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점심을 막 들려던 중에 문지기에게서 기별이 왔다. 청사에서 온 심부름꾼의 전갈이었다.
그래도 세 번째 오는 길이라고 전보다 훨씬 익숙했다. 측문을 통해 청사 안으로 들어가자 관노들이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수레에 가득 실린 자루는 쌀과 콩 등 곡식류였다.
“어서 오세요. 유원 아기씨.”
청사 건너편에서 아전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황우경이 유원을 반갑게 맞았다. 그를 향해 공손하게 눈인사로 화답한 유원이 입을 열었다.
“나리께서 저를 찾으셨다면서요?”
“하하, 사실은 제가 아니라, 다른 이가 아기씨를 찾으셨습니다.”
다른 이? 의아함도 잠시, 등 뒤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에 유원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선비가 뒷짐 진 채 서 있었다.
“안녕?”
“…녹수 님?”
뜻밖의 인물에 놀란 유원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숲에서 봤던 이후로 스무날만의 재회였다.
“저를 찾는다 하신 분이 녹수 님이셨어요?”
“응. 귀찮게 해서 미안하구나. 내가 직접 찾아가겠다고 했는데 부윤께서 굳이 이쪽으로 부르는 편이 낫다, 하니 별수 없지 않겠니.”
유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연녹수를 올려다봤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직접 찾아올 생각까지 했을까. 단순히 안부나 물으려 한 건가.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사뭇 즐겁다는 듯 생글생글 웃던 연녹수가 유원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아가가 내 조수가 되어 주면 좋겠구나.”
* * *
주요 출하품인 은맥을 비롯해 담비나 여우 등의 가죽류를 주로 공납품으로 올리는 원경도에서 골치 아픈 부분은 첫째도, 둘째도 식량이었다.
더운 날은 한철이고 눈과 서리가 사철인 땅은 아무리 개간해도 비옥해지지 않으니 쌀은 물론이고 잡곡조차 키우기 쉽지 않았다. 하여 도내 식량은 전적으로 남쪽 곡창 지대에 의존하는 중이었다.
풍작을 맞은 해에는 전국에 쌀 공급량이 늘어나면서 원경도 같은 북단에도 올라오는 쌀이 넉넉한 편이긴 하나, 흉년일 때는 어느 지역보다도 극심한 보릿고개를 겪곤 했다.
이에 태백훈은 매년 춘분마다 적정량의 농작물을 대여해 주거나 구황 식물의 씨를 나눠 주도록 도청 곳간을 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눈속임으로 쌀겨를 빌려주고 제값을 되받는 호족들이 성한 탓에 굶주림에 시달리는 자들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이치로는 호족들을 강하게 처벌해야 함이 옳겠으나 실지로는 자치권을 토대로 세를 키워 온 호족들을 함부로 건드리기에는 도내는 물론이고 다른 지방까지 어지러워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발령 초년에 원경도백이 고안한 최선책이란, 언 땅에서도 곡식을 기를 수 있는 새로운 재배 농법이었다.
“남도에서 올라온 관리의 말로는 이곳 땅의 건조함을 봤을 땐 쌀을 키우기는 힘들 수 있으나 서리만 덜 내린다면 보리와 서곡은 충분히 자랄 만한 토양이라 합니다. 이미 원경도 남쪽 지대에는 기장과 보리밭이 있지만 영감께서는 가능하다면 전답을 넓히고 싶어 하시거든요.”
“하여간 욕심이 지나치기도 하지.”
“하하, 유사시에 쓰여야 하는 군량을 축적하려면 가까운 지역에서 식량이 조달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여기서 가장 가까운 쌀 재배지조차 천 리 넘게 떨어져 있어 항구를 통해 들어와도 한 달은 걸리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매년 여름이면 위쪽 이민족이 유역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화적질을 시도하니 철저하게 대비해야겠다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연녹수 어른께서 응해 주심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어쩌겠니. 매일 같이 부윤께서 보낸 심부름꾼들이 한 번만 와 달라면서 조르고 보채는 꼴이 영 성가시잖아.”
귀찮음이 역력한 얼굴로 한숨을 내쉰 연녹수가 유원을 돌아봤다.
“아무튼 내가 고안한 방법은 강한 추위에도 버틸 수 있는 약이란다.”
“약이라니요?”
“나는 농부가 아니니 재배법을 직접 구안할 수는 없긴 하지만 약을 만드는 데는 전문가거든. 그런데 혼자 방에 틀어박혀 우중충하게 연구하긴 싫고, 그래서 유원이 네가 내 밑 조수로 들어오면 어떨까 하는 묘안이 떠올랐지. 옆에서 거들어 주면서 말동무도 해 주면 금상첨화잖아.”
“송구하오나 저는 관아 소속이 아닙니다.”
“나 또한 여기 사람이 아닌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니. 게다가 여기 공방 아전들 중엔 딱 들어맞는 인물도 없는걸.”
“하지만 저는 글도 못 배웠고, 간단한 언문 글자 몇 개만 겨우 읽는 게 고작인걸요. 깜냥이 못 되는데 어찌 조수로 삼으시려고요.”
스스로 비난하려니 못내 뼈아팠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관청과 관련된 연구라면 저같이 배움이 모자란 자를 쓰기보단 잡과 합격자들 중 지원자를 모집해 쓰는 편이 훨씬 나을 터였다. 턱에 맨 갓끈을 쓰다듬던 연녹수가 넌지시 물었다.
“아가. 셈은 할 줄 아니? 수를 더하고 빼는 법 말이야.”
“셈이라면 아주 조금은….”
“약재를 다루는 방법이나 보관법은?”
“자주 쓰이는 약초라면 알지만 모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전국에서 나는 향약본초만 해도 수백을 넘고 그중 의방서에 기록된 생약은 이백여든일곱 가지인데. 그렇다면 겸사겸사 글도 같이 배우는 편이 좋겠구나.”
“예? 그, 글을 배운다니요?”
“그래야 더욱 너를 잘 써먹지 않겠니?”
태평하다 못해 자신만만한 태도에 유원은 말문을 잃었다. 지난번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막무가내였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황우경이 미소 지으며 대신 말을 이었다.
“연녹수 어른께서 말하고자 하는 뜻은 이해하겠지만 그전에 도백 영감에게 먼저 허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게 생약 연구를 간여시키는 대신 아랫사람 정도는 편히 데려와 써도 된다 했다면서?”
“그야 관청 밖의 장인들을 데려다 쓰시는 정도로 생각했으니까요. 여기 계신 유원 아기씨는 엄연히 영감 쪽 사람이시고요.”
“그럼 비밀로 하면 되지 않니?”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몇 달이 걸릴 사안인데 출입 기록을 매번 숨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중죄를 저지르실 바에는 영감께 귀띔이라도 하시는 편이 낫지요.”
공손하면서도 차분한 권유에 연녹수도 차마 따지지 못하겠는지 붉게 칠한 입술만 삐죽거렸다. 손톱을 잘근거리던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놈의 영감은 어디에 있더냐?”
병방에서 보고서를 읽고 있던 태백훈은 때아닌 손님들을 맞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많고 많은 공방 관원들을 두고 굳이 민간인을 조수로 데려다 쓰겠다는 건가.”
“굳이 데려다 쓰기는. 내가 맡은 임무가 얼마나 막중하고 까다로운지 알면서? 이름도 없는 독초 백여 가지에 요수의 심장과 허파도 써 봐야 하니, 그에 걸맞게 영리한 조수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런 점에서 유원이가 제격이지.”
“어느 면에서?”
“몰라서 묻는가? 무려 색도 향도 없는 독을 분간할 수 있는 신묘한 재능을 가지고 있잖아. 시험적으로 만든 생약이 극약일지 아닐지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 말에 태백훈의 시선이 옆에 서 있던 유원에게 향했다. 따지는 듯한 눈빛에 유원은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저 또한 연녹수의 손에 마지못해 끌려왔을 뿐이었지만 태백훈이 그런 사정까지 헤아릴 리 만무했다. 태백훈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럴 바엔 감옥서(監獄署)에서 죽는 날만 기다리는 사형수들한테 써 보시는 편이 빠르겠군.”
“잔혹하기는!”
“노략질과 강음죄를 골백번도 저지른 몰염치한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어쨌든 생약을 만들려면 조수는 필요하네. 난 홍유원 저 아이를 데려다 쓸 것이니 그리 알게.”
“나 역시 못 들은 말로 하겠네.”
태백훈이 무심하게 손을 휘휘 저었다. 더는 대화하기 싫다는 의미가 담긴 강경한 손짓이었다. 그를 빤히 노려보던 연녹수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따지고 보면 유원이는 네 밑 사람도 아니잖느냐. 안채에 들이지도 않은 데다 정실로 들였다는 보고도 올리지 않았다면서? 그런데도 어찌 네 사람이라?”
“내 집에서 기거하는 사람과 관계된 일이니 당연히 내 권한이지.”
“허! 그런 식으로 유원이를 한낱 소유물 따위로 취급하려고?”
집중하던 보고서를 내려 둔 태백훈이 고개를 들었다. 눈썹과 눈을 한 방향으로 찌푸린 얼굴에서 짜증과 분노가 묻어났다. 당장이라도 일갈할 기세였으나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 끝에 태백훈이 말을 꺼냈다.
“……어차피 내 의사와 무관하게 저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 않나.”
“다시 말해, 유원이가 원하면 태 영감도 더는 군말하지 않겠다는 뜻이로군.”
씩 웃은 연녹수가 옆에 선 유원을 돌아봤다. 태백훈 또한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유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몸에 받은 시선에 잠시 망설이던 유원이 조심스럽게 제 의사를 말했다.
“…비록 까막눈에 배운 것 하나 없어 변변치 않은 재주라 도움은 안 될지도 모르지만, 만일 영감께서 허락하신다면 연녹수 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아보고 싶습니다.”
“왜?”
태백훈이 따지듯이 되물었다. 주저하던 유원이 재차 말을 이었다.
“……실은 옥양에 남아 계신 어머니께서 몇 해 전부터 난병을 앓고 계십니다. 온갖 약을 써 보고 용하다는 의원께 청해도 해답을 얻지 못했고요. 사욕임을 알지만 녹수 님께서 생약 연구를 이야기하셨을 때, 어쩌면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혜로 건너오기 전에 일했던 약방에서 들은 말이 있었다. 약도 듣지 않던 폐병이었는데 강길의 심장을 구해 먹였더니 나았다더라. 북도 사람들은 먹을 짐승마저 없어 요수를 사냥해다 잡아먹는데 그 덕분에 척박한 땅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더라.
관청에서 허가하지 않은 섭식은 불법인 만큼 요수의 장기는 뒷거래로만 사고파는데, 그 값이 터무니없었다. 그렇다 해서 유원이 직접 북도 요수를 사냥하기란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연녹수는 양반이고 도사였다. 아마 의방서와 다양한 약학서도 많이 소장하고 있으리라. 그러니 옆에서 지내다 보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할 방도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나중에 여기를 떠나게 되는 날, 적어도 먹고살 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잡과를 응시할 정도는 못 되겠지만 작은 고을의 공방에서 일꾼으로 들어가기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떠나게 되는 날이라니. 머릿속을 스친 한 구절에 괜히 입속이 씁쓸해졌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태백훈을 거슬리게 만들 일도 줄어들 터였다. 지금 그의 집에서 지내면서 딱히 일손으로서 역할이 막중하지도 않았고, 남아도는 군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태백훈을 위해서라도 연녹수 편에서 있는 쪽이 나았다.
“영감께는 절대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순간 유원의 눈에 태백훈의 표정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맞은편에 앉아 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태백훈의 낯빛이 싸늘했다. 마치 불쾌감을 억누르기라도 하듯이 못마땅하면서도 짜증이 역력한 눈이었다.
이윽고 태백훈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방 밖에서 기별이 들렸다. 병방 소속 경비대장이 찾아왔단 소리에 곧장 일어난 태백훈은 인사말도 없이 그대로 집무방을 나가 버렸다.
“하여간 아둔하기는.”
활짝 열려 있는 문을 돌아본 연녹수가 혀를 쯧쯧 찼다. 유원은 차마 돌아볼 수 없어 앞의 빈 보료만 쳐다봤다. 마음대로 하라니. 분명 허락의 표시인데도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가슴이 자꾸 불안스럽게 두근거렸다. 큰 실언을 한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