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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38)화 (38/60)

38화

막둥이의 눈을 가리고 있던 유원이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

산발이 된 채 뒤로 주저앉은 장명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스멀스멀 진동하는 지린내에 하인들이 코를 막았다.

“저이가 망할 천것이면 나는 천것과 맞절을 한 상놈이겠구나?”

잘려 나간 상투를 발로 짓밟은 태백훈이 칼끝을 장명길의 목에 겨눴다.

“나를 명분 삼는 말도 정도껏 지껄였어야지.”

빙긋 웃는 얼굴이건만 눈동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장명길은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그저 바닥에 추저분하게 앉아 입만 떡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영감!”

비명처럼 그를 부른 염옥화가 태백훈의 칼을 막아 세웠다. 태백훈은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왜, 네가 대신 죽기라도 할 작정이더냐?”

“이이가 경을 칠 인간임은 틀림없으나 보는 눈이 많은 자리지 않습니까. 부디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죄를 따져 그에 맞는 벌을 주십시오.”

태백훈은 간곡하게 비는 염옥화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평소 단아하고 정숙함을 일관하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하기야 시아주비인 장명길이 죽는 꼴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으리라.

비단 염옥화의 집안 사정만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말대로 보는 눈이 많았다. 게다가 한낱 사사로운 죽음으로 마무리 짓고 넘기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었다.

“이전에 내가 한 번 눈감아 줬을 때, 주제를 알고 멈출 줄 알았는데.”

겨냥한 칼끝을 거두지 않은 채 태백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기 죄 하나도 스스로 자비를 구하지 못하고, 손위 형수한테 구걸하는 놈은 벨 가치도 없지.”

문 너머로 우르르 사람들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포청에서 온 포도군사들이었다. 예를 갖춰 인사하는 포도대장을 쳐다본 태백훈이 환도를 갈무리하며 말했다.

“저놈과 같이 있던 패거리를 전부 끌고 가게. 제대로 실토하기 전까진 물 한 모금, 곡기 하나 주지 않고 신문해야 할 것이다.”

장명길이 고래고래 악을 썼으나 포졸들 누구도 말을 듣지 않았다. 유원은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한참 동안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차분하게 가슴, 배, 부어오른 오른 어깨를 조심스럽게 진맥한 의원이 굽혔던 허리를 폈다.

“다행히도 깊은 병으로 진전되진 않았습니다. 바깥에서 너무 오래 지낸 까닭에 기가 허해졌을 테니, 체온을 따뜻하게 보전시키고 약을 며칠 챙겨 드시고요. 오른쪽 팔과 어깨는 절골이 아니긴 하나, 힘살이 퉁퉁 부어올랐으니 침을 좀 놔 드리겠습니다.”

의원은 정성스럽게 유원의 팔과 어깨에 침을 놓은 다음 부목을 대고 붕대를 단단하게 감아 줬다.

“여기 고약과 박하 기름은 따로 두고 갈 테니 수시로 바르셔야 합니다. 그래야 통증이 줄고 붓기가 빨리 가라앉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의원이 펼쳐 놨던 보자기를 챙기자 태백훈이 김수남에게 눈짓했다. 의원이 받은 돈을 보고는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기존에 받는 돈보다 곱절은 많은 돈이었다.

“금방 나아지지 않는다면 매일 들러 살펴봐 주시게.”

“예? 매일 말입니까?”

“그래, 되도록 이른 아침에 들러 주면 좋겠고.”

연유를 물으려던 의원이 문득 이부자리에 앉아 있는 유원을 보고는 뒤늦게 깨달았다. 소문으로 듣던 그자가 분명했다. 사내 몸으로 올린 혼례라 정부인 대접을 못 받는다 들었는데, 이리 치료까지 직접 지시하실 정도면 소문과는 영 딴판인 듯했다.

이 돈에는 곧 입을 방정맞게 놀리지 말라는 의미도 있으리라. 눈을 내리깐 노(老)의원은 순순히 돈을 받았다.

의원을 배웅하고 오겠다며 김수남이 뒤따라 자리를 떴다. 그러나 정작 태백훈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집채를 지을 때 남은 자투리 공간으로 지은 쪽방은 천장도 낮고 너비도 좁았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조그만 방인데 사내들 평균보다 두드러지게 큰 태백훈이 앉아 있으니 방이 꽉 차 답답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영감, 오신 지 얼마 안 돼 고단하시지 않습니까.”

“안 고단합니다.”

“그래도 편히 들어가서 쉬시는 것이 어떠하온지요.”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리 단호하게 대답하니 유원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열흘 동안 나갔다 왔는데 여독 하나 없단 말인가. 저는 한나절 말 타고 산에 오른 일로 이틀을 앓았는데. 출중한 무인(武人)은 나라의 강철이란 말이 괜한 소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 좁은 방에 계속 계시기엔 불편하지 않은가. 바로 옆에 있는 넓은 사랑방을 두고 쪽방에 구기듯 자리한 그를 보고 있자니 편치 않았다.

게다가 문 앞에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마치 유원을 감시하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도통 영문을 모르겠으니 유원도 더는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넓은 저택 모든 칸이 전부 그의 영역이었다. 그러니 태백훈이 어디에 있든 마땅한 권리였다.

“후우.”

잠자코 있던 태백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천(川) 자 패인 미간과 뾰족하게 날이 선 눈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노려보는 방향의 주체로 봐서는 짜증의 원흉은 아무래도 유원인 듯했다.

하기야 그로서는 이번 일이 상당히 불쾌할 만했다. 하인들이 그가 없는 사이에 작당했으니 골치도 아플 테고. 그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싶을 만했다.

이불을 치운 유원이 그의 앞에 공손히 엎드렸다.

“……결백함을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감 덕에 헛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에 걸쳐서라도 갚겠습니다.”

행여나 태백훈이 제 권솔 출신이던 장명길의 말을 조금이라도 믿었다면, 유원은 그대로 헛간에서 굶어 죽었으리라. 왜 유원이 도망쳤다는 말을 믿지 않았는진 몰라도, 어찌 되었든 간에 태백훈이 유원의 억울함을 믿어 준 덕에 진범을 찾아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태백훈은 대꾸 없이 팔짱을 끼고서 지그시 유원을 내려다봤다. 감사 인사에는 별 반응이 없던 그가 문득 바닥을 짚고 있는 유원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정하던 눈썹이 팍 찌푸려졌다.

“손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입니까.”

“손이요……?”

그의 물음에 유원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손톱은 깨지거나 부러지고, 손가락 끝마다 피멍이 파랗게 들어 있었다. 민망함에 양 손가락을 모두 구부린 유원이 대답했다.

“잠들었다 일어나지 못할까 봐, 깨물어서 생긴 멍이에요.”

“그럼 이쪽은 밧줄에 살을 문댄 탓일 테고.”

그의 커다란 손이 손목에 남은 자국을 매만졌다. 까진 살 위를 쓸자 따끔거리는 감각에 움찔 눈을 감았다 뜬 유원이 말했다.

“야, 약을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

“그리 쉽게 낫는다 하며 약을 바를 바에는 애초에 그럴 일을 만들지 않았으면 되잖습니까.”

“하지만 그때는 어쩔 도리가….”

“왜 내가 안 볼 때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괜히 도발하여 일을 키우냔 말입니다.”

다그치는 목소리에 유원은 눈시울을 발갛게 붉힌 채 그를 올려다봤다. 손을 빼내려 했지만 태백훈이 놔주지 않았다. 커다란 그의 손바닥이 올무처럼 손과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제가 일부러 말썽을 피운다 여기세요?”

“그럼 아니라 하시려고요? 여태 이런 일 한 번 없었는데, 그대가 온 이후로 크고 작은 사고가 종종 생기는 걸 보고도?”

“제가 뭘 위해서 그러겠습니까. 당장 오늘 영감께서 나서지 않았으면 헛간에서 얼어 죽었을 텐데요.”

“홍유원.”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의 행실에 맞춰 행동하는 법이라 했습니다. 그들 눈에 저는 영감한테 천것으로 대접받았으니 천것이란 말은 틀린 말이 아니라 사실이지 않습니까.”

쏘아붙인 유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감히 어느 안전인지 알면서도 터져 나온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천것이란 말은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차라리 아예 천놈 취급이 낫지, 이도 저도 아닌 지금 같은 신세가 더욱 비참했다.

이런 멀고 먼, 끝없는 겨울 같은 타향살이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함께 산사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 처지로는 그럴 수가 없어 참았을 뿐이었다. 대접은 감히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숨 붙이고 살 수만 있으면 족했다.

그런데 왜 저 남자는 유원을 내치지도 않고, 저를 자꾸 관심받고 싶은 못난이로 모는지. 한낱 종놈처럼 부리면 그만일 텐데도.

“…처음에도 말했듯이, 나는 그대를 부인으로 여길 생각은 없습니다.”

침묵하던 태백훈이 입을 열었다. 움켜쥔 손가락 사이를 그의 손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대를 천것처럼 대우할 생각 또한 추호도 없었고요.”

“…….”

“만일 나 또한 그대를 아랫것으로 봤다면, 지금껏 내가 말을 높였겠습니까.”

마치 어린 동생을 어르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고 보면 태백훈은 여태 한 번도 유원에게 말을 낮춘 적이 없었다. 화를 내더라도 꼬박꼬박 높임말로 대했다.

태백훈이 깍지 낀 손가락 사이사이를 뭉근하게 더듬는 순간 유원은 저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감았다. 굳은살이 밴 손은 단단했고 달군 아랫목처럼 뜨거웠다.

“다만 내가 그대를 정부인으로 인정하는 순간, 그대의 아비 홍세환이 내 장인어른이 되는 꼴을 피하고 싶을 뿐이지.”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이 어두웠다. 이윽고 태백훈이 천천히 깍지 낀 손을 빼냈다. 왜인지 손이 반질반질하여 내려다보니 어느 틈에 손가락 전체에 연고가 발려 있었다.

“이만하면 상처에 흡수는 잘 되었겠군요.”

“…….”

미끌미끌해진 두 손을 내려다보던 유원이 침을 삼켰다. 단순히 상처에 연고를 발랐을 뿐인데 왜 이렇게 숨이 벅찬 거지. 방이 너무 더운가, 목이 마른 건가.

바깥에서 정애가 태백훈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음을 가져왔노라는 말에 그가 몸을 일으켰다. 천장이 그의 머리에 닿을 듯했다.

“오늘은 몸이 푹 녹을 때까지 여기서 쉬시고, 내일부터는 짐을 죄다 싸서 내 방으로 오세요.”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마지막에 한 말이 귀에 걸렸다. 짐을 싸서 내 방으로 오라니? 뒷말의 의미를 채 묻기도 전에 태백훈은 이미 밖을 나선 뒤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정애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문지방 앞에서 한참을 쭈뼛거렸다. 웅크리고 들어온 그녀가 공손하게 소반을 올렸다.

“저기, 쌀을 아주 오래 끓였어요. 며칠 못 먹은 상태로 밥을 먹으면 탈 난다 해서요.”

보온용 보자기를 열어 둔 후에도 정애는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치맛자락을 붙잡은 두 손을 연신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이었다.

“그, 저기요. 정말로 송구합니다. 소인은 아기씨를 의심하지 않으려 했는데요. 다들 확실하다고, 곧 관아에서 아기씨를 벌할 거라고 말하니까 제가 순간 마음이 흔들렸어요.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급기야 정애가 넙죽 엎드려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빌었다. 애써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유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줄곧 잘 대해 주던 부엌데기 정애마저 그 말을 믿었다는 점이 못내 섭섭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애의 태도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친분 있는 사람 사이에서도 오해가 생기는데,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본 유원에게 뭐 그리 대단한 정이라도 붙었겠는가. 오히려 같은 권솔로 지냈던 사람들 말이 더 그럴싸하게 들렸을 만도 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까 그만 일어나 보셔요.”

“요, 용서해 주시려고요?”

“제까짓 게 용서라고 할 것이 뭐 있겠어요.”

애써 웃어넘긴 유원이 그릇에 든 미음을 휘적거렸다. 푹 끓인 죽은 삼키기 좋을 만큼 부드러웠지만 유원은 좀처럼 식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마치 목구멍 안쪽에 응어리가 뭉친 듯했다.

다음 날, 유원은 쪽방으로 들이닥친 하인들을 보고 당황을 금치 못했다. 쪽방은 좁은 데다 환기가 잘되지 않으니 쓰지 말라는 명이 있노라 했다.

그리하여 몇 없는 짐과 함께 옮기게 된 거처 앞에서 유원은 도통 문지방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옷짐을 품에 끌어안은 채 버선발 끝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거기 서서 방 구경이나 하시려고요?”

침의로 갈아입은 태백훈이 요 위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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