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근처 바위와 덤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들이 침묵에 빠졌다. 말로만 듣던 검기(劍氣)를 실제로 보니 감탄스럽기도 했지만 저 커다란 요수를 단칼에 반으로 쪼갠 것이 믿기지 않았다.
피가 뚝뚝 묻은 칼날은 서리처럼 희고 차가운 냉기를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보다도 태백훈의 얼굴이 더욱 날카롭고 서슬 퍼렜다.
수년 전, 침략한 이민족을 상대로 혼자서만 천 명을 학살한 귀신. 그를 지칭하는 이명을 실감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저 멀리 날아간 장도를 집어 든 태백훈은 막둥이를 안은 유원을 돌아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잔뜩 쏟아 내고 싶은 듯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유원을 타박하는 대신 곧장 몸을 돌려 관노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지금 즉시, 챙길 수 있는 물자는 모두 챙겨 절벽 위로 피신해라.”
그 말에 관노들이 허둥지둥 수레를 챙기고 흩어진 말을 찾아 데려오기 바빴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휙 유원을 지나치려던 차였다.
“영감, 자, 잠시만요.”
그를 붙잡은 유원이 옆에서 벌이는 사투를 힐끔 살폈다. 진땀을 흘리는 관병들의 낯빛이 검붉었다. 체력 소모로 인한 증상이었다.
“안전하게 달아날 방도가 있습니다.”
“방금 내가 한 명령 못 들었습니까? 물자를 챙겨 냉큼 빠지라고 했으니 속히 피하기나 하세요.”
붙들린 옷자락을 빼낸 태백훈이 두말하지 않겠다는 듯 냉랭히 걸음을 옮겼다. 유원은 돌아선 그를 향해 있는 힘껏 외쳤다.
“아까 녹수 님께서 말하시길 저들은 독에 취하면 잠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식량에다 독을 뿌려 내놓으면……!”
“손청준 진사!”
유원의 간절한 호소를 묻어 버리는 듯 태백훈이 크게 소리쳤다. 대치 중이던 구마를 빠르게 밀쳐 낸 손청준이 날아오는 것처럼 재빠르게 태백훈에게 다가왔다.
“이 사람을 저기 절벽 위로 피신시키세요.”
“홍유원 아기씨만 모시면 됩니까?”
“그럼 달리 누가 또 있는가?”
막둥이를 제외한 명령에 유원은 파들파들 떨며 어린 노비의 몸을 끌어안았다. 태백훈은 재차 말을 이었다.
“또한 손 진사께선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 아둔한 종놈 대신 호위로 붙어 계셔야 할 겁니다.”
친근함이라곤 하나 없이 진사라는 호칭까지 꼬박꼬박 붙이는 음색에는 진노가 담겨 있었다. 손청준은 하명에 물음도 않고 냉큼 유원을 데리고 말에 올라탔다. 막둥이를 업은 유원이 애걸했다.
“나리, 제발요.”
“송구하나 말이 무게를 버틸 수 없을 겁니다.”
“그럼 차라리 막둥이를 데려가세요. 저는 멀쩡하니 걸어가겠습니다.”
곤란한 얼굴로 길게 숨을 내쉰 손청준이 말했다.
“……여기 수레에 잠시 눕혀 놓으시면 이따가 제 손으로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면 안심하시겠지요?”
그로선 나름 최선책으로 꺼낸 제안일 터였다. 유원은 하는 수 없이 막둥이를 짐칸에 앉혔다. 혹시 요수가 이곳까지 올라와 해코지할까 염려돼 천으로 감싼 뒤에야 안장에 올라탈 수 있었다.
새카만 밤하늘에 눈이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말은 눈보라에도 거침없이 산길을 올랐다. 벼랑 위까지 당도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혹은 정신없는 나머지 그리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벼랑에 유원을 앉혀 둔 손청준은 다시 말을 돌려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는 사이에 말수레를 밀고 당기며 올라온 관노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벼랑 아래 어두컴컴한 숲 쪽을 내려다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하마터면 뒤질 뻔했네.”
“내 살다 살다 저렇게 흉측한 요수는 처음 봤다. 새경을 세 곱절로 준다고 하여 자원했는데 말이야.”
“올해는 그나마 도사 양반이 동행해서 그나마 나은 형편이라던데.”
“그래도 그 검기인지 뭔지는 정말 기가 막히더구만. 대국에서도 장수로서 대등한 자가 손에 꼽힌다더니. 히야, 거짓부렁은 아니었네.”
“우리랑 같은 관노비 출신이셨다던데. 나도 검기를 이리저리 날리게 되면 감투 좀 써 보려나?”
“아서라, 너 같은 게으름뱅이가 무슨 감투냐. 게다가 저런 능력이 흔한 줄 알아? 그러니까 임금님께서 데려다 장수로 삼으신 거 아니겠어.”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 벗어나니 다들 긴장이 풀렸는지 실없는 말이나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언덕길에서 하염없이 손청준을 기다리던 유원은 까마귀 울음소리를 듣고는 비탈길로 내려섰다. 저 멀리 솔가지 사이로 손청준이 막둥이를 안고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유원은 서둘러 말에서 막둥이를 받아 내린 다음 바닥에 눕혀 맥을 쟀다. 다행히 기절한 정도에서 그쳤는지 숨소리도 안정적이었다.
“송구합니다. 나리.”
“아닙니다. 아무리 노비라 해도 아직 어린아이인데, 내버려 두면 딱하잖습니까. 오르는 길이 심하게 가파르진 않아 괜찮았습니다.”
사람을 둘씩 태우고 산길을 두 번이나 빠르게 왕복한 탓에 말은 잔뜩 지쳐 있었다. 저 때문에 고생한 말이 갸륵해 유원은 손청준이 말을 진정시키는 동안 수레에서 여분의 수통을 찾아왔다.
“영감은, 아직 아래에 계신 거죠.”
“예. 끊임없이 몰려들더군요. 머릿수가 서른 마리보다 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많았다니. 토끼나 담비 정도의 몸집도 아니고 한 마리가 다 자란 말과 같아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유원은 손청준에게 간곡하게 말을 올렸다.
“아까 녹수 님께서 말하시길 저들은 독이 통하진 않으나 독을 중화하려 잠에 빠진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가령 부엌에서 쥐를 잡으려 독을 바른 먹이를 군데군데 놔두면 먹이를 먹은 쥐가 새끼에게 젖을 먹여 독이 퍼지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고깃덩이에 독을 발라서 미끼 삼으면 분명 빠져나올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예요.”
“확실히 괜찮은 방법이긴 하군요.”
다행히 손청준은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좋은 묘안이란 칭찬뿐, 돌아가서 전하겠다거나 하는 말은 딱히 없었다. 유원을 잠자코 내려다보던 손청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기씨. 더는 괘념하지 않으시는 편이 낫습니다. 아기씨께서 영민하심을 알지만, 장수의 병법은 장수가 결정지어야 하는 법입니다. 상대가 설령 요수라 해도 지휘의 책임은 영감이지 않습니까.”
“저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정곡을 찔린 유원이 말끝을 흐렸다. 틀린 말 하나도 없었다. 유원은 그저 일개 민간인이었고 태백훈은 십수 번도 넘는 전투를 치러온 유능한 장수였다. 하물며 요수를 상대하는 방법이야 모르지 않으리라. 그런데 고작 몇 가지 안다고 그를 붙잡았으니 훼방을 놨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나서지 말라고 했다. 얌전히 짐짝처럼 있으라고도 했다. 엄중한 경고였으며 유원에게 내린 당부였다.
하지만 그때 나서지 않았다면 막둥이가 죽었으리라. 적어도 그 순간에는 막둥이를 지켜야겠다는 일념 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솔직한 심정으론, 영감께서 혼자 나서시는 편이 더 빠르게 끝나긴 할 겁니다.”
“빠르게, 끝난다고요?”
한 마리를 잡는데도 여럿이 달려들어야만 겨우 목을 떨어트릴 수 있었다. 그런 요수가 수십 마리인데 어떻게 혼자 나서는 편이 더 빠르단 말인가.
“아기씨께선 영감께서 왜 귀신이라 불리는 줄 아십니까?”
손청준이 문득 물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유원은 두 눈을 느리게 슴벅거렸다.
“제아무리 대단한 무사여도 살생에 있어선 망설이기 마련입니다. 참수 집행인조차 한 명을 베기도 힘들어 독한 술에 의지하는데, 열 명, 백 명은 오죽하겠습니까.”
쓴웃음을 지은 손청준이 말을 이었다.
“당시, 천 명의 적군을 베고 돌아온 영감은 갑주가 온통 피에 젖다 못해 말라붙어 새카맸다고 합니다. 십 리 밖으로도 피 냄새가 진동하니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귀신을 보는 듯했다고 하지요. 그런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회군하자마자 적장의 목을 주상 전하에게 봉상(封上)했다고 합니다. 한낱 칼잡이라 깔보던 사대부조차 기겁하여 목소리조차 못 냈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지요.”
섬뜩한 묘사에 유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내 손청준이 어깨를 으쓱 흔들었다.
“영감께서 검기를 쓰실 정도면 단단히 작정하셨단 뜻이거든요. 적어도 인근에 보이는 놈들은 죄다 잡아들여야 만족하실 겁니다.”
남아 있던 말수레를 끌고 올라온 관병들은 그을음과 피로 엉망진창이긴 했지만 보기보다 멀쩡한 모습이었다.
비탈길 아래에 바람이 훌쩍 분다 싶더니 방금까진 보이지 않던 수행진의 말들이 보였다. 먼저 말에서 내린 곽현욱이 태백훈 옆에 서서 부축하려 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하지만 영감, 방금까지 너무 기력을 소모하셨습니다.”
걱정스럽게 건넨 말에도 그는 지체 없이 말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마중 온 손청준을 향해 시선을 내린 태백훈이 입을 열었다.
“별일은 없었던가.”
“예, 이쪽은 아무 일 없었습니다. 구마 무리는 어찌 되었는지요.”
손청준의 물음에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대답했다.
“……섬멸했다.”
간단명료한 대답에 손청준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아래를 살피던 까마귀들이 피 냄새를 맡고 요란하게 울 때부터 짐작했던 바였다.
“모두 마흔두 마리더군. 시체는 태우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뒀네.”
“옳은 판단이십니다. 그만하면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올 게 아니라 두려워서 도망가고도 남겠지요.”
마흔에 달하는 사체는 굶주린 요수들을 꾀어내기보단 경고하는 쪽에 가까우리라. 특히 지능이 높은 요수라면 발자취를 보고도 돌아설 터였다.
태백훈은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마와 입술은 아까보다 창백했고 눈가에 고단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는 곧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순간 유원과 눈이 마주쳤으나 그는 무신경하게 지나칠 뿐이었다.
관병이 머릿수를 세어 상전에게 보고하니 사망자는 하나, 부상자는 넷이었다. 거기에 말 두 필을 잃긴 했으나 그 많은 요수를 한꺼번에 상대한 것치고는 적은 손해였다.
기나긴 전투에 병사와 말이 지쳤으니 중천까지 쉬어가기로 논의를 매듭지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아주 멀지 않은 쪽에서 자그만 샘터가 발견되었다.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아주 깨끗해 식수로 쓰기에도 충분했다.
막사를 새로 펼치고 곳곳에 돗자리를 깔았다. 개중 심하게 다치거나 과로 증세를 보이는 관병들에게 두툼한 모포와 담배를 내주었다.
“아, 아야야. 아픕니다요.”
“이런, 이런. 사내가 어찌 이리 엄살이 심해?”
누워 있는 부상병의 허벅지를 지혈한 연녹수가 혀를 찼다. 새치름한 눈빛이 퍽 요염하기까지 한지라 부상병은 볼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연녹수는 귀찮다, 성가시다 투덜거리면서도 성심껏 부상병을 살폈다. 피를 보는 일 따위는 천하다며 꺼리는 양반들 같지 않은 진중한 태도였다. 곁에 있던 유원은 연녹수가 시키는 대로 깨끗한 물과 천을 가져오고 연고와 약제를 찾아 척척 내밀었다.
한숨 돌린 연녹수가 유원을 올려다봤다.
“아가는? 어디 다친 데 없고?”
“예…….”
발톱에 긁혔던 등줄기가 약간 따끔하긴 했으나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가만히 유원을 쳐다보던 연녹수가 턱짓으로 안쪽 막사를 가리켰다.
“여기는 되었고, 영감한테나 가 보거라.”
“다치셨대요?”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기력이 많이 빠지긴 했겠지. 검기를 그리 썼는데도 태연히 걸어 다니는 것이 신기하다만.”
“그럼 편히 쉬게 두시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
“그래도 예의상 살펴봐야 기력을 회복할 탕약을 주든 하잖니. 나는 이놈들 상처를 마저 소독할 테니 네가 가서 슬쩍 물어보고 오련.”
그리 지쳤다면 차라리 놔두는 편이 나을 텐데. 가서 몸 상태를 물어보라 채근하니 하는 수 없이 막사 쪽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