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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33)화 (33/60)

33화

눈앞을 가득 채우듯 앉아 있는 남자의 표정은 참으로 미묘했다.

무심한 얼굴은 아니고, 화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웃는 낯은 아닌데, 굳이 치자면 느른하면서도 차분했다. 굽힌 무릎 위에 양팔을 괸 태백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이번엔 어쩐 일로 붙잡으셨습니까?”

“아….”

작게 탄식한 유원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염옥화가 말을 키우지 말라며 은근히 눈치 준 것이 생각난 탓이었다. 하지만 무려 태백훈이 먼저 말해 보라고 선뜻 다가오지 않았는가. 이보다도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제가 여기로 올 적에, 같이 온 어린 노비 하나가 있습니다.”

“몸종으로요?”

“몸종은 아니고, 원래는 중매인 밑에 있던 노비인데, 얼마 전에 대감댁에서 연락 오기를 제 아랫것으로 두라고 하였고요.”

‘대감댁’이라고 말을 할 때 태백훈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유원은 천천히 뒷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홀로 울고 있어 사정을 캐물으니 여기서 일했던 종인한테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종인? 누구한테?”

“이름은 장명길이라 하는데, 얼마 전까지 영감 밑에서 일했다고 들었습니다. 집사한테도 말씀드리긴 했는데, 신경 쓸 곳이 많다며 말씀을 삼가셨고요.”

“…그자가 괴롭혔다는 말이 확실합니까?”

재차 확인하는 물음에 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무거운 한숨을 쉰 태백훈이 허리를 폈다. 어째 얼굴을 보니 염옥화한테 사정을 전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썩 마뜩잖다는 표정을 마주하려니 속이 벌렁거렸다.

곧장 문밖으로 나선 태백훈이 가지런히 놓아둔 신발을 신더니 발소리도 없이 곧장 성큼성큼 걸었다. 유원은 힘없이 두 눈을 감았다. 염옥화의 말대로 쓸데없이 영감한테 말을 터놓았구나, 싶어 가슴이 스산해졌다.

“백훈 형님. 저 왔습니다.”

사랑채로 통하는 중문 앞에 곽현욱이 서 있었다. 팔을 좌우로 휙휙 흔들며 반긴 그가 혈혈단신으로 나온 태백훈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저더러 늑장 부리지 말라 구박하시고는 정작 형님, 아니, 영감께서 준비도 안 하셨답니까? 설마, 맨몸으로 야산을 돌겠다, 그런 소리는 안 하시….”

“현욱이 너 때마침 잘 왔다.”

“때마침이요?”

“최근에 병방(兵房) 밑으로 보낸 장명길이란 자를 기억하느냐?”

뜬금없는 물음에 의아해하면서도 곽현욱은 착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수 없고 조용한 인상이었는데, 태백훈 옆에 있을 적에도 별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다만 곽현욱이 보기엔 관상이 영 맥없는 동태 꼴이라 그리 좋은 감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보낸 종인은 어쩐 일로 찾으시나. 태백훈이 턱짓으로 문 너머를 가리켰다.

“내가 물어볼 것이 있다 하고 데려와.”

아닌 밤중에 도백저로 호출된 장명길은 사색이 되어 흙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어찌나 조아리던지 상투까지 흙이 묻을 기세였다.

“어찌!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답니까? 소인은 정녕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럼 한 번도 접근한 적이 없었더냐.”

“아마 지나가며 마주친 적은 있겠지만 분명 착각이옵니다. 오늘, 오, 오전에 만났다고 했지요? 그때 소인은 닭 피를 성시(城市) 바깥에 뿌리던 중이었을 뿐입니다. 영감께서도 알다시피 눈비가 섞이는 이맘때마다 사람 다니지 않는 길목에 닭 피를 뿌리지 않습니까.”

확실히, 매년 봄이면 원경도에선 큰 부(府)는 물론이고 민가 주변에 수탉의 피를 뿌리는 풍습이 있었다. 재액을 막으려는 의미도 있지만 눈 내리는 날이 줄면서 활동량이 늘어난 요수들이 민가로 내려올 때를 대비하여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로 유인하려는 목적이었다.

도시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요수는 대부분 지능이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냄새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맡았는데, 원경도 사람들은 이 점을 이용해 피를 뿌려 민가로 들어오는 흔적을 지우곤 했다. 그리하여 봄눈 내릴 무렵엔 자연스럽게 피를 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장명길은 원혜부 병방의 잡역꾼으로 들어갔으니 그런 자질구레한 일을 맡을 만도 했다.

“허나 그 피를 지나가던 사람한테 뒤집어씌우는 짓은 충분히 고의로 보일 만한 일이지 않나.”

“정말로 고의가 아닙니다! 오전에 그 나무꾼 애랑 분명 마주치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한참 동안 입 열기를 주저하던 명길이 곁눈질로 좌측에 있는 염옥화를 한 번 힐끔, 그런 다음 우측에 있는 하인들 표정을 살폈다. 그러더니 대단히 조심스럽고 은밀한 말을 실토하기라도 하듯 떠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시, 실은 그 노비가 앞도 안 보고 무작정 달려오지 뭡니까. 그러다 저랑 부딪치면서 자루를 놓쳤는데 그 피가 아이 옷에 묻었습니다. 괜찮냐고 진정시키기도 전에 피를 보곤 지레 놀라 도망가 버렸고요. 소인은 정말로 그 아이한테 해코지를 하려던 것이 아닙니다! 원수지간도 아닌데 뭣 하러 그런 수고로움을 해 가면서 노비 하나를 구박하겠습니까? 여, 영감께서도 소인을 삼 년간 권솔로 데리고 있으셨으니 소인의 성정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 여기 있는 행랑 사람들도 제가 얼마나 성실했는지 잘 알 테고요.”

흙바닥에 재차 머리를 찧은 장명길이 대청에 선 태백훈을 향해 울분에 찬 읍소를 했다. 정말로 억울하고 원통하다는 듯 찢어지고 쉰 목소리에 구경거리 났다 하며 몰려들었던 하인들이 서로 눈짓했다.

솔직히 장명길 저분께서 딱히 그럴 인간은 아니지 않나. 그 막둥이란 노비도 제대로 본 건 아니라던데. 그럼 물증도 없이 우겼단 소리네. 한낱 상것이 중인한테 겁도 없이 대들었구먼. 게다가 장 씨네 차남인데 말이야.

수군거리는 주변 소리에 막둥이가 잔뜩 위축된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 진짜예요. 저 거짓말한 거 아니에요….”

당장이라도 눈물을 펑펑 쏟을 듯한 얼굴이 딱하기 짝이 없었다. 유원은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장명길을 똑바로 주시했다. 막둥이의 말을 믿기는 하지만 당장 그를 진범이라 몰아붙일 증거물도 없었다. 피 묻은 옷이야 막말로 장명길이 말한 대로 부딪쳐서 생겼다는 주장도 아예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장명길의 변명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경망한 호소처럼 들렸다. 막둥이 편을 드느라 괜한 편견 때문에 그렇게 들리는 걸까. 하지만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목에만 뿌린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사람과 부딪칠 일이 생겼단 말인가. 좁은 길도 아니었을 텐데.

그때, 무릎으로 걸어온 장명길이 막둥이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미안하구나!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야. 내 이렇게 빌지 않느냐? 응? 뭔가 큰 오해를 빚은 모양인데 정말로 실수였다. 버린 옷은 깨끗한 한 벌을 새로 내어 줄게. 응?”

“이, 이, 이러지 마세요. 며, 명길 나리.”

흡사 아귀처럼 들러붙어 사과를 반복하는 얼굴에 막둥이가 소스라치며 명길이를 밀어냈다. 마치 막둥이가 일러바친 말 때문에 일신에 문제가 생긴 사람 같았다. 이에 하인들의 수군거림이 더 커졌다.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보다 못한 태백훈이 손을 내저으며 좌중을 침묵시켰다.

“됐다. 명길이가 노비에게 먼저 실수라 했고 정황을 따져 봐도 고의라고 할 만한 증거는 없으니 이쯤 해 두는 것이 좋겠다. 설령 그런 흉악한 꾀를 부린 자가 있다 하더라도 눈치가 있다면 적당히 사리겠지.”

“무, 물론이지요. 영감.”

“그만 일어나 보거라.”

관자놀이를 약하게 지분거린 태백훈이 장명길을 향해 명령했다. 굽실거리며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던 장명길이 풀썩 주저앉았다. 오자마자 반 시진 내내 꿇어앉은 탓에 다리가 풀린 모양이라며 하인들이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부축을 받고 일어난 명길은 쥐가 난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문밖을 나갔다. 이에 하인들도 슬금슬금 자리를 파하는 눈치였다.

한산해진 사위를 응시하는 태백훈은 사뭇 무겁고 음산한 표정이었다. 깊은숨을 내쉰 그가 입을 열었다.

“…원래 겁 많은 개가 원래 요란하게 짖는 법이라지요. 그래서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만 보고도 짖는 개는 데리고 다니기 어렵고요.”

“…….”

“시도 때도 없이 주인을 불편케 하니, 짖지 않느니만 못하지 않겠습니까.”

겁 많은 개라 함은 비단 막둥이를 두고 하는 힐난만은 아니었다. 그 또한 유원이 과민하게 반응했다 여긴 것이었다.

데려온 말에 올라탄 태백훈이 곁눈질로 유원을 내려다봤다. 무정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에 가슴께가 섬찟하게 울렸다. 마치 얇은 칼날로 저미는 듯했다.

이윽고 태백훈은 곧장 고삐를 당겼다. 배웅조차 달갑지 않다는 듯 강경한 태도였다.

“저기, 그럼 저도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영 불편한 낌새에 떫은 입맛을 다시던 곽현욱도 말머리를 돌렸다. 전부 사라진 후에도 유원은 쉬이 쪽방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연신 걱정으로 곁을 떠나지 못하는 막둥이를 겨우 달래 행랑채로 돌려보냈다. 전 주인에게 값을 치렀으니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에도 막둥이는 쉬이 기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지금으로선 차라리 돌려보내는 쪽이 나았을지도 모를 터였다.

머리는 복잡하고 자꾸만 버릇처럼 한숨이 나왔다. 태백훈이 결론 내린 시시비비에 문제는 없었다. 저택 내 큰 어른이자 주인으로서는 나름대로 합당한 판단을 내린 셈이었다.

그러나 자꾸만 마지막으로 저를 쳐다보던 그 새카만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괜한 말을 믿었구나. 그리 힐난하는 듯한 눈빛이지 않았던가.

하는 수 없지. 먼저 태백훈한테 자초지종을 말하며 청한 것도 유원이었다. 일단락되었으니 당분간은 어지간해선 막둥이를 상대로 오가던 난폭한 괴롭힘도 줄어들 터였다. 불편한 뒷말이야 오가겠지만 그도 잠시면 흐려지리라.

얼른 쪽방에 돌아가 눈을 붙일 생각에 잔뜩 움츠린 채로 담장을 지나던 때였다.

젊은 여자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났다. 이 밤에 잠도 없는 어린 여종들이 수다라도 떠는가 싶었다.

“나리, 연기 한번 대단하시던걸요? 혀에 기름이라도 바르고 오셨는가? 소녀, 진짜로 나리한테 이입해서 속상했다니까요.”

“여기 오기 전에 장독에 가서 고추장 퍼먹고 왔더니 웬걸,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핑 돌던데.”

이어지는 목소리가 퍽 익숙했다. 문 뒤에 몸을 숨긴 유원은 별채 밑에서 은밀하게 붙어 있는 두 남녀를 가만히 지켜봤다.

아무도 없는 별채 기둥 뒤에서 그들은 이리저리 뺨과 입을 맞추고, 몸을 비비적거렸다. 한참 후에 헉헉거리며 일어난 사내는 장명길이었다.

“어차피 그 말더듬이 새끼 말은 아무도 안 믿어 줄 거야. 차라리 잘됐지.”

“근데 어쩌다 주인어른께서 아신 거래요? 그 꼬맹이가 고자질 한 거래요?”

“말더듬이가 영감한테까지 찾아갔을 리는 없으니 그 빌어먹을 옥양 샌님이 했겠지.”

“아아, 그 도련님 말이에요? 첫날부터 소박맞았다던?”

크게 박장대소한 그가 동조했다. 그래, 그 소박맞은 도련님.

“오죽하면 초야부터 내쳤겠냐고. 그래 놓고는 뭐가 잘났다고 나대? 정식으로 혼례까지 치러 놓고 안주인 행세도 못 하는 주제에.”

본때를 좀 보여 줄까 봐. 실실 험담을 늘어놓던 사내가 기척을 느끼고는 문 쪽을 쳐다봤다. 나리, 왜 그러세요? 품에 기대 있던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다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저기서 그 도련님께서 우리 구경하는데?”

“어마!”

“홀로 밤 지새우려니 옆구리가 어지간히도 적적하신가 봐. 남의 연애질이나 훔쳐보고.”

재수 옴 붙겠어. 방에 가서 마저 놀까. 장명길이 비웃는 표정으로 유원이 있는 쪽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차가운 밤하늘 사이로 하늘하늘 눈발이 흩날렸다. 유원은 담을 짚은 손끝을 힘껏 움켜쥐었다.

아까 대청 앞에서 조아리며 순박하고 착실한 종인이었음을 극구 강조하던 모습은 전부 꾸며 낸 행세였구나. 막둥이 말은 더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다. 여태 그 어린애를 괴롭혀 온 치도 저자일 터였다.

게다가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차마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뻔히 들은 걸 알면서도 미안함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지독한 악의에 악다문 턱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쉰 입김이 하얗게 부서졌다. 오한이 아니라 모멸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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