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유원은 헛간 앞에 멀거니 서 있었다.
전날 시간을 들여 가며 광주리별로 나눠 둔 약초 더미에 누군가가 모래와 자갈, 나뭇가지를 잔뜩 섞어 놨다. 처음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그끄저께부터 오늘까지 합하면 벌써 네 번째로 벌어진, 누군가의 악랄한 훼방이었다.
범인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유원은 왠지 이 소행의 원흉이 대충 짐작 갔다. 아마도 장명길이 관련 있을 듯했다. 약초 창고는 별채에서도 구석진 곳이라 하인들이 굳이 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번번이 찾아올 정도로 악감정을 가진 자는 그 사람이 유력했다.
“이래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다고….”
애꿎은 약초만 아까울 뿐인데. 입 밖까지 샌 한숨을 삼키며 유원은 엉망으로 늘어놓은 광주리를 차근차근 다시 정돈하기 시작했다.
대강 정리는 했지만, 개중 몇 자루는 소변까지 갈겨 놓은 바람에 아예 손쓰지 못할 정도였다. 그나마 당장 급하게 쓰는 물건들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날이 좀 더 따뜻해지거든 근처에서도 구할 수 있는 약초로 채워 두면 될 듯했다.
문제는 약초 창고에서 그치지 않았다. 신경 쓰자니 성가시고, 무시하기엔 불편한 일이 연달아 벌어졌다.
한 번은 유원이 자주 지나다니던 길목에 큰 돌이 눈과 낙엽에 숨겨져 있었다. 다행히 그 자리를 피해 지나간 덕에 넘어지진 않았지만 바로 다음에 오던 하인 하나가 넘어지면서 물동이를 깼다. 엎지른 물이 얼면 어떡하냐면서 타박하는 염옥화의 꾸짖는 소리가 행랑채 바깥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치만 큰어멈, 누가 여기다 돌을 가져다 둬서 넘어졌단 말이에요.”
어린 여종이 억울하다는 듯 훌쩍거렸다. 얼른 저 돌이나 치우라 지시한 염옥화가 몸을 돌리다 말고 유원을 발견했다. 꾹 다문 입술이 무거워 보였다. 그것 보시오, 굳이 건드리니 자꾸 사달이 나잖습니까. 마치 그리 말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염옥화는 그대로 치맛자락을 잡고는 휙 몸을 돌렸다.
잠행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태백훈은 유원을 한 번 찾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전과 똑같은 태도로 돌아갔다고 해야 옳았다. 아주 약간이나마 너그러워졌다 싶었던 표정도 온데간데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유원을 피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차라리 저리 나가라 하면 속이라도 편하겠건만,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저녁상은 꼬박꼬박 받았다. 당연히 유원도 그 옆에 어쩔 수 없이 앉아야 했다.
그래 놓고는 태백훈은 들어온 저녁상을 몇 수저 뜨지도 않고 바람 좀 쐬겠다며 자리를 무르곤 했다. 밥풀 하나 남기지 않던 영감께서 어디 아프신 게 틀림없다며 정애가 푸념하는 소리가 매일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주인 없는 식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눈치가 없기로서니 주인도 수저를 내려 둔 상에서 마저 밥을 먹긴 힘들었다.
향시 연녹수가 들려 보내 준 복숭아가 참으로 귀한 식량이었다. 바구니 한가득 있어 반은 누룩에 절여 술을 담갔고 나머지는 껍질째로 야금야금 하나씩 먹고 있었다. 귀한 과일이라 그런지 몰라도 하나만으로도 배가 충분히 불렀다.
차라리 연녹수를 찾아가 보기라도 할까. 종종 놀러 오라고도 했으니 유원이 간다면 아마 저번처럼 반겨 줄 듯도 싶었다. 그럼 어찌 왔느냐며 캐물을 터였다.
왜 도사를 찾아가고 싶은 걸까. 이유야 많았다. 어머니 지병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계신지 묻고 싶었고, 도사들만 안다는 귀한 영초(靈草)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모든 궁금증은 늘 저편에서 흐려지고, 뇌리에 맴도는 말은 하나였다.
대체 영감은 어쩌고 싶은 걸까.
저녁상은 재깍재깍 받으시면서 끼니는 제대로 드시지도 않고, 아침마다 훌쩍 사라졌다가도 밤마다 꼬박 돌아오는지. 저번에는 기생집을 드나들면서 이 혼인이 싫다, 싫다, 온몸으로 고하셨으면서 왜 정작 나가라는 말은 또 하지 않는지.
혹시 손청준이 말했던 그 동정심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동정심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산사에 살 때 유원이 주워 온 어린 까치, 개구리, 다리 다친 고라니 등등. 그런 약하고 미숙한 처지를 불쌍히 여겨 살피는 마음이 바로 동정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존재가 나를 해치지 않는다고 여길 때나 동정이 생기는 법이었다. 태백훈은 유원이 가진 성씨가, 핏줄이 끔찍하게도 싫다 했다.
동정하면서도 싫다는 것인가. 그럼 동정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쫓아 버리든지, 별채에 가둬 두고 기어 나오지 못하게 하든지.
알 수 없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큰스님이라면 이런 사람 문제에 대해 해답을 주셨을까. 하다못해 어머니라면 저보다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하셨을까. 물음에 답해 줄 이가 전부 다 먼 곳에 있으니 해갈할 방도가 없었다.
“과, 관아에 가서 확 고, 고발해 버릴까 봐요.”
무릎을 두 팔로 안은 막둥이가 부루퉁 내민 입술을 삐죽거렸다. 호리병을 안까지 빠닥빠닥 닦던 유원이 대꾸했다.
“무슨 죄목으로?”
“그, 그야 협박죄도 있고.”
“직접 협박한 적은 없어. 게다가 얼굴을 보지도 못했고.”
“며, 명길 나리, 그분이 트, 틀림없잖아요. 저, 저 괴롭히다가, 바, 바로 아기씨한테 트집 잡아서 그렇게 막, 못되게 굴고요! 장독대 깨트렸다고 뒤집어씌우기나 하고.”
전날 있었던 사고였다. 간장독을 깨트린 범인으로 하필 근처를 지나가던 유원이 지목되었다. 주변에 어지럽게 있던 신발 자국을 보고는 신고 있던 신발을 내밀어 사기 조각 하나 밟은 적 없다고 주장하고서야 비로소 결백을 증명할 수 있었다. 갑자기 장독이 스스로 깨질 리도 없으니 일부러 유원을 덮어씌우려고 깨트린 셈이었다.
“괜찮아. 어차피 이런 건 반응할수록 즐기기 마련이니까 무시하는 편이 상책이야.”
“그, 그래도요! 제, 제가 그럴 때는 막, 어떻게든 혼내 줄 것처럼 하셨잖아요.”
“그야 너는 아직 어리고, 이제 나는 네 보호자니까, 네 권리를 책임져야지.”
그 말에 막둥이가 무릎을 안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보조개가 팬 얼굴이 쑥스러운 듯 유원을 올려다봤다.
“이, 이럴 때마다요. 아, 아기씨는 조금, 엄마 같으세요.”
“내가?”
“저, 저는요, 엄마 얼굴도 못 봤거든요. 저, 저를 낳다가 돌아가셨대요. 뒤, 뒤집혀 나온 아이라서, 재수 없었다구. 마, 말더듬이가 된 것두, 그래서랬어요.”
금세 울적해진 막둥이가 고개를 푹 무릎 사이에 수그렸다. 호리병을 내려 둔 유원이 막둥이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앉았다.
“어머니는 좀 과하고, 형아 정도는 괜찮아.”
“혀, 형이요?”
“그래. 나는 네 형아 하고, 너는 내 아우 하고.”
형아, 하고 작게 되뇌던 막둥이가 방긋 웃었다. 폭 안긴 어린아이에게서 풀 냄새가 풍겼다. 유원은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었다. 갓 태어난 망아지 갈기처럼 가늘고 부드러웠다.
어쩌면 이런 느낌도 동정심과 비슷할까. 그렇다면 아마 태백훈은 결코 저를 동정하진 않을 터였다. 손끝 하나 닿기도 싫어하는 자를 동정할 리 없을 테니까.
* * *
살며시 대청을 기어올라 방을 살피자 대충 개어 둔 이부자리만 남아 있었다. 어제 손청준이 찾아와 말하기로는 오늘부터 태백훈이 열흘간 자리를 비우실 거라 하더니 정말로 말도 없이 나가 버리고 없었다.
빈방을 보고 있노라니 헛헛한 기분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몸 안쪽을 비트는 듯 답답한 느낌에 유원은 가슴께를 손으로 탁탁 가볍게 두드렸다. 요즘 들어 태백훈의 부재를 마주할 때마다 괜히 명치가 바늘로 찌른 듯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말도 없이 사라진 빈방을 볼 때마다 말로는 차마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인지라, 오래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정신 차리고, 할 일이나 해야지. 무릎걸음으로 나온 유원은 곧장 뒤쪽으로 돌아가 아궁이를 살폈다. 솥에서 펄펄 오르는 김에서 뭉근한 약초 냄새가 났다. 최근 유원은 약물을 정성스레 달이고 있었다. 염증부터 상처, 습진 등 피부에 좋다는 약초를 궁합에 맞춰 넣은 약이었다.
최근 태백훈과 대면하지 않는 일이야 그렇다 쳐도, 그의 등에 있는 상처는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아무리 오래된 흉터라 해도 꾸준히 살피다 보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비단 치료 외에도 심신에 쌓인 피로 해소에도 충분히 도움 될 터였다.
목간으로 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여종과 부딪칠 뻔한 유원이 가까스로 멈췄다. 괜찮냐 물으려는데, 사방팔방 뛰어다니기라도 했는지 숨을 몰아쉬는 얼굴이 새빨갰다. 여종이 두 손으로 유원의 팔을 붙잡고서 말했다.
“저, 저기요, 호, 혹시, 이 근방에서 가락지, 가락지요, 못 보셨어요?”
“가락지요?”
“예, 순은으로 되었는데, 별 무늬는 없고, 제 이름 사월이가 언문으로 쓰여 있어요.”
옷자락을 붙든 왼손을 보니 약지에 희미한 가락지 자국이 있었다. 은가락지면 상당히 값비싼 패물이었다. 부모가 물려줬든지, 혼인을 약조하며 준 선물일 듯한데. 눈썹을 가늘게 모은 유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로 오는 길에선 못 봤어요.”
“어쩜 좋아.”
울상이 된 사월이 발을 동동 구르며 황망하게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유원은 멀어지는 사월을 안타깝게 지켜봤다. 어쩌다 잃어버렸는진 몰라도 이곳은 집터가 상당히 넓은 데다 곳곳에 낙엽과 눈이 뭉친 자리도 있으니 찾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찬간에 들르니 행랑채 앞마당에서 사월이 동무들 사이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끝내 가락지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문틈으로 빼꼼 찬간 밖을 내다본 정애가 한숨을 폭 쉬며 유원에게 말했다.
“글쎄, 정혼자가 준 가락지가 없어졌대요. 잃어버린 건지, 도둑맞은 건지.”
“보나 마나 도둑맞은 게 틀림없다니까. 잘 때도 손에 끼고 잤다잖아. 게다가 사월이뿐만 아니라 침선 담당하던 선자도 그렇게 아끼던 비단 손수건이 없어졌다더라.”
“많고 많은 댁 중에 여기를 털러 들어오는 정신 나간 놈이 있어?”
“그러니까 도둑이지.”
하염없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큰방에 있던 염옥화가 소란을 보곤 나온 모양이었다. 주저앉아 있던 사월이 허망한 얼굴로 제 방으로 돌아갔다.
애인이 조만간 면천하거든 같이 외거 살림하자고 가진 재산 털어 만든 가락지라던데. 계화가 쯧쯧, 혀를 찼다.
구슬픈 울음소리에 유원도 썩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괜히 옛 생각도 났다. 지아비한테 쫓겨난 뒤로 어머니는 세상이 무너진 듯이 며칠을 울었다. 저이도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겠거니 싶었다.
저녁을 얻어먹은 뒤 유원은 곧장 사랑채로 돌아왔다. 모실 사람도 없어 그리 바쁘지도 않았건만 기력이 쭉 빠진 듯 고단함이 밀려들었다. 기다란 대청을 지나쳐 구들과 연결되는 쪽방 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에 웬 남자가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익히 아는 얼굴은 다름 아닌 장명길이었다.
“제 방에서 뭘 하는 겁니까?”
언질도 없이 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못내 불쾌한 나머지 목소리가 뾰족하게 섰다. 그러자 장명길이 허, 하고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뭘 이럴 줄 알았다는 거지. 씩씩거리며 다가온 장명길이 다짜고짜 유원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네가 훔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