯한데, 설마 벼랑 아래로 떨어졌을까. 그럼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걸까. 하루? 그도 아니면 이틀일까.

엎드려 있던 몸을 조금씩 일으켰다. 다행히도 두통과 어지럼증 외에 큰 외상은 없는 듯했다. 눈사태에 밀려 낭떠러지로 떨어지기까지 했는데도 멀쩡하게 살아 있다니,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메스꺼운 속을 진정시키느라 숨을 고르던 유원의 귓가에 미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신음에 고개를 돌리자 눈과 흙더미 아래에 태백훈의 몸이 반쯤 매몰되어 있었다.

“여, 영감!?”

당황한 유원이 비척비척 기어가 그를 눈과 나무 밖으로 질질 끌어당겼다. 간신히 끌어 올린 몸은 차갑게 식어 미동조차 없었다. 코끝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니 미약하게나마 호흡이 느껴졌다. 아직 숨을 부지하고 있었으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피가…….”

손바닥에 묻은 핏물을 내려다본 유원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들숨에 스며든 피비린내에 등줄기가 떨렸다. 비단 손에 묻은 피로 끝나지 않았다. 질질 끌려 나온 그의 몸을 따라 새겨진 핏자국이 선명했다.

아연하게 태백훈을 내려다보던 얼굴에 두려움이 번졌다. 어디를, 얼마나 다친 건지 가늠할 수도 없었지만 출혈만 보더라도 심각한 중상(重傷)이었다. 이 정도로 피를 쏟았다면 목숨에도 지장이 있을지도 몰랐다.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던 유원이 탁 트인 반대편을 향해 외쳤다.

“누가, 누가 좀 도와주세요!”

메아리도 울리지 못할 만큼 미약한 외침에도 목구멍이 찢어지는 듯했다. 쿨럭, 쿨럭, 기침을 연신 뱉은 유원은 몸을 양팔로 감쌌다. 눈으로 흠뻑 젖은 몸에 으스스한 밤바람이 직격으로 들이닥친 탓이었다. 이가 딱딱 부딪치고 식은 몸이 저절로 오들오들 떨렸다. 마냥 이러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그를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나무에 등을 대고 어질어질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운 유원은 축 늘어진 태백훈의 몸을 어떻게든 들쳐 업으려 했다. 그러나 몇 번을 시도해도 그대로 풀썩 주저앉기 일쑤였다.

여느 무사들처럼 단련된 몸은 아니라 해도 힘쓰는 일은 어지간한 장정 몫 정도는 한다 생각했는데 역부족이었다. 내상 때문에 조심스럽기도 했지만 태백훈은 저보다 한 뼘은 족히 큰 장신이었고 기골이 장대한 무인이라 등에 그를 업기는커녕 두 팔로 부축하고 걷기조차 버거웠다.

그래도 어떻게든 가야만 했다. 하다못해 땅굴이라도 찾지 않으면 둘 다 싸늘하게 식은 주검으로나 발견될 터였다.

어디선가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혹시 근처에 사람이 있을까. 누구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힘겹게 몇 발자국 내디딘 끝에 익숙한 검은 말 한 마리가 불안하게 빙글빙글 맴도는 모습이 보였다. 태백훈이 타고 다니는 군마였다.

“무사했구나!”

두통도 잊고 달려간 유원이 반갑게 말을 부둥켜안았다. 큰 눈사태에 떠밀렸는데도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다행이다. 참말로 다행이야.”

살살 갈기와 귀 뒤를 쓸어 주자 안정을 찾은 말이 유원의 뺨에 제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온기에 잠시 안도하던 유원은 저 너머에서 흐느끼는 듯한 바람 소리에 귀 기울였다. 휘휘, 꼭 피리를 부는 듯도 싶은 구슬픈 음색이었다.

사람이 내는 소리일까. 아니면 요수 울음소리일까.

태백훈을 간신히 말 등에 태운 유원이 천천히 고삐를 잡아끌었다. 나가는 방향을 분간할 수 없으니 일단 소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울창하던 나무들이 조금씩 낮아졌다. 졸졸 흐르는 물에서나 나는 습한 냄새에 유원은 빡빡한 덤불을 가로질렀다. 가시에 살이 긁히는 줄도 몰랐다.

휘이, 휘이, 피리 우는 소리 같던 바람이 어느새 잠잠해졌다. 비로소 멈춰 선 유원의 눈앞에 드러난 것은 사람도 요수도 아니었다.

물안개에 휩싸인 커다란 동굴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