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명순응(明順應)이 지나고 비로소 태백훈을 알아본 유원이 마른 입술을 벙긋거렸다. 영감을 부르고 싶은데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까닭이었다.
“설마 저택이 너무 넓어 헤매다 길이라도 잃으셨습니까?”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유원은 체온을 쫓아 저도 모르게 품에 기댔다. 평소라면 감히 하지 못할 경동(輕動)이었다.
“영감, 여기 왜 이 사람이….”
살짝 눌린 듯한 목소리가 퍽 익숙했다. 옆에 서 있던 장명길을 알아본 유원은 태백훈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저자가 그랬다고 말해야만 하는데, 추위로 고단해진 몸은 무어라 말을 꺼낼 힘조차 부쳤다.
품에 안긴 유원을 가뿐하게 들어 올린 태백훈이 장명길을 향해 물었다.
“방금 나한테 분명히, 이 헛간채도 전부 살펴봤고 아무도 없다 하지 않았던가?”
“예, 부, 분명히 그랬습니다. 영감이 보시는 앞에서 수색하는 대로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무 낌새를 채지 못했고요. 워낙, 넓은 저택이지 않습니까.”
거짓말.
“필시 멀리 달아났다 힘들어 돌아온 모양이겠지요. 여기 원혜부는 도백과 부윤의 손길에 아늑해졌다 해도 바깥은 그 야만스러운 괴물들이 도사리니 말입니다.”
하나같이 거짓말이었다.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헛간에 가뒀으면서 어찌 저리 뻔뻔하단 말인가.
“종놈살이가 고된 나머지 패물을 훔쳐 도망쳤다가 다시 내 집으로 되돌아왔다, 이 말인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헛간에 달린 저 자물쇠도 풀지 않고?”
태백훈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새끼줄과 자물쇠가 매달린 문짝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장명길이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위, 위쪽 창으로 들어가는 법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자물쇠를 잠근 척 꾸민 탓에 다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지도요. 여긴 워낙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
“그렇다는데, 홍유원 그대도 동의하십니까?”
그가 묻는 말에 유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지러운 눈을 감고 고개를 가로로 두 번 저었다. 아니다, 하는 완강한 부정이었다.
사랑채 대청 앞에 선 장명길은 공손하다 못해 비굴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이 집 주인이신 영감께 무례를 범한 줄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 열흘 부재하신 사이에 저 도련님께서 몹쓸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얼마나 몹쓸 짓이기에 이런 가당치도 않은 감금을 강행했을까.”
“놀라지 마옵소서. 무려 권솔들의 패물을 훔쳤고, 헛간채에 보관 중이던 요수 가죽 또한 몰래 내다 팔았다고 합니다. 그날 행랑 권솔들도 함께 저 쪽방에서 장물이 나온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대청 옆 기둥에 기대앉아 있던 유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또 같은 상황이다. 며칠 사이에 더더욱 그럴싸한 증거를 만들었을 테니 저리 호언장담하는 것이리라.
유원이 감금된 사이에 행랑채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간질했는지 그 살갑던 정애조차 유원과 눈을 마주 보려 하지 않았다. 다들 저 얌체 같은 도련님이 몹쓸 장난을 벌였다 확신하는 눈치였다.
마루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태백훈은 퍽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영감의 반응에 흥이 돋은 듯 장명길이 더욱 신랄하게 말을 이었다.
“남의 것은 물론이고 주인의 물건을 팔아 이익을 챙겼으니 절도가 아니겠습니까? 자고로 절도죄라 하면 대명률에도 쓰여 있듯 얼굴에 자자(刺字)를 새길 정도로 큰 죄입니다. 비록 저분께서 옥양의 큰 집안 도련님이라고는 하지만, 자자까지는 못 해도 어느 정도 경고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없는데도 무작정 추궁하고 가뒀다는 거군. 심지어 포박까지 하고.”
“소, 송구합니다. 영감. 워낙 급한 사안이라 그랬습니다. 이에 대한 잘못은 따지셔도 좋으나 단지 소인은 그간 영감을 모셔 온 만큼 영감을 생각하여 한 일이었습니다.”
“그리 생각하면서 왜 그날 포청에는 안 알렸을까.”
“저 도련님께 뒷배가 있으니 혹시나 하여….”
“뒷배?”
“영감! 소인은 도둑을 잡고자 애쓴 일인데 소인께 기특하단 칭찬은커녕 이리 무정하십니까요?”
장명길이 눈을 날카롭게 뜨고 으르렁거리듯 외쳤다. 그 모습이 마치 주인을 물 날만 기다리는 개와도 같은 꼴이었다. 태백훈은 옆에서 죽을상으로 눈치를 살피던 김수남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담배합과 장죽 좀 가져오너라. 즉시 대령된 담뱃대에 태백훈은 태연히 불을 붙인 다음 방만하게 늘어져 담배를 뻐끔거렸다. 마치 극단들 춤판 따위를 구경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김 집사께선 장명길이 주장하는 바를 제대로 확인했는가?”
“제, 제가, 시, 실은 그날… 수, 술을 좀 마시느라, 그, 그만 자리를 비웠던지라 나중에서야 사정을 들었는데.”
“염 부인은 친정에 갔다 왔을 테니 마찬가지겠고.”
느른한 목소리에 염옥화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낯빛이 무척 어두웠다. 허가를 받고 나선 길이라지만 주인이 맡긴 책무를 능히 완수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때였다. 하인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사월이 대청을 가로막았다. 네 이년! 김수남이 무엄하다 만류하기도 전에 사월이 곧장 무릎을 꿇었다.
“영감! 쇤네, 영감께 간청드리고 싶습니다.”
“…말해 봐라.”
“소, 소인이 아끼던 반지가 어느 날 없어졌습니다. 잃어버렸던 그날, 쪽방에서 나왔다던 장물 사이에서도 제 반지는 없었고요. 그래서 포청에 신고하려 했는데, 장명길 나리께선 분명 도련님이 훔쳤을 것이라면서 신고하면 영감께 누가 되니 하지 말라면서 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부, 부디 영감께서 소인의 가락지를 찾아 주시옵소서. 이,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후우, 태백훈이 입에 머금고 있던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시큰둥한 듯 무심한 표정이면서도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그날, 장물 사이에선 발견되지 않은 가락지란 말이지.”
“예에. 바닥이란 바닥은 죄다 살펴봤습니다.”
곧게 일어선 훤칠한 몸이 사뿐히 마루 아래로 내려왔다. 사월에게 다가간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든 권솔들은 사월이 앞에 일렬로 서거라.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소 뜬금없는 지시에 다들 의아해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사월 앞에 섰다. 곤장을 맞아 어기적거리는 어린 막둥이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돌린 태백훈은 유원을 향해 말했다.
“힘들겠지만 그대도 저리 가서 잠시 서시겠습니까.”
부드럽고 너그러움이 배어나는 말투에 유원은 시키는 대로 줄에 섰다. 바로 앞에 서 있던 막둥이가 괜찮냐며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하인과 노비, 권솔들이 선 모습을 확인한 태백훈이 사월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사월이 네가 직접 순서대로 여기 사람들의 손이나 소매 안쪽을 수색하거라.”
“예에?”
“아녀자로서 사내의 몸을 만지는 것은 조금 불편할 테니 사내는 저기 서 있는 사람이 도울 것이다.”
저기 서 있는 사람이라니. 뒤돌아보니 손청준이 뒷짐 지고 서 있었다. 아까까지는 아무도 없던 자리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놀랄 새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못 찾았다 했지 않느냐. 소중한 물건인 만큼 직접 찾아봐야 성에 차는 법이지.”
외거 하인을 제외하고 행랑에서 거주하는 권솔은 대략 서른이었다. 그중 사내는 열둘이고, 여인이 열여덟이니, 사내 몸을 수색하는 일이야 그리 까다롭지 않겠으나 여인들에겐 자못 부끄러운 상황인지라 사월도 난감했다.
애초에 그렇게 비싼 가락지를 훔쳐 갔으면 여태 팔지 않고 있을 리가 만무할 텐데, 영감께서 죄를 대신해 창피를 주는가 싶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는데 문득 중간에 서 있는 여자애한테 묘하게 눈이 갔다. 이름은 순향이로, 같은 처소에서 지내는 동무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밤마다 통 처소로 오지 않고 자꾸 돌아다니는 듯했는데, 오래간만에 마주 본 동무는 어쩐지 긴장한 얼굴이었다.
“사월아.”
애써 웃어 보이는 순향이를 뚫어져라 보던 사월은 문득 순향이 뭔가를 가리듯 손을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월이 순향의 손을 억지로 잡아 들자, 새끼손에 가락지가 반짝거렸다.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눈이 그렁그렁해진 사월은 그 즉시 순향의 손에서 가락지를 움켜잡았다.
“네가 훔쳤던 거야?”
“무슨 소리야! 이, 이건, 내 오라비께서 주신 거야!”
“거짓말! 저번에 나한테 손가락이 굵어서 가락지 같은 건 줘도 안 낀다고 했잖아! 그랬으면서 어떻게! 같은 방 동무의 물건을 훔쳐?”
“아니래도? 아니라고 했잖아!”
옥신각신하는 와중에 새끼손에 있던 가락지가 튕겨져 나갔다. 휙, 동시에 날아든 까마귀가 가락지를 낚아채더니 그대로 손청준에게 돌아가 앉았다. 손청준은 까마귀가 물고 온 가락지를 태백훈에게 내밀었다.
“영감이 생각하신 바가 맞나 봅니다.”
파랗게 질린 순향이 태백훈에게 다가가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소, 소인이 훔친 것이 아닙니다! 소인도 어제 정인에게 선물 받은 것이에요. 정말이에요!”
“그거 참 놀라운 우연이구나. 그럼 네 정인은 누구더냐?”
순향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이실직고할 때까지 곤장을 치란 말에 끌려가던 순향이 “나리, 나리!” 하고 울부짖었다.
“정인한테 받은 반지가 하필 훔친 물건이라니, 어찌나 실망스러울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찬 태백훈이 천천히 무릎 꿇고 있는 장명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손에 들린 담배를 장명길 눈앞에 휙 흔들었다.
“그런데 자네 낯빛이 영 좋지 않은데, 어디 아픈가?”
“소, 소인, 괘, 괜찮습니다. 그저 저 계집이 반지를 훔쳤다니 참으로 당혹스러운지라….”
“그야 그렇겠지. 자네와 정을 나누던 여인이니.”
장명길이 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렸다. 태백훈이 턱을 쓰다듬었다.
“어디 보자, 그러고 보니 방금 저 여인이 반지를 훔친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얻었다 했었는데. 그래, 정인한테 받았다 했지. 그렇다 함은, 장명길 자네가 훔쳐다가 줬다는 말이 되는데.”
“소, 소인은 그 계집과는 일면식도 없사온데 어찌 정인이라고…!”
“근래 매일 밤마다 만난 것을 내가 아는데도 정을 통하지 않았다 하면, 결의라도 나눴나 본데. 네 옆에 있는 놈들한테 한 번 물어볼까? 어떤 사이였는지.”
“…….”
변사처럼 유창하게 주장할 때와 달리 장명길은 입술을 옹졸하게 다물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고개를 기울인 태백훈이 요요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누가 시켰느냐?”
“누, 누, 누가 시켰다니요?”
“그야, 네 그 방자한 짓거리가 독단일 리가 없으니 묻는 말이지.”
“영감! 소인은 정말로 영감을 위해서, 단지 옥양에서 온 골칫덩이를 적당히 겁준 다음 멀리 보내려 했을 뿐입니다!”
엎드려 있던 장명길이 원통하다는 듯 유원을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저 망할 천것이 들어온 이후로 저택이 어찌나 뒤숭숭했는지 아십니까? 게다가 지금 영감께 무슨 말이 따라붙는지 아시면…!”
“천것?”
그가 허리춤에 찬 환도를 뽑아 들었다. 얇게 깎아 낸 고드름 같은 칼날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 누구더러 천것이라?”
그는 칼을 빠르게 휘둘렀다. 서걱, 베는 소리가 섬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