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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41)화 (41/60)

41화

태백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담배합에 새겨진 섬세한 양각도 그렇고, 마치 물건마다 표식처럼 일부러 이무기 문양을 남겨 두는 느낌이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최근 변사한 송산의 향리 또한 그 방물장수한테 담배합을 사들였다가 봉변당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이유일까. 방물장수가 노리는 대상이 누구인지, 어떤 이유로 그러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때 탐관오리를 심판하겠다며 양반가를 습격하고 죽이는 도적들만 하더라도 목표가 명확했다. 하지만 이 방물장수의 경우에는 불특정 다수에게 제 물건을 팔아 사람을 해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생원의 장남을 좀 만나 봐야겠군. 어디 있는 벽촌이지?”

“소인이 갔던 고을은 여기서 동쪽 백 리 정도 떨어진 의주라는 곳입니다만, 아마 지금 가 보신다 해도 누구인지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찾을 수 없다?”

“실은 소인 또한 그 소문을 듣고 무척 궁금하여 인근 고을의 생원댁은 죄다 조사해 봤으나 병든 장남에 대한 이야기는 찾을 수가 없었답니다. 진즉 그 장남을 어디 머나먼 별저로 보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저 크게 앓아누웠던 것을 아랫놈들이 푸념하다 와전된 말일지도 모르지요.”

“흐음…. 그런데도 나한테 이것을 정보로 제공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단 뜻이로군.”

“과연 영민하십니다.”

손뼉을 친 서미현이 자리로 돌아가더니 대뜸 휴대용 먹과 붓을 꺼냈다. 창에 길게 늘어트린 면주(綿紬)를 찢어 바닥에 펼친 다음 소매를 걷어붙이고서 그 위를 붓으로 마구 휘갈기기 시작했다.

정적이 흐르는 방 안에서 붓과 천이 사각사각 맞물리는 거친 소리만이 이어졌다. 이윽고 크게 숨을 내쉰 서미현이 명주를 들어 보였다.

“비록 소인이 미거하긴 하나 제 업과 상단을 아끼는 만큼, 그런 말도 안 되는 사기를 치는 자가 곱게 보이진 않더군요. 대체 어디서 그런 소문이 나고,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하여 밑에 놈들을 시켜 비슷한 소문은 죄다 모았었습니다. 혹자는 구미호라고도 하고, 어디 점쟁이는 도깨비라고도 하는데, 그자가 나타나는 때와 장소, 심지어 외모와 옷차림까지 달랐으나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더군요.”

태백훈은 면주에 그려진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아무 칠도 하지 않은 소복에 검은 장옷을 입은, 사내인지 여인인지 모를 인물. 요사스럽게 묘사된 이목구비만으로도 상당히 꺼림칙했으나 그의 이목을 끄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방물장수가 봉사란 말인가?”

“앞을 못 보는지 늘 눈을 감고 있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리고 자개로 장식한 검은 쥘부채를 들고 다니기도 한답니다.”

한 해의 대부분이 동절(冬節)인 원경도에선 부채의 쓰임새는 기껏해야 탕약을 달일 때 불을 조절하는 용도였다. 이 엄동설한에 장님이 지팡이도 아닌 쥘부채를 들고 다닌다니, 확실히 눈에 뜨일 만한 특징이었다.

“이만하면 소인의 정보가 조금은 도움이 되었는지요?”

“충분히. 품값은 행수 쪽에 말해 남겨 두고 가겠네.”

“그럼 이 그림 또한 가져가시지요. 소인이 영감과 합리적인 관계가 된 만큼, 앞으로 큰 뜻에는 돕겠다는 약조입니다.”

태백훈은 서미현이 건넨 면주를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품 안쪽에 곱게 접어 넣었다. 외투 자락을 정돈하는 태백훈을 지켜보던 서미현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무례한 질문임을 알고 여쭙는 말입니다만, 안주인으로 오신 분께서 좀 특이하시다지요?”

“…무례함을 알면서 물었다면 내가 대답하지 않을 것도 잘 알겠군.”

“소인이 궁금한 부분은 참지 못하거든요. 안주인께서 보기 드문 색의 눈을 가졌다던데 정녕 그렇습니까?”

은근한 물음에 태백훈은 뒤를 돌아 서미현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정보를 사고파는 상인이니 만나는 자들은 전부 고객이되 그녀의 요긴한 정보거리이기도 할 터였다. 또한 지금 그녀가 물어보는 말은 확증을 받으려는 의도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 덕에 오히려 태백훈은 잊고 있었던 궁금증을 떠올릴 수 있었다.

“……도방께선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독을 감각으로 알아내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는가?”

“독을 감각으로 알아낸다고요?”

“무색의 독에서도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거나, 무향인데도 악취 비슷한 냄새를 맡는다거나.”

“신통방통하다는 도사도 흉내 못 낼 재주가 아닙니까. 설마 그분께서는 은으로 만든 불상이라도 되신다던가요? 하하하!”

말도 안 된다는 듯 크게 웃는 서미현을 향해 태백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조차 여전히 믿기지 않는데 남이 듣기엔 얼마나 억지스러운 소리겠는가.

역시, 그때 홍유원이 한 말은 그저 우연을 과장되게 포장한 허풍에 불과한 것이었다.

문을 열어젖힌 태백훈이 사람을 부르려 하는 찰나였다. 서미현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들은 바가 있긴 하지요.”

말에 뜸을 들이는 그녀의 얼굴이 아까와 사뭇 달랐다. 다소 조심스러운 눈빛이었다.

“소인이 어릴 적에 지병이 있어 저기 남도에 있는 외갓집에서 요양살이를 했습니다. 외할머니께서 아픈 저를 재우시면서 종종 내륙에서 멀지도, 아주 가깝지도 않은 한 이름 없는 남쪽 섬에 대해 들려주시곤 했죠. 뱃길로 백 리 넘게 떨어진 그 섬은 옥황상제께서 세상을 둘러보실 때 휴양지로 삼게 된 보금자리인데, 그곳에 있던 한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인과 상제가 정을 통하여 수태하기에 이르자 봉조가 내려와 서왕모의 세 가지 축복을 전해 줬답니다. 비록 여인의 핏줄을 받아 태어나는 아이들은 모두 딸들이겠으나 만물에게 사랑받을 정도로 아름다울 것이며, 만 번의 덕을 행할 능력을 얻을 것이며, 만고불변으로 영검하리라고.”

옥황상제의 핏줄이라느니, 봉조의 축복을 받은 딸이라느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설화에 태백훈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서미현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미현이 말을 이었다.

“사실이야 어떻든 그 섬의 딸들은 죽어 가는 자도 살릴 만큼 아주 대단한 치유 능력을 갖췄다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떤 이름 모를 독이어도 쉽게 알아봄은 물론, 정화와 해독에도 능했다더군요.”

“자네 말인즉, 그들이라면 독을 단지 감각으로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

“어쩌면요.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미 백여 년 전에 멸족했다고 합니다. 세 가지 축복 중 하나인 만고불변한다는 말은 이뤄지지 못한 셈이죠. 아마 그들도 여인의 몸으로선 세상 살기가 퍽 고단했던 모양입니다.”

쓴웃음을 삼킨 서미현이 담뱃대의 불씨를 꺼트렸다.

“그건 그렇고, 독을 알아맞히는 신통한 재주라니. 대체 어떤 분이신지 소인도 좀 보고 싶군요. 영감께서 곁에 두신 사람 중 한 분이시려나요?”

“글쎄, 나 또한 은연중에 들은 말이라 실로 존재할지 궁금했거든.”

“그렇습니까? 참으로 아쉽네요.”

눈을 갸름하게 휘어 웃는 서미현을 바라보던 태백훈은 그대로 별실을 나섰다. 인기척 하나 없는 복도를 지나는 동안 서미현의 말이 뇌리를 맴돌았다.

만물에게 사랑받는 아름다움, 만 번의 덕을 수행할 능력, 만고불변의 영검함.

“……한 번에 읊기도 어려운 배경이로군.”

짧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코웃음을 흘렸다. 가히 득도한 선인들조차 시기할 만한 능력이었으나 전해져 내려오는 말들이란 과장되고 부풀려지기 마련이었다. 만약 그런 섬이 있었다면 진즉 실록에도 남겨져 있었을 테고, 역병 창궐 또한 염려할 필요 없었으리라.

그러나 여태 섬에 대해서도, 봉조의 축복을 받은 여인들에 대해서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다. 게다가 그 핏줄의 후예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런 신비로운 능력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그런 이야기가 내려오는 데에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가령 완전히 같진 않아도 그 여인들과 유사한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던가. 하여 저런 말을 구전으로 퍼트리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손청준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 홍유원의 친어머니는 앞 못 보는 봉사라 했다. 그를 가까이 아는 이가 없으나 눈이 먼지는 꽤 오래된 듯했다.

감각 하나가 상실되면 다른 부분이 발달하기 마련이다. 팔 한쪽을 잃었어도 반대 팔이 장사처럼 힘이 센 사람들의 경우가 그랬다. 그 말도 안 되는 재주는 눈먼 어머니한테 배웠다고 했으니, 어머니를 흉내 낸 짓이 우연히 들어맞았을지도 몰랐다.

홍유원에 대해서 듣게 된 이야기는 비단 어머니에 대한 배경으로 그치지 않았다. 다섯 살 때까지 산속의 작은 절에서 자랐었고 이후 상경하면서 생부(生父)인 홍세환 슬하로 들어갔다는 듯했다.

출신조차 불확실한 여인에게서 나온 혼외자라 본집에서 받아 줄 명분은 없었고 홍세환한테 음식과 돈을 조금씩 받는 대신 별관에서 따로 지냈다는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연고를 직접 발라 주면서 더듬어 만져 본 홍유원의 두 손은 곱게 자란 느낌과 거리가 멀었다. 곳곳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상처도 많았다. 먹과 붓에 길이 든 손이 아니라 도끼나 낫자루 등을 다루는데 익숙한 손바닥이었다.

곱게 자라 물정 하나 모르는 도련님인가 했는데 집안의 골칫거리를 올려 보낸 셈이었다. 혼사를 결코 무르지 못하리라고 확신했을 테니 혼외자를 양자로 꾸며 들여보냈겠지.

옥양 사대부들의 의중을 알면서도 별수 없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곱씹을수록 기가 찼다. 그런 억지스러운 혼사에 꼭두각시처럼 장단 맞춰 준 홍유원에게도 분명 책임이 있었다.

쪽방살이, 종살이. 전부 그가 자처한 일이었다. 멀리 가겠다고 하면 돈 한 푼 못 쥐여 줄까. 그마저도 거부하며 버티는 치를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작정하고 쫓아내려면 얼마든지 쫓아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굶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났고, 아픈 곳을 숨기는 태도도 짜증이 났다.

굶주려 죽은 동생이 자꾸만 떠오른 탓이다. 어린 누이의 울음 맺힌 눈동자와 닮은 까닭에, 애달프게 보였음이 분명했다.

태백훈은 여전히 홍유원이 성가셨다. 그러니 이 모든 혼란한 감정은 단지 동정심에 불과했다. 앙상한 몰골보다는 잘 먹여 둔 모습이 보기에 나을 테고, 헐벗은 모습은 보는 이도 추우니 덥게 입힘이 마땅했다.

그런다고 해서 연정(戀情)이 생길 리도 없으니까 말이다.

멈추어 있던 그의 눈앞에 얇은 눈발이 흩날리는 밤 풍경이 비쳤다. 태백훈은 손을 내밀어 눈발을 움켜쥐었다. 부서진 달의 비늘 같은 눈송이는 차갑고도 보드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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