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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46)화 (46/60)

46화

윗전을 향해 고개를 숙인 관병이 정중하게 말했다.

“별일 아닙니다. 영감. 그저 여기 도령께서 숲 아래쪽을 다시 살펴봐 달라고 재촉하셔서요. 반 식경 전에 둘러보고 왔고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씀드리던 차였습니다.”

“아래쪽?”

곽현욱이 슬쩍 고개를 빼 밑을 내려다봤다. 딱히 뭔가 보이진 않았다. 그저 울창한 나무들뿐이었다.

까악, 까악, 까마귀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손청준은 뭔가 묘한 표정으로 태백훈을 돌아봤다. 태백훈이 눈짓하자 그가 재빠르게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어두운 숲속에 불빛은 이 아래 야영지뿐이었다. 뒤따라온 도적도, 사람도 없었다. 짐승 떼도 딱히 보이지는 않는 듯하다 싶던 그때였다.

“태 도백.”

흠칫 몸을 떤 연녹수가 불렀다. 긴장한 목소리에 태백훈이 그를 돌아보자마자 건너편에서 말 우는 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횃불을 잡아 든 태백훈이 말을 향해 불빛을 비추자 주변을 맴돌던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구마(狗馬)로군.”

가늘게 눈을 뜨고 노려보던 연녹수가 말했다. 사관에도 기록된 요수로, 생김새는 털이 많은 삽살개와 비슷하나 크기는 다 자란 말과 같았다.

“남부와 중부에선 이미 자취를 감췄다고 했는데 아직 북도에 서식지가 남아 있었던 건가.”

“모르겠어. 그나마 한 마리니 굳이 상대할 필요 없이 쫓아내는 편이 좋겠네.”

소매에서 노란 부적을 몇 장 꺼낸 연녹수가 심호흡하자 나무 위에서 내려온 손청준이 말했다.

“공교롭게도 한 마리가 아닌 듯합니다.”

“아니라고? 그럼 몇 마리인가? 두 마리? 네 마리?”

연녹수가 놀라 묻는 말에 손청준은 자못 심각한 눈빛으로 기슭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못해도 서른 마리입니다.”

서른 마리, 라는 말에 태백훈이 황급히 몸을 돌려 큰 소리로 외쳤다.

“즉시 어린진(魚鱗陣)을 갖춘다!”

습격을 알리는 북이 울렸다. 때아닌 날벼락에 막사에서 쉬던 관병들이 서둘러 창과 칼을 들었다. 비장하게 창을 겨누며 어둠 속을 둘러봤으나 도통 보이지 않았다.

“으악!”

한 관병이 순식간에 넘어지더니 허우적거리며 제 발 쪽으로 창을 휘둘렀다. 다른 관병이 발 빠르게 횃불을 휘두르자 검은 기운이 스르륵 어둠 사이로 몸을 감췄다. 아무리 불을 밝혀도 형상은 보이지 않고 그저 수레바퀴가 빠르게 땅을 구르는 듯한 소리만이 요란했다.

“이, 이 녀석아! 안 돼! 돌아오너라!”

마부가 제지할 새도 없이 말 한 마리가 겁에 질린 채로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머지않아 단말마가 숲속에 울려 퍼지더니 아작, 아작, 생뼈를 게걸스럽게 씹어 먹는 소리가 들렸다. 킥, 캑, 마치 늙은이가 기침하는 듯한 그르렁거림에 관병들은 긴장하며 창을 겨눴다.

그때, “사람 살려!” 하는 비명이 들렸다. 어두운 사위로 관병 하나가 엎어져 저 멀리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어느 틈에 습격했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빠른 움직임에 관병들이 파랗게 질렸다.

뒤쪽에서 화살이 빠르게 날아와 그림자를 맞히자 비명이 터졌다. 활을 쏜 이는 다름 아닌 태백훈이었다. 그가 손짓하자 정자에서 겨냥 준비 중이던 궁수들이 그가 쏜 방향을 따라 쐈다. 탁, 탁, 개중 몇 발이 관통했는지 꽥! 끄엑! 멱따는 소리가 연거푸 이어졌다.

이윽고 시커먼 기운이 허물처럼 벗겨졌다. 드러난 형체는 참으로 흉측했다. 털가죽은 검붉었고 시뻘건 눈알은 툭 튀어나와 사시처럼 양쪽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움직이고 있었다. 발톱과 송곳니는 쇠갈퀴 같았다. 개와 말에서 유래된 이름을 가졌으나 그 어느 쪽에도 가깝지 않은 괴물이었다.

헥헥, 숨을 내뿜는 주둥이에서 피와 침이 뚝뚝 떨어졌다.

“우윽, 웩.”

밑에 깔려 있던 관병이 악취를 참지 못하고 구역질했다. 골을 뒤흔드는 지독한 냄새에 여기저기서 코를 잡았다. 태백훈은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다시 활을 쐈다. 어둠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우아아아악!”

곽현욱이 기합을 지르며 구마에게 뛰어들었다. 그는 드러난 구마의 대가리를 향해 철 몽둥이를 내리꽂았다. 이에 관병들도 합세해 창으로 눈과 머리를 사정없이 찔러 대니 귀신 같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렇게 네 마리가 겨우 쓰러졌으나 여전히 기슭에서 들리는 기척이 바글바글했다.

죽어 넘어진 구마의 시신이 숲 바깥쪽으로 질질 끌려 들어갔다. 동족의 시신을 거둬들이기 무섭게 아작아작 씹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향해 불빛을 비췄을 때는 이미 터럭 하나 남은 구석이 없었다. 단지 낙엽과 흙 사이에 흥건한 핏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구마라기보단 걸신(乞神)이 쫓아온 모양인데.”

곽현욱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먹을 수 있다면 뭐든 먹어 치울 듯한 모습이 지옥의 아귀와 다를 바 없었다.

온갖 산짐승이 사는 북도에서도 굶주린 요수만큼 맹목적이고 포악한 족속은 없었다. 손청준은 복면을 코까지 올려 쓰며 양손에 쥔 칼을 뒤로 향하게 고쳐 잡았다. 그는 빠르게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마치 까마귀처럼 날렵한 활공이었다. 가지에 앉아 주위를 살피던 그가 들고 있던 칼 하나를 던졌다.

어둠 사이로 꾸엑, 하는 짐승의 비명이 터졌다. 칼이 꽂힌 쪽으로 내려온 그가 칼을 잡아 뺀 다음 다시 내리꽂았다. 척수를 가격당한 구마가 피거품을 토하며 발버둥을 쳤다. 뒷발과 꼬리에 걷어차인 관병이 저 멀리 바위까지 튕겨 나갔다. 무시무시한 괴력이었다.

눈발이 거세졌다. 어둑한 사위에 새하얀 눈까지 쏟아지니 좀처럼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뒷줄은 즉시 연기를 피워라!”

태백훈이 명령하자 관병들이 서둘러 모닥불에 젖은 낙엽을 던져 불을 꺼트렸다. 주변으로 금세 그을음 섞인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콜록콜록, 기침이 나올 정도로 짙은 매연이 주변을 덮자 잿빛 안개와 어스름 사이로 희미하게 윤곽이 보였다.

“이놈들, 싹 다 묵사발 내 주마!”

발각된 구마를 향해 곽현욱이 미친놈처럼 웃으며 철 몽둥이를 휘둘렀다. 퍽, 퍽, 살과 뼈가 짓이겨지는 둔탁한 소음이 반복되었다.

아수라장 사이에서 유원은 막둥이를 제 뒤에 숨긴 채 사방을 주시했다. 진을 친 관병들 때문에 당장 뒤쪽까지 침범하진 못하겠지만 아무래도 낌새가 좋지 않았다.

코가 따가울 정도로 역한 냄새도 거슬렸지만 저들의 동태가 불길했다. 단순히 말을 잡아먹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제 동족조차 단숨에 먹어 치울 정도면 무척 굶주렸단 뜻이었다. 이렇게나 굶주렸으면 물불 안 가리고 사람을 잡아먹으려 들 터였다. 지금만 해도 몇 차례 사람을 끌어들이려 시도하지 않았던가.

“아, 아기, 씨, 제, 제가 지, 지, 켜 드…….”

막둥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 옆에서 휙, 휙, 수레 떨리는 소리가 진동했다. 그쪽을 살필 틈도 없이 유원은 막둥이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팍, 땅바닥에 발톱 자국이 남았다. 장도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있던 막둥이가 사색이 되어 바들바들 떨었다.

그 순간, 뜨거운 바람이 솟구치고 삽시간에 커다란 불덩이가 구마를 덮쳤다. 새파란 불꽃은 주변으로 번지지 않고 오로지 단 한 대상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꾸억! 껙! 불에 휩싸인 구마가 펄쩍거리며 불을 끄려 바닥을 굴렀으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후에야 불은 스스로 줄어들더니 연녹수에게 되돌아갔다. 손바닥에 일렁거리던 푸르스름한 도깨비불은 머지않아 그가 들고 있던 붓으로 스며들었다.

“아가, 괜찮니?”

“예,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쪽에만 포진한 줄 알았더니 절벽에도 이미 기어올라 간 모양이야.”

그는 흙먼지로 더러워진 소매를 탈탈 털며 한숨을 쉬었다. 여유롭던 그답지 못하게 조금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사실 서른 마리라 해도 시간을 들이면 전부 잡아들이겠다만, 이대로 계속 시간이 지체될수록 다른 요수들이 피 냄새에 이끌려 끊임없이 들이닥칠 게 분명해.”

“도망치긴 어려울까요.”

“나나 아가 둘 정도 데리고 가는 일이야 어렵지도 않지만… 오십 명 가까이 되는 사람을 데리고 축지(縮地)를 해 본 적은 없어서 말이야.”

축지라 하면 땅을 접어 걷는다는 도사들의 신묘한 도술임은 알고 있었다. 다만 땅을 접어 걷는다 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인 만큼 기력을 크게 써야만 할 터였다. 뛰어난 도사가 여럿이면 모를까. 연녹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인원이었다.

“무엇보다 저것들은 움직임이 아주 빨라. 십 리, 이십 리 움직여 봤자 금세 추격해 올 테고. 독을 쓰자니 어지간한 맹독이 아니고서야 잠으로 해독하니.”

“종친 어른! 남들 바쁜데 뭐 하십니까!”

철 몽둥이를 휘두르던 곽현욱이 그를 향해 소리 질렀다. 쯧, 건방진 놈 같으니. 혀를 찬 연녹수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유원에게 눈짓했다.

“아가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 좋겠다.”

연녹수가 두루마기 자락을 팔락거리며 앞으로 뛰어드는 동안 유원은 막둥이와 함께 관노들을 절벽 쪽으로 피신시켰다.

덤불 사이에 관노들과 함께 몸을 숨긴 유원은 관병들의 동태를 살폈다. 안색이 붉었고 매연과 재를 뿌려 댄 덕에 기침이 끊이질 않았다.

제아무리 훈련받은 유능한 무인들이라 해도 무장으로 무거운 몸으로 장시간 행군을 한 데다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요수를 상대하느라 많이들 지쳐 있었다. 발톱에 팔과 다리를 찢기거나 나무나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기절한 이들도 있었다.

그나마 곽현욱을 비롯한 직속 부하들이 팔팔하게 날뛰고 있었지만, 그들이라 하여 체력이 무한하진 않을 터였다. 연녹수가 말한 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악화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많은 요수를 꽁꽁 묶어 두지 않는 한 달아날 방도도 없어 보였다.

잠시만, 방금 연녹수가 분명 독은 소용이 없다고 했었다. 그 대신 해독하고자 잠을 잔다고도 덧붙였다.

출발할 때 연녹수는 이번 여정에서 지네의 독을 채집하는 일이 주요 목적이라 했다. 독과 약에 해박한 도사인 만큼 채집하려는 맹독 외에도 따로 소지한 독이 있을 터였다.

독을 바른 고깃덩이를 던지면 자연스럽게 미끼가 되리라. 누구한테든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는 곧장 연녹수한테 달려가려 했다.

“사, 사람 살려!”

어느 틈에 이쪽까지 들이닥쳤는지 쉭, 쉭, 구마가 쇳소리를 흘리며 뒤쪽에 서 있었다. 관노들은 꺾은 가지, 돌멩이 등 아무거나 손에 집히는 대로 쥐고서 어떻게든 요수를 저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팍, 고개를 세차게 턴 구마가 돌진하자 혼비백산하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다.

막둥이는 도망칠 틈을 놓치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발이 얼어붙기라도 했는지 도무지 일어설 수 없었다.

“이, 이, 괴물! 저, 저, 저, 저리, 가, 저리, 가!”

겁먹은 막둥이가 장도를 마구 휘두르자 얼떨결에 칼에 빗맞은 구마가 포효하며 박치기를 했다. 들고 있던 장도가 멀리 날아가며 막둥이가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대로 기절했는지 미동조차 없는 막둥이를 향해 흥분한 구마가 뛰어올랐다. 달려온 유원은 앞뒤 따질 겨를 없이 막둥이를 감쌌다.

“흐윽!”

옷자락이 찢기며 어깨에 발톱이 파고드는 감각이 선명했다. 쩝쩝, 입맛을 다신 구마가 아가리를 벌렸다. 피로 물든 송곳니가 시퍼렇게 빛났다.

쩍 벌린 입은 그대로 다물리지 못했다. 섬광과 함께 머리가 반으로 갈라진 구마가 쿵, 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요수 뒤편에는 칼을 빼 든 태백훈이 숨소리 하나 없이 우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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