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도둑이야! 도둑을 잡았다!
유원을 쪽방 밖으로 끌고 나온 장명길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도둑 소리에 담장 너머 행랑에서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머지않아 등롱을 들고 하인들이 모여들었다.
“도둑?”
“어디? 어디에”
“아무래도 사랑방에 도둑 들었나 본데?”
“맙소사, 하필 주인어른 안 계시는데 도둑이 들고 그래.”
웅성거리는 하인들을 한데 불러 모아 둔 자리에서 장명길은 턱을 들고 거만하게 말했다.
“내 듣자 하니 요 며칠간 행랑채에 물건이 사라졌단 말이 많다더군. 비록 지금은 관아에 몸담고 있긴 하나 한때 같은 식솔로서 나 또한 그 도둑을 잡으려고 불철주야 감시하고 있었는데, 글쎄, 손버릇 나쁜 도둑이 이리도 가까이 있었지 뭔가.”
장명길이 눈짓하자 쪽방으로 들어간 장정 하나가 큼직한 보따리를 들고나오더니 땅바닥에 대뜸 보따리를 휙 내던졌다.
보자기 매듭이 풀리며 드러난 물건 대부분이 값진 패물이었다. 노리개부터 시작해, 은비녀에 고급 손수건, 심지어 엽전 꾸러미를 넣는 비단 주머니까지 있었다.
패물을 확인한 하인들이 여기저기서 탄성을 내질렀다. 세상에, 이건 내 노리개인데? 저 비녀 저거는 흥성댁 것 아니에요? 앞다투어 패물을 되찾은 하인들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장명길을 쳐다봤다. 나이 든 하인이 앞서 나와 다그쳤다.
“도대체 이 패물들은 언제 누가 훔쳤다던가?”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무려 저기 서 있는 옥양 도련마님의 고약한 손버릇이지요.”
도련마님? 그게 누군데. 하인들의 눈이 일제히 장명길이 가리키는 쪽으로 쏠렸다.
반신반의, 혹은 경계로 날이 선 눈빛들을 마주한 유원은 침착함을 유지하고자 심호흡했다. 난데없이 쪽방에 들어온 꿍꿍이가 뭔가 했더니 도둑으로 몰 작정이었구나.
놀란 막둥이가 제 쪽으로 오려 하기에 손짓하며 만류했다. 어차피 막둥이가 낀들 어린애 입만 고달파질 뿐이다.
일단 당황하지 말자. 이대로 기세에 휘말리면 장명길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터였다. 아마도 저치는 모든 사람이 보는 데서 유원에게 창피를 주려고 하는 듯했다.
“맹세코, 그런 적 없어요. 쪽방으로 들어가니 저분이 말도 없이 제 침소에 있어 뭘 하냐고 물었을 뿐이에요. 그랬더니 저기 나리께서 대뜸 도둑이라며 고함을 치셨고요.”
“그럼 의심 가는 사람한테 미리 방 좀 들르겠습니다, 하고 방을 수색하나? 안 그래도 평소 행적이 수상하여 은밀히 방을 뒤졌더니 사라졌던 패물이 한곳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시치미를 떼실 작정이오?”
“…정확히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허, 모른 척 오리발도 정도가 있지. 방바닥을 파내 그 사이 구들장 틈에다 숨겨 놓으셨잖소?”
그 말에 유원은 기가 찬 나머지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그는 똑바로 명길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일단 제가 이 패물을 훔치지 않았음에는 두 가지 까닭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뭐?”
“첫째로,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아시다시피 저는 한 달 전 옥양에서 올라왔습니다. 하여 아직도 곳곳이 익숙지 않고요. 보통 이런 패물은 보금자리 깊숙한 곳에 보관할 텐데, 누가 어느 방에서 주무시는지도 모르는 제가 어찌 쉽게 손을 댈까요.”
뒤쪽에 서 있던 정애가 큰 소리로 옳소! 하며 맞장구를 쳤다. 다른 하인이 눈치를 주고 나서야 정애는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또한 패물이란 손상이 없어야 값어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구들장 사이라면 군불 지필 때마다 아궁이 열기가 지나다닐 텐데, 그럼 저 손수건이며 노리개는 타 버릴 거예요. 제가 정말로 훔쳤다면 쪽방이 아니라 차라리 사랑채 마루 밑이나, 대들보에 숨겼을 겁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영감께서 평소 다니는 자리를 감히 들여다볼 생각은 못 할 테니까요.”
“번지르르하니 말은 참 잘하시는데 결국 그쪽이 도둑이라고 밝히는 소리나 마찬가지 아닌가? 훔칠 의향이 있긴 했단 것이잖소?”
“가정하에 그럴 것 같다고 한 말인데 어찌 도둑질의 근거라 하세요? 그러는 명길 나리야말로 수상하게 굴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 저번에도 나를 모함하시더니, 이제는 도둑으로 만드시려고? 너무 뻔뻔한 것 아니오?”
“모함이 아니라 사실이겠지요. 그날 나리께서 먼저 거짓으로 울면서 상황을 모면하셨잖습니까. 제가 있는 앞에서 들으랍시고 조롱까지 하시고요.”
“뭐?”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뜬 명길이 유원을 잡아 바닥으로 밀쳤다. 땅바닥을 한차례 구른 유원은 장명길의 발길질에 걷어차이지 않게 곧장 두 팔로 얼굴을 가로막았다. 그 모습을 본 장명길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런! 나는 때릴 생각도 없었는데 우리 도련님께선 어찌 맞을 시늉부터 하신답니까? 배짱 좋게 뭐라 뭐라 야단을 치시더니 의외로 겁이 많으시네?”
“…제가 나리의 자리를 빼앗은 듯해 막무가내로 화풀이하시는 것은 아니고요?”
새치름하게 던진 말에 여유만만하던 명길의 얼굴이 순식간에 포악하게 일그러졌다. 당장 우격다짐이라도 할 기세에 옆에 있던 지기들이 서둘러 명길을 말렸다.
“나리, 나리. 진정하세요. 괜히 이러지 마시고 차라리 큰어멈이든 아범이든, 집사를 불러와 시시비비를 가리면 되잖습니까.”
이에 다른 하인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말했다.
“보자, 어멈은 오늘 친정집에 가 보셔서 내일은 되어야 온다던데요. 아범은 시전에서 술 좀 자시고 온다고 하셨는데, 언제 올지 모를 일이죠.”
“그럼 관아로 가야 하나?”
“아니, 아니! 관아는 아직 이르지.”
장명길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영감 안 계실 때, 소란 벌어진 것 알면 큰어멈이 얼마나 골치 아파하시겠어.”
“그럼 어째야 합니까?”
이 집 큰 어른이신 영감도, 행랑 살림을 감독하는 집사 둘 또한 자리를 비웠다. 그렇다면 사실상 이곳에 모인 하인들 중 제일 높은 자라 하면, 원칙적으로는 유원이어야 했다. 비록 처로는 인정받진 못했어도 영감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정애와 막둥이를 제외하면 하인들 그 누구도 유원을 보지 않았다. 특히 몇몇 사내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장명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중호걸을 볼품없는 승냥이가 대신 차지한 꼴이었다.
터벅터벅, 주저앉아 있는 유원 앞으로 다가선 장명길이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 앙큼한 도련님께선 제 잘못을 뉘우치실 줄 모르는 모양인 듯하구나.”
이제는 말투마저 태백훈을 비슷하게 따라 하고 있었다. 그가 입꼬리를 당겼다.
“튼튼한 헛간 하나 비워 두고 가두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좀 얌전해지겠지.”
짚만 가득 쌓인 헛간은 얼마 전 새로 보수해 외관이 튼튼했다. 장명길은 다른 사내들을 시켜 유원을 헛간에 집어넣고는 자물쇠를 단단히 채웠다.
“그런데, 나리. 아무리 그래도 영감 아랫사람이고 옥양댁 출신 도련님 아닙니까. 혹시라도 나중에 이 일로 딴지라도 걸면….”
“그래 봤자 서자 아니냐? 좀 곱게 자랐다 해서 진짜 양반인 것도 아니고.”
“그래도 영감한테 말은 전달하셔야지 않을까요.”
“지금 영감께서 나가 계신 곳이 어딘지 알고 전달하라 말라 해?”
장명길이 단호하게 쏘아붙이니 결국 이래저래 걱정을 늘어놓던 하인이 고개를 숙였다. 손을 탁탁 턴 장명길이 말했다.
“혹시라도 문을 열어 주는 이가 있다면 이번 도둑질에 가담한 공범으로 함께 관아에 신고할 것이다. 알겠는가?”
엄명 같은 말에 다들 입을 다물고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갔다.
헛간 문을 두 손으로 붙잡고 한참 동안 흔들어 대던 유원이 뒤로 물러났다. 거친 나무 손잡이에 비빈 손바닥은 불이라도 붙은 듯 뜨겁고 쓰라렸다.
사방이 캄캄했다. 그는 일단 귀를 기울여 소리로 주변을 살폈다. 작게 마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럼 마구간이 근처겠구나. 별채 옆쪽에 한데 지어진 외양간 쪽 헛간채인가. 짚단을 더듬더듬 만져 보니 예상대로 말이나 소한테 쓰이는 크기로 마름질 되어 있었다.
헛간채면 통행로에서도 유독 먼 곳이라 아무리 크게 소리 질러 봤자 바깥에 들리진 않을 터였다. 게다가 가축들 소리에 가려져서 유원이 뭔 소리를 하든 짐승들 우는 소리인가 하며 넘겨짚을 만했다.
지금 장명길은 주인 없는 집에서 월권을 행사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적당히 그럴싸한 명목을 만들어 유원을 가둘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변명을 하리라.
하지만 너무 무모한 방식이기도 했다. 도둑으로 몰아넣기만 했어도 충분히 유원을 험담할 핑곗거리가 되었을 텐데, 성급한 기색이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유원을 눈밖에 치워 버리겠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머리 아파….”
열이 오르는 이마를 그나마 차가운 손등으로 식히며 유원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속도 좀 메스꺼웠다. 며칠 고민한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끼니도 얼렁뚱땅 때운 탓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두엄간이 있는지 구릿한 악취가 희미하게 났지만 그나마 지푸라기 냄새가 가려 줘서 다행이었다.
다만 추위는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나무로 외벽을 단단하게 지은 헛간이라 해도 틈새로 부는 외풍까지 막진 못했다. 외투도 없고, 몸을 데울 만한 방한구라고는 붉은 목도리 하나뿐이었다.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한기가 부쩍 강해졌다. 이러다간 관아로 가기 전에 얼어 죽을 것만 같다. 게다가 추우니까 왠지 더 졸린 기분이었다.
안 돼. 지금 자면 분명 죽을 거야. 유원은 스스로 뺨을 때렸다. 짝, 살 때리는 타격음이 어두운 헛간에 울려 펴졌다. 그러고도 모자라 유원은 손가락 열 개를 죄다 이로 깍 깨물었다.
해가 뜰 때까진 버텨야 했다. 그러고 나면 여기서 나가든, 막둥이든 누구든 불러내 부탁할 방도가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