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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48)화 (48/60)

48화

피곤하다는 이유로 관노들이며 보초병도 죄다 내보낸 막사 주변은 바람에 깃발 나부끼는 소리뿐이었다. 입구에 놓인 횟대에는 검은 수리가 앉아 부리로 깃을 정돈하던 중이었다.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든 수리가 유원을 쳐다봤다. 쉿, 하고 손가락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하자 수리가 본체만체하며 눈을 돌렸다. 다행히 큰 소리로 울거나 날개를 펼쳐 위협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사방을 천막으로 가린 막사는 간이로 지은 처소치고는 나름 넓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음산하고 축축한 피비린내가 희미하게 풍겼다. 등촉 밝힌 탁상 위에 흐트러진 지도와 문서, 그 옆에는 보료와 모포를 두툼하게 깐 침상이 보였다.

태백훈은 화로 앞에 앉아 칼을 손질하던 중이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날을 갈 때마다 쓱쓱 선득한 소리가 이어졌다. 헝겊에 흥건히 묻어난 검붉은 핏물은 직전 벌어진 살생의 흔적이었다.

기척을 느낀 태백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유원을 응시했다. 정적을 꿰뚫는 듯한 시선도 잠시, 그는 다시금 말없이 날을 다듬었다. 누군지 알았으니 하등 신경 쓰지 않겠다는 무심한 움직임이었다. 숨을 고른 유원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저기… 몸은 어떠신지요?”

넌지시 묻는 말에도 그는 대답 없이 손을 바쁘게 놀릴 뿐이었다. 못 들었나 싶어 유원은 재차 그에게 물었다.

“녹수 님께서 영감의 기력 소모가 상당하실 거라 걱정하셨어요. 하여 회복에 도움 될 만한 약이 필요하시냐고…….”

“필요 없다고 전하세요.”

딱 잘라 내뱉는 말투에 유원은 되묻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알겠다며 물러나면 될 일인데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태백훈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를 성가시게 만드는 듯해 괜히 조마조마했다. 마치 버선 사이에 들어간 돌이나 손톱 거스러미 따위의 불필요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장수의 병법은 장수가 스스로 결정지어야 하는 법입니다. 설령 상대가 짐승이라 해도 지휘의 책임은 영감이지 않습니까.’

손청준의 충고가 뇌리를 스쳤다. 틀린 말 하나 없었다. 한시를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서 도와야겠다는 마음만이 앞서 불민한 판단을 했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유원이 말문을 열었다.

“아까는 제가… 경솔하게 굴었습니다. 감히 영감을 방해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짧은 생각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여 말씀드렸던 건데.”

의기소침한 고해에도 태백훈은 별 기색 없이 그저 칼에만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곁에서 타오르는 촛불만도 못한 제 꼴이 한심했다. 하기야 상종하기도 싫을 만하지. 스스로 건사하겠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그의 도움을 받았다. 이번만 해도 세 번째였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 세 번이나 몹쓸 꼴을 보였다는 의미였다.

죽치고 서서 해쓱한 얼굴을 뚫어져라 본들 더 물을 만한 용건도 없었다. 있어 봤자 휴식에 방해만 되겠지. 묵묵히 그를 바라보던 유원은 품에 넣어 뒀던 연고 통을 탁상에 내려놓았다.

“상처에 잘 드는 연고예요. 당장은 아니라도 필요하실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영감에게 드릴게요.”

이내 순순히 돌아서려던 그때였다.

“……홍유원.”

호명하는 목소리가 낮고 음산스러웠다. 그러나 목소리보다도 그의 입에 담긴 제 이름이 더 낯설게 들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돌아보자 어느 틈에 태백훈이 제자리에 일어서 있었다. 칼을 내려 둔 그가 손을 제 앞쪽으로 까딱거렸다. 이리 오라는 손짓에 유원은 벙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로 불러 세운 거지. 실수했나 싶어 제 행동을 되감아 봐도 딱히 짚이는 점은 없었다. 아니면 연녹수에게 전할 말이 있는 걸까. 그 외에는 달리 그가 유원을 부를 이유가 없었다. 주저하며 다가온 유원을 훑어본 태백훈이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이내 두 눈을 세모꼴로 날카롭게 치켜떴다.

“위에 옷.”

“네?”

“옷 좀 벗어 보라고요.”

대뜸 옷을 벗으라는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유원을 향해 태백훈이 눈짓으로 채근했다. 왜 그러냐며 되묻자니 노려보는 그의 얼굴이 냉엄한지라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뭔가 꺼림칙하여 수색이라도 하려나 싶어 유원은 시키는 대로 주섬주섬 옷을 하나씩 벗었다. 목도리와 외투, 그리고 저고리 위에 받쳐 입은 등거리. 급한 마음 탓인지 손가락이 자꾸 고리에 걸려 더뎌졌다.

팔짱을 끼고 유유히 지켜보던 태백훈은 유원이 등거리를 가까스로 벗자마자 냅다 유원의 저고리 앞섶을 휙 풀어 젖혔다. 당황한 나머지 무슨 짓이냐며 반발하지도 못하고 그저 입술만 벙긋거렸다. 태백훈은 유원을 끌어안듯 바짝 기대며 저고리 뒤쪽으로 손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여기 등 뒤에 상처.”

“흐읏…!”

등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각에 신음이 새어 나왔다. 황급히 그를 밀어낸 유원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얼굴이 뜨거워 고개를 들 수 없어 저절로 고개가 내려갔다.

막둥이를 감싸면서 등 뒤에 발톱이 찍혔던 것은 알고 있었다. 큰 상처도 아니고 피도 더는 나지 않는 듯해 나중에 가볍게 소독이나 하면 되리라 여겼다. 제 몸보다도 당장 지쳐 걷지도 못하는 관병들의 상태를 보는 데 급급했다.

“본인 몸 하나 간수 못 하는 판에 누굴 걱정하겠다고.”

“……이 정도는 가만히 두면 자연히, 낫습니다.”

“자연히 낫는다고? 자칫 죽을 뻔한 줄은 알고 계시긴 한 겁니까?”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에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맛살을 찌푸린 태백훈이 아예 팔목을 붙잡아 저고리를 억지로 끌어 내리려 했다. 예기치 못한 손길에 눈을 휘둥그레 뜬 유원이 그의 팔을 밀어냈다.

“영감, 자, 잠시만요!”

힘껏 만류해 봐도 체격부터가 차이가 나니 도무지 그의 팔을 뿌리칠 수 없었다. 완력으로 밀려난 몸에 부딪힌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쿵 요란한 소음을 냈다. 그와 동시에 태백훈의 두 손에 붙잡힌 유원이 탁상 위에 눕혀졌다.

“아…!”

가벼운 탄성과 함께 순식간에 태백훈 아래에 깔린 유원의 두 눈에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화가 난 듯 일그러진 눈썹 아래 검푸른 눈동자가 첨예했다.

“내가 분명히 며칠 전에도 함부로 나서지 말라 했는데. 그 말을 듣기는커녕 쓸데없이 다치기까지 하고.”

태백훈은 도무지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팔목을 붙잡아 누른 손을 더욱 단단하게 압박하며 상체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누워 있는 몸 위로 그의 묵직한 온기가 실리며 배와 가슴께가 뻐근해졌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매번 이리도 손이 많이 가게 하시니, 참으로 대단한 재주십니다.”

태백훈이 몸을 숙이자 그의 옷고름이 자연히 아래로 늘어지며 살 위를 사부작거렸다. 흐늘거리는 비단 끈이 맨가슴과 배 위 여기저기를 건드릴 때마다 깃털을 삼킨 듯 목 안쪽이 간질간질했다.

손목을 누르는 단단한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아찔하리만큼 뜨거웠다. 쿵, 쿵, 심장이 두방망이질 친다. 입이 막힌 것도 아닌데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하다못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아득했다.

슬그머니 고개를 떨구자 질끈 다물린 그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몸을 들면 필시 그의 입술이 턱에 닿겠구나. 아니, 턱이 아니라 제 아랫입술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스스로가 망측해 견딜 수 없어 외면하듯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다 아까부터 자꾸 눈을 피하기까지 하는데.”

“으윽.”

“내가 시정잡배 무뢰한처럼 굴어야만 상대하려고?”

격 없는 말투와 함께 그의 손이 유원의 턱을 붙잡았다. 강제로 시선이 맞닿았다. 광택 어린 두 눈이 먹처럼 새카맸다.

“언제는 나한테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고 다 하더니 어찌 오늘은 입을 꾹 다물고 계십니까.”

“…….”

“응? 홍유원. 말씀 좀 해 보세요.”

역정 어린 형형한 눈빛에 입속이 바짝 말랐다. 정제되지 않은 분노는 낯설지 않았다.

또 화가 난 거다.

하지만 왜? 이번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는데.

아니, 딱히 원인은 없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단지 도련님들 눈앞에 보였단 이유로 번번이 매질을 당하곤 했었다.

특히 둘째 도련님은 유독 유원을 싫어했다. 천한 핏줄 주제에 양반집에 기생하는 꼴이 역겹다면서, 기분이 풀릴 때까지 분풀이하곤 했다.

그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짜증스럽고 한심하다는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친 눈이었다.

“잘못…했어요.”

용서를 구하는 말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 꾹 다문 턱부터 눈시울까지 벌벌 떨렸다. 태백훈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괜한 분노를 샀다가 기껏 그에게 받은 호의마저 증발할지도 몰랐다. 유원은 그의 심기를 어떻게든 더 건드리지 않으려 몸에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경솔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저항 하나 없이 순순한 태도에 태백훈의 눈빛이 오묘하게 흔들렸다. 뜻밖에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타닥, 타닥, 화로에서 불티 튀어 오르는 소리가 침묵을 메웠다. 문득 태백훈의 시선이 손으로 잡아 누른 손목으로 향했다. 얼마 전 일로 생겼던 상처가 아직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말없이 상흔을 바라보던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탁자에 손을 짚고 몸을 살짝 들어 올렸다.

“……상처 좀 볼 테니 돌아서 보세요.”

다소 부드러운 말투와 함께 손목을 누르던 힘이 약해졌다. 태백훈은 멀거니 그를 올려다보는 유원에게 재차 눈짓했다. 어르는 듯한 눈빛에 잠시 눈을 깜빡거린 유원은 몸을 돌려 탁상에 기대듯 엎드렸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한편에 놓여 있던 연고 통을 집어 드는 그의 손이 보였다. 달칵, 뚜껑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지않아 저고리를 들치고 등 위로 약을 바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환부에 손이 닿을 때마다 등허리가 작게 떨렸다. 떨리는 등줄기를 따라 손가락이 섬세하게 두드렸다. 유원은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숫자를 셌다. 짧은 순간인데도 마치 영겁 같았다.

몸 위로 드리웠던 그림자가 물러났다.

“됐으니 그만 일어나세요.”

진이 빠진 듯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어깨와 등줄기를 쓸어내리는 그의 시선이 잔불 같았다.

“……조금 전에는, 내가 좀 과했습니다.”

급히 옷을 추스른 유원은 멀거니 고개를 숙였다. 귓속이 먹먹했다. 단지 서둘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어? 아기씨,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막 순찰을 다녀온 곽현욱이 튀어나오는 유원을 붙잡았다. 넋이 나간 듯한 기색에 그는 빠르게 유원을 살폈다. 헝클어진 귀밑머리, 다 풀어 헤친 옷자락 사이로 하얗게 드러난 맨살과 손목에 남은 붉은 손자국. 뚜렷한 정황 증거에 곽현욱이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커다랗게 뜨고는 씩씩거렸다.

“어떤 빌어먹을 자식입니까? 지금 감히 어느 안전에서 임자 있는 누구를 건드리려고!”

“아니, 아닙니다! 오, 오해예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옷을 이렇게 훌러덩 벗고 도망치시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다며 노발대발하려던 그의 시선이 저 너머로 향했다. 막사 쪽에서 나온 태백훈이 성큼성큼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곽현욱의 인사를 대강 넘겨받은 그가 유원 앞에 차분하게 섰다.

“아무리 정신없기로서니 밤바람이 이리 차가운데 옷은 도로 챙겨 가셔야지요.”

외투와 목도리를 곱게 돌려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친절하게 유원의 옷자락을 다시 여미고 옷섶을 매어 주기까지 했다. 이윽고 곽현욱 쪽을 흘낏 쳐다본 태백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막사로 돌아갔다.

장승처럼 우뚝 서 있던 곽현욱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곤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죄송합니다, 아기씨. 저는 또 어디서 몰상식한 놈이 치근덕거렸나, 했지 뭡니까. 영감과 같이 계시다 나오신 거라고 말씀하시지.”

웃어 젖히는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한 듯한 반응이건만 유원은 멍하니 옷깃만 만지작거렸다. 좀처럼 울렁거리는 가슴께가 가라앉지 않았다. 화롯불을 집어삼킨 듯, 갈증과도 비슷한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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