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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45)화 (45/60)

45화

이튿날, 그들은 동이 트기도 전에 주막을 떠났다.

혹독한 바람에 여기저기서 재채기가 터졌다. 최북단으로 이어지는 산간의 바람은 우수를 지나며 언 땅이 풀리기 시작한 원혜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추위였다. 가지와 뾰족한 바늘잎으로 빽빽한 숲속은 위를 살피기 어려웠고 눈이 켜켜이 쌓인 길은 인적보다 짐승의 자취가 많았다.

“후우, 하.”

몰려드는 잠을 깨려 유원은 수레에 걸터앉아 크게 숨을 골랐다. 목과 코, 숨구멍을 타고 들어오는 공기는 차갑지만 습하진 않았고 고목에서 나는 흙냄새가 강했다. 사람의 기척이라곤 하나도 묻어나지 않은 깨끗한 냄새였다.

“아가, 안색이 별로 안 좋구나.”

말의 속도를 낮춘 연녹수가 대화를 걸었다. 눈가를 손끝으로 문지르던 유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눈에 뭐가 들어가서요.”

“그러니? 내 보기엔 잠을 못 잔 거 같아 보이는데. 눈도 빨갛고.”

“눈을 비벼서, 붉어졌나 봐요.”

차마 연녹수한테 간밤 일까지 구구절절 알리고 싶지 않았다. 눈치 없이 뒤척이다 영감의 잠을 깨우는 바람에 방주인이 나가 버렸고, 혼자 독방에서 날을 꼬박 새웠다. 염치없는 꼴이라 아무한테도 밝히지 않은 사정이었다.

“게다가 저는 편하게 수레나 타고 가는 중이잖아요.”

“짐짝들 사이에 실려 가는 판인데 뭐가 편하단 말이니. 보는 내가 다 멀미가 날 지경이구나.”

입을 소매로 가로막은 연녹수가 눈썹을 찡긋거렸다. 멋쩍게 미소 짓던 유원은 그에게 주려던 술을 떠올리고는 봇짐을 풀어 호리병을 내밀었다.

“저기, 이거 제가 담근 약주인데, 녹수 님께 드리려고 가져왔거든요.”

“세상에, 나한테?”

약주란 말에 화색이 돈 연녹수가 기꺼이 팔을 뻗어 병을 받았다. 뚜껑을 열자 계피와 복숭아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지난번에 주셨던 복숭아를 다 먹긴 아까워서, 누룩을 얻어다 술로 빚었어요. 지게미는 전부 걸러서 너무 달지 않을 거예요.”

“향기만 맡아도 무릉도원 같구나.”

당장이라도 술로 입을 축이고 싶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신 연녹수가 안장에 병을 달았다. 기뻐하는 얼굴을 보니 유원도 뿌듯했다. 역시나 소문대로 도사는 술을 무척 좋아하는 양반들이 맞는 모양이었다.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뭔가를 줘야지.”

“예? 아니에요. 저는 그저 녹수 님이 저번에 주셨던 복숭아로 담갔을 뿐인걸요.”

“모든 도사들은 선물에 선물로 보답한단다. 암묵적인 규율이거든.”

소매에 손을 넣어 뒤적인 그가 내민 것은 검지 길이만 한 약병이었다.

“한 번 정도 쓸 용량이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흠, 색욕 촉진제라고 부르면 좋으려나?”

그 말에 유원이 놀라 약병을 떨어트릴 뻔했다. 연녹수가 소리 내어 아하하, 청량한 웃음을 터트렸다.

“현호색과 비단삼을 넣은 진통제야. 뼈를 깎아 내는 듯한 통증마저도 잊게 할 만큼 강한 효과가 있지.”

진통제란 말에 비로소 유원이 안심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연녹수가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종종 양기가 강한 사람한테는 강렬한 색욕을 자극하기도 하니, 틀린 말만은 아니란다.”

붉게 물들인 눈꼬리가 야살스럽게 찡긋거렸다.

멀리 날아갔던 수리가 이틀 만에 주인 곁으로 돌아왔다. 말에서 내린 태백훈은 수리가 물고 온 동물 사체를 살폈다. 머리가 반쯤 파먹힌 쇠족제비로, 몸집은 작아도 엄연히 맹수였다. 근처에 이보다 몸집이 큰 포식자가 서식한단 의미인데 잇자국을 보면 호랑이보단 입아귀가 작은 짐승이었다.

“늑대거나 아니면 불개 무리겠군요.”

잇자국을 확인한 손청준이 의견을 올렸다. 태백훈도 같은 짐작이었다. 늑대는 사람이 여럿 있으면 먼저 덤벼들지 않았고, 불개는 야행성으로 불빛을 두려워했다. 그러니 흩어지지 않고 일렬종대를 유지하면 습격받을 일은 없을 터였다.

행군이 이어졌다. 산맥과 맞닿은 산간 지역이라 민가가 없다 보니 그나마 안전한 곳까지 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해가 지기도 전에 숲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문득 무언가를 발견한 곽현욱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영감, 저쪽에 정자가 보입니다.”

그의 말대로 저 멀리 보이는 절벽 아래에 낡은 정자 하나가 있었다. 코와 뺨에 닿는 바람 줄기가 습해졌음을 느낀 태백훈은 상공으로 수리를 날려 보내며 말했다.

“바람이 탁한 걸 보니 눈이 내릴 것 같구나. 더 어두워지기 전에 위쪽에 자리 잡아야겠어.”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곽현욱이 태백훈의 명령을 반복해 외치며 크게 손짓했다. 수행진을 필두로 관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앞서가는 말과 관병의 행진을 뒤따라 말수레가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언덕 아래 지어진 정자는 십수 년 가까이 방치되었는지 기왓장이 남은 부분이 없었고 마룻바닥은 낙엽과 흙먼지투성이였다. 그들은 정자 주변에 수레를 빙 둘러 세운 다음 나무에 줄을 달아 막사를 쳤다. 순식간에 야영지가 준비되었다.

기름을 충분히 먹인 횃불 앞에 선 연녹수가 손바닥을 향해 입김을 후 불었다. 불기 하나 없던 횃불에서 금세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니 불이 확 붙으며 어둡던 사위가 밝아졌다.

신통한 기술에 너도나도 도사님, 도사님, 하며 여기 검불에 불을 붙여 달라, 저기 횃불에 불을 붙여 달라 아우성이었다.

“이놈들아, 내가 무슨 부싯돌인 줄 아느냐?”

졸지에 횃불잡이 취급을 받자 연녹수가 기분 나쁘다는 듯 투덜거렸다. 길쭉하기가 사람만 한 철 몽둥이를 망치처럼 탕탕 휘두르며 천막을 치던 곽현욱이 킬킬거렸다.

“에이, 그래도 불 피우는 재주는 부싯돌보단 확연히 뛰어나신데요.”

“저, 건방진 놈 나불거리는 소리 한 번 기가 막히는구나!”

눈을 세모꼴로 뜬 연녹수가 씩씩거렸다. 또, 둘이서 한바탕이로군. 이를 지켜보며 멋쩍은 웃음을 흘린 손청준이 관병들 사이를 지나쳐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노들이 수레에 실은 침낭 등을 막사 안쪽으로 옮기는 가운데 유원은 그들을 도와 바삐 물건을 내리고 있었다. “자, 여기요.” 하며 내미는 침낭 더미를 거뜬히 받아 드는 손길에 유원이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몸은 어떠신지요?”

“청준 나리!”

그는 눈에 드러날 정도로 반가운 얼굴이었다. 까악! 머리 위로 휙 내려온 까마귀도 덩달아 유원이 있는 수레로 내려왔다. 다리에 남은 흉터를 발견한 유원은 지난번에 구해 준 그 까마귀임을 알아봤다.

이리 오라 손을 내미니 까마귀가 자연스레 손가락 위로 깡충 올라탔다. 날려 보낸 까마귀 무리 중 이탈한 까마귀를 본 손청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그 아이는 저보단 아기씨를 더 잘 따르는 듯합니다.”

“원래 까마귀들이 사람을 잘 따르나요?”

“하하, 워낙에 영리한 새들이라 사람을 알아보기도 한다지만 아무나 따르지 않습니다.”

부리를 벌린 까마귀가 마치 애교를 부리듯 유원의 손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까마귀와 놀아 주는 유원을 바라보던 손청준이 넌지시 말했다.

“이렇게 친어미처럼 따르니, 요 어린 까마귀에게 이름이라도 붙여 주면 어떠신지요.”

“이름을요?”

“예, 사물이든 동물이든 이름을 붙여 주고 대하는 애정에는 비할 바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나리의 까마귀인데요.”

“자진해서 아기씨한테 날아왔으니 아기씨께 동무로 삼아 달라 하는 모양입니다.”

유원은 까마귀의 깃털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뻣뻣한 꽁지가 부스러진 숯 같았다.

“목탄의 끝 자를 따서 탄(炭)이라 부르고 싶어요.”

“탄이라, 좋은 이름이군요.”

탄아, 탄아, 하고 반복해서 부르자 까마귀가 제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흔들다 깍, 하고 대답했다. 마치 아이가 첫 글자를 배운 듯해 마냥 기쁘고 사랑스러워 탄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던 때였다.

쉭! 상공에서 내리꽂는 거센 바람에 말이 앞발로 땅을 긁으며 울자 놀란 탄이 푸드덕 반대편 나무로 도망쳤다. 놀라기는 유원도 매한가지였다.

숨을 진정시킨 유원은 머리 위쪽을 올려다봤다. 날개는 검고 머리부터 몸통까지 고사리 같은 갈색빛을 띤 수리 한 마리가 나무에 앉아 태연히 커다란 발톱으로 깃을 골랐다.

잠시 날개를 훑던 새가 고개를 돌려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흡사 유원을 노려보는 듯한 기세에 절로 심장이 쿵쿵 떨렸다. 갑자기 이 수리가 왜 여기로 날아왔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휘익, 휘익,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발돋움하며 크게 날갯짓한 수리가 정자 위에 서 있던 태백훈에게 날아갔다. 마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귀환하는 듯 사뿐한 날갯짓이었다.

“기특하기도 하지.”

팔 위에 앉은 수리의 턱을 슬슬 긁어 주던 그가 문득 유원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늘 무심한 기색이던 눈동자가 묘하게 새침한 빛이었다.

* * *

불을 가운데 두고 펼친 막사 안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강풍에 시달린 관병들이 코를 훌쩍거리는가 하면 기침이며 재채기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이왕 불도 있으니 끓이는 물에 생강과 계피, 탱자를 넣으면 좋으련만. 나무잔을 만지작거리던 유원은 더운물을 홀짝거렸다.

인근에서 캐 온 깨끗한 얼음은 아무 맛도 없는 맹물이었다. 아직 산기슭이니 좀 더 위로 올라가면 약수가 있기도 할 테지만 그보다는 긴 추위가 문제였다.

그나마 불개 가죽을 덧댄 방한복 덕에 한기를 버티는 셈이었다. 다만 제아무리 따뜻한 열기를 내뿜는다는 가죽이라도 장시간 추위에 노출되려니 손발이 차가워졌다.

매년 봄 사냥 때마다 태백훈은 이런 행군을 해 왔을 터였다. 한숨 돌리기도 힘든 바깥에서 비바람을 맞으면서. 불가에서 시선을 거둔 유원이 반대편을 흘끔 살폈다. 한창 논의 중인 막사 안에서 여러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아까 연녹수가 슬쩍 와서 알려 주기로는 당분간 이런 생활을 열흘은 해야 할지도 모른다 했다. 크게는 봄 사냥이라고는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그들이 노리는 목표는 사슴이나 호랑이가 아닌 요수였다.

특히, 그 요수들 중에서도 가장 성가신 목표물이라 하면 단연 식인 습성을 가진 ‘조마구’라는 요수였다.

재작년, 조마구 무리를 대다수 잡아들였으나 딱 한 마리가 끈질기게 살아남아 북방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그리하여 일여 년 동안 추격대를 풀고, 산지기를 수소문해 끈질기게 추격한 끝에 숨어 지내는 곳을 알아냈으니 다름 아닌 현운산 쪽이라 했다. 이번에야말로 숨통을 끊겠다며 작정하고 나선 만큼 곧장 민가로 되돌아가진 않을 듯했다.

“에, 에, 에취이!”

검불을 불에 집어넣던 막둥이가 크게 재채기했다. 맑은 콧물을 훌쩍거리는 막둥이를 살핀 유원이 그를 옆으로 당겨 커다란 외투로 어깨를 감쌌다. 막둥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괘, 괘애, 괜찮으, 은데.”

“괜찮기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으면서.”

억지로 앉혀 놓고 불을 쬐게 하니 덜덜거리던 몸이 금세 노곤해졌는지 막둥이는 두 눈을 껌뻑거렸다. 유원은 어린 그의 등을 슬슬 쓰다듬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차가운 공기를 타고 입김이 하얗게 부서졌다.

그때였다. 뭔가 묘한 냄새가 났다. 굳이 비유하자면 생선 삭힌 것과 비슷한 악취가 저 아래쪽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막사 안쪽에 누워 있던 관병 하나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더니 옆 사람을 때렸다.

“이봐, 또 자네가 방귀 뀌었지?”

“나 아닐세! 생트집 잡지 마시게나. 자네야말로 며칠 내리 안 씻어서 몸에서 나는 구린내를 착각한 것 아닌가?”

두 사내가 서로를 탓하며 티격태격 말다툼했다. 저들도 뭔가 독한 냄새를 맡았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결단코 사람의 악취가 아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유원이 창칼을 정돈하는 관병에게 다가갔다.

“송구합니다만 나리,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습니다. 혹시 아래쪽을 한 번 봐 달라 청할 수 있을지요?”

“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시는지요? 아까 수색병 넷이 위아래를 모두 살피고 왔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뭔가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요.”

“난 또 뭔 그림자라도 본 줄 알았네. 사내놈들만 모인 자리인데 여인네들처럼 향긋한 냄새가 날 리가요.”

퉁명스럽게 대꾸한 관병이 유원을 위아래로 훑었다. 종친이라는 도사 때문에 사냥길에 올랐다더니, 얼굴만 봐도 분내가 풀풀 나게 생긴 곱상한 도련님께서 사내들 사이에 있노라니 호들갑 떠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따 한 식경 뒤에 다시 살펴볼 테니 괜한 참견…….”

“웬 소란이냐.”

엄한 목소리에 관병이 곧장 몸을 돌려 예를 갖췄다. 회의를 막 마쳤는지 막사에서 태백훈을 비롯한 수행진과 연녹수가 함께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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