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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39)화 (39/60)

39화

사랑채에는 여러 칸의 방이 있다. 가장 바깥방은 외실로, 태백훈이 낮 동안 손님을 맞거나 술이나 식사를 드는 곳이었다. 그 옆의 방은 서책을 읽도록 마련된 서재이며 그 외 몇몇 방은 손님이 쓰는 방이었다.

복도를 지나 가장 안쪽 방은 집안의 큰 어른들이 쓰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태백훈의 자잘한 시중을 드는 동안 외실은 들어가 본 적은 있어도 침방은 들어가지 않았다. 청소조차 집사들이 맡는 곳이었다.

“여기는… 영감의 침소이지 않습니까.”

의아함과 당혹스러움이 섞인 눈빛이 태백훈을 향했다. 그는 보고도 모르냐는 듯한 표정으로 유원을 올려다봤다.

“어제 보니 환자가 잘 만한 곳은 못 되더군요. 그런 곳에서 주무시다간 없던 병도 골병이 되겠다 싶어 쓰지 말라 했습니다.”

“그럼, 다른 작은 방을 내주시면 될 텐데, 어찌 이 방으로 오라 하셨어요.”

침방 가운데에 병풍을 두고 이불 두 채가 각각 놓인 풍경이 참으로 기이했다. 방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준비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공교롭게도 옆의 손님방은 만일을 대비해서 비워 둬야 하고, 그렇다고 외실에서 그대를 재울 수도 없고. 안채를 내어 드리자니 그대의 아비가 기뻐할 일이라 싫고.”

“…….”

“그나마 행랑의 큰 방 정도가 있겠는데, 김 집사더러 행랑방을 비우라고 하긴 좀 그렇잖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같은 침소를 쓰자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뒤로 물러난 유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행랑에 가서 자겠습니다.”

“행랑 어디서?”

“어디든… 잘 곳 정도는 있겠지요.”

“궁상떨지 마시고 시키는 대로 이리 들어오기나 하세요.”

미간을 좁힌 태백훈이 다그치듯 말했다. 궁상이란 말에 쭈뼛거리던 유원은 품에 안고 있던 옷짐을 꽉 움켜잡았다. 슬그머니 문지방을 넘어오자 태백훈이 하품을 했다.

“기다리다 날 새겠습니다.”

“그래도, 문 앞에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요.”

“문지기가 밤낮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키는 사람보다야 내 귀가 더 믿음직스럽고요.”

“그럼 불은요? 불이 꺼지면 분명 추우실 텐데.”

“날도 별로 춥지 않고, 무엇보다 이 방은 웃풍이 심하지 않아 화로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나하나 대꾸하던 태백훈이 마뜩잖다는 눈빛으로 유원을 올려다봤다.

“설마 그런 팔로 어설프게 뭔가를 할 생각이셨습니까?”

“…….”

“당장 물 한 잔 떠오라고 해도 굼벵이처럼 느려터지실 마당에, 무슨 고집을 그렇게 부리고 싶으신지.”

그의 말은 마치 눈밖에 두면 사고나 일으키는 강아지를 훈육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뭔가 반박하려 해도 도무지 반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심한 부상은 아니라 해도 당장은 오른 어깨와 팔목을 고정해 둔 탓에 쟁반 하나 제대로 들기 힘들었다.

“윗전과 같은 침소를 쓰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나는 전하께 올리는 예법 외에는 내 마음대로 합니다. 게다가 여긴 내 집이고요.”

“하오나, 영감.”

“내가 길바닥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와 재운다 하면 문제 삼으실 겁니까?”

자꾸 말에 살이 붙자 아예 몸을 일으킨 태백훈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벼룩이라도 있습니까?”

“예? 아니요! 없습니다.”

“그러면, 안 씻어서 냄새가 고약하다거나?”

“씨, 씻었습니다. 손도 발도, 다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원은 혹시나 하여 킁킁 제 몸의 냄새를 맡았다. 방금까지 막둥이가 좋아하는 군밤을 구운 탓에 잔불 냄새가 풍기는 듯도 싶었다. 악취는 아니나 향기로운 냄새도 아니었다.

잠자코 유원을 지켜보고 있던 태백훈이 양어깨를 으쓱 추슬렀다.

“그대가 이리 불편해하시면, 김 집사를 불러서 이 방에서 자라 하고 그 방을 내놓으라고 해야겠군요.”

“아범한테요?”

“어쩌겠습니다. 내 전에 보니 김 집사가 코를 좀 크게 골던데. 나는 잠귀가 아주 밝으니, 그더러 코를 막고 죽은 듯이 자라고 하는 수밖에요.”

“…….”

김수남의 코골이는 악명 높았다. 오죽하면 집사가 되기 전부터 독방을 썼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김수남과 태백훈을 한데 자라고 한다면, 둘 중 하나는 필시 밤잠을 뒤척일 터였다.

“하지만 제가 이 방을 같이 쓴단 말이 돌면 영감께 안 좋을 텐데요.”

“내가 비역질 한다는 말이야 이미 그대가 가마 타고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무성했습니다.”

“…….”

새삼 제 존재가 그에게 얼마나 불필요한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하기야 신부복을 입고 맞절할 때부터 이미 유원은 태백훈의 오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예의다 뭐다 하면서 발을 빼 봤자 별 차이가 없을 터였다.

태백훈은 유원이 옷짐을 저 멀리 내려놓고 무릎걸음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솜이불은 보드랍고 도톰했다. 이 정도로 두꺼우면 바닥에 불을 오래 때지 않아도 따뜻할 만했다. 이런 좋은 이불에 한낱 제 몸을 뉘려니 이불에게 괜히 미안한 기분이었다.

“연고는 다 발랐고요?”

아, 맞다. 누우려던 유원은 그 말에 비척비척 몸을 다시 일으켰다. 막상 연고를 가져오긴 했는데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으로만 하려니 뚜껑부터 열기가 쉽지 않았다. 어찌나 빡빡한지 아무리 힘을 주고 돌려도 열리기는커녕 손바닥만 발갛게 열이 올랐다.

“이리 줘 보세요.”

턱을 괴고 있던 그가 손을 내밀었다. 몇 차례 시도에도 열리지 않자 결국 유원은 순순히 태백훈에게 연고 통을 내밀었다.

그는 유원이 한참 동안 끙끙거리며 열지 못한 연고 통을 간단하게 열었다.

“자, 여기.”

태백훈이 연고를 내밀었다. 문득 그의 손에 눈이 갔다. 힘을 주느라 손등부터 팔목까지 힘줄과 뼈가 굵게 도드라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영감께선 무인인데도 손이 참 근사했다. 보통 칼을 쥐는 손은 뼈마디가 굵어져 울퉁불퉁해지기 마련인데, 그의 손은 굳은살과 흉터가 곳곳에 남아 있긴 해도 손가락은 길쭉하고 손바닥은 큼직했다. 곱다기보다는 잘생긴 손이었다.

“뭘 그렇게 빤히 보시는지요.”

“손이….”

“손?”

멍하니 대답하던 유원이 퍼뜩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아니라며 서둘러 연고를 받아 들었다. 슬쩍 스친 손끝이 단단하고 뜨거웠다. 어제처럼 연고를 직접 발라 줄까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눈치는 아니었다.

이부자리에서 멀찍이 물러난 유원은 붕대를 풀고 부어오른 팔꿈치부터 어깨까지 연고를 듬뿍 발랐다. 연고는 홍화씨와 삭힌 단물고기 기름 등을 섞었는지 끈적거리면서도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약에서 나는 각종 악취야 익숙할 만큼 익숙한데 오늘따라 이 냄새가 성가셨다. 등 뒤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는 시선까지 더해지니 괜히 위축되는 듯했다.

“끝?”

태백훈이 물었다. 다 발랐냐 묻는 말에 서둘러 옷을 끌어 올리자 훅, 등잔불에 입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방 안이 어두컴컴해졌다. 확 들어오는 어둠에 놀라기도 잠시, 곧 퇴창(推窓)으로 선선한 달빛이 스며들며 주변이 어스레해졌다.

무거운 이불이 어색하고 불편해 유원은 가장자리에 동그랗게 옹송그렸다. 어머니 아닌 다른 누군가와 같은 곳에 누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병풍 너머로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벌써 잠드셨을까. 어두운 가운데 같이 있자니 불현듯 그의 말에 탔을 때가 떠올랐다.

그날 얼어붙은 산길을 내려오는 내내 유원은 말 머리에서 팔을 떼어 낼 수 없었다. 떨어질까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등 뒤를 감싸듯 바짝 붙은 그의 몸에, 닿을 때마다 목덜미를 스치던 숨소리, 귓가에 울리던 심장박동…….

바람에 에인 뺨의 열기는 끝내 식지 않고 고뿔이 되었다.

지금도 그 순간과 같았다. 누군가가 주는 낯설고 불안하면서도 감각적인 자극. 귀를 기울이고 온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모든 오감이 상대로 가득 차는 느낌.

가슴 아래가 체한 듯 꽉 조여들었다. 유원은 긴장감으로 뻣뻣해진 오른팔을 올려 가슴께를 더듬었다. 안쪽에서부터 심장이 빠르게 쿵, 쿵, 두방망이질 쳤다.

체증이다. 이렇게 몸에 열나고 입 속이 마르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필시 체한 탓이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유원은 결국 달이 반 칸도 못 간 한 식경 만에 슬그머니 침소를 빠져나왔다.

“하아아.”

그는 대청에 서서 찬 바람을 들이마셨다. 기도로 밀려드는 찬 기운에도 가슴께에 지핀 열기가 잠잠해지지 않았다.

* * *

“…원… 아, 기… 유원… 아기씨!”

어깨를 붙잡고 흔드는 손짓에 비로소 유원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느 틈에 잠들었지. 화로에 올려둔 약탕기를 지켜본다는 것이 따뜻한 불기운에 그만 잠든 모양이었다.

“미안, 깜빡 졸았나 봐.”

“자, 잠을, 별로 모, 못 주무셨어요?”

“조금은.”

“아, 아범이 말하시기로는 아, 아기씨 방을 옮기셨다구 했는데, 아, 안 좋은 방이에요?”

“그건 아니고, 좋은 방이야. 웃풍도 안 들고 안 춥고.”

아마 이 저택에서 가장 좋은 방이 아닐까 싶지만, 문제는 방 주인이 태백훈이란 점이겠지.

태백훈의 침소를 거처로 받은 뒤로 유원은 거의 매일같이 잠을 설치고 있었다. 들락날락했다가 태백훈의 잠을 깨울까 숨죽인 채로 꼬박 밤을 새우는 경우가 늘어나니 덩달아 쪽잠을 자는 빈도도 늘었다.

복잡한 심경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유원은 약탕기 뚜껑을 뒤집어 살폈다. 뭉근하게 달인 탕약에서 진동하는 씁쓰름한 냄새에 막둥이가 코를 막았다.

“야, 약, 아직도 드, 드셔야 한대요?”

“의원 어르신 말로는 이틀 치만 더 먹으면 되겠대.”

“정애, 누, 누나 말로는 이렛날 넘게 약을 먹을 정도면 많이, 아, 아팠던 거 아니냐구 하던데.”

정애 이야기를 꺼내다 말고 막둥이가 우물쭈물 눈치를 살폈다. 괜한 말을 했다는 듯이 책망 어린 얼굴이었다.

헛간에 갇혔던 일 이후로 유원은 아직까지 찬간에 한 번도 들르지 않았다. 딱히 정애가 보기 미운 탓은 아니었지만 살갑게 찾아가 말을 건넬 정도로 홀가분한 기분도 아니었다.

조만간 찾아가서 그날 쌀쌀맞게 대해 미안하다고 말은 해야겠지. 귀가 좀 얇을지는 몰라도 정 많은 사람이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막둥이 편으로 삶은 팥을 넉넉하게 보내 줬다. 말로는 막둥이 먹으라 했다지만 누가 봐도 세 사람이 먹을 정도로 넉넉한 양이었다.

“붓기가 오래 가서 그런 것뿐이야. 다 나았어. 봐, 붕대도 풀었잖아.”

유원은 막둥이를 안심시키려 일부러 오른팔을 크게 흔들어 보였다. 최근 중노동 자체를 하지 않은 데다 약을 꾸준히 챙긴 덕에 몸 상태는 양호했다. 따지고 보면 살아온 날 중 가장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살고 있었다.

다만 의원이 진맥하기로는 유원은 선천적으로 약발이 잘 받지 않는 편이라 했다. 기본적으로 건강하니 이런 점이 큰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큰 탈이 나면 치료하기가 손쉽지 않을 테니 조심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도 지금 병을 앓기 전까지는 전염병 한 번 앓은 적 없이 건강하신 편이었다. 어쩌면 유원처럼 약이 받지 않는 체질이라 그러셨던 걸까.

어머니는 잘 지내시겠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생사를 오갈 정도로 아팠다면 아마 서신에라도 써 줬을 터였다. 아직 그런 기별은 없었으니 분명 좋은 방에서 극진히 간호받고 계시리라. 그 냉정한 홍세환 대감께서 직접 약조했었던 바였다.

선들거리는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낭창거렸다. 목련 냄새에 유원은 가만히 숨을 골랐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가득 심어 뒀다는 꽃나무 냄새가 섞인 바람은 서늘하면서도 감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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