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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32)화 (32/60)

32화

다행히도 막둥이는 겉보기와 다르게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팔꿈치와 손바닥이 까지고 턱에 멍이 들긴 했지만 피로 범벅이 된 옷에 비하면 가벼운 상처였다. 아마도 옷에 묻은 피는 막둥이가 흘린 피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옷에 묻은 피와는 별개로 막둥이 몸 여기저기에 멍이 수두룩했다. 단순히 일하다 생긴 상처라기엔 심한 수준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그, 그, 그게요, 그러, 어니까요….”

막둥이의 두 눈이 금세 촉촉하게 젖어 들더니 죄송해요, 하며 울먹거렸다. 이러다 경기(驚氣)할까 싶은 나머지 유원은 일단 막둥이를 살살 달래며 쪽방으로 데려왔다. 찬간에서 얻어 온 조청은 원래는 복숭아주에 들어갈 재료였지만 급한 대로 막둥이 입에 숟갈을 물렸다.

단것이 입에 들어가니 막둥이는 서서히 진정하는 기색이었다. 조청을 꿀떡 삼킨 막둥이가 훌쩍 콧물을 들이켰다.

“새, 새벽에 나, 나무 할아부지랑 올라가는 기, 길이었는데요.”

막둥이의 말은 이러했다. 평소처럼 나무꾼 어르신과 땔감을 캐러 앞산에 올라가는데 어르신의 아들이 찾아왔다. 집에 급한 용무가 생긴 어르신은 막둥이더러 혼자 가라 했고, 막둥이도 군말 없이 혼자서 늘 가던 야산으로 향했다.

막 장승 앞을 지나려는데, 갑자기 어떤 사내가 붙들었단다. 무슨 일이냐 묻기도 전에 그들은 머리에 자루를 확 씌웠고 막둥이는 당황한 나머지 허둥거리며 넘어지길 반복했다.

저놈 팔푼이 같은 꼴 좀 보래. 깔깔거리는 여자 웃음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머리에 쓴 자루를 벗어 보니 온몸이 새빨간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고 했다.

“그거 말고 또 다른 일은?”

“예, 예전에도, 가, 가, 갑자기 어디서 도, 돌이 날아오고요.”

사정을 들은 유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들어도 명백한 괴롭힘이었다. 외지, 그것도 도성 출신에게 박하게 구는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반대로 옥양에서도 원경도 사람들을 괜한 말로 비난하는 일이 허다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단순한 텃세라 해도 도가 지나친 행위였다. 만일 막둥이가 겁먹어 마을이 아니라 반대편 산으로 달아나기라도 했다면,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온 산짐승이나 요수한테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었다.

“얼굴 봤어? 아니면 목소리라든지, 기억나는 거 있어?”

“그, 그게, 너무 노, 놀라서, 제대로 보지는 모, 못했는데요. 근데, 누가 해, 했는지 알 거 같기도 하구요.”

“그게 누군데?”

“그, 근데 화, 화, 확실하진 않아서….”

“일단은 나한테 말해 봐. 응?”

막둥이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맞잡은 유원이 재차 물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에도 막둥이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다 결심한 듯 수차례 심호흡한 막둥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장명길 나리라고… 워, 원래는 영감마님 조, 종인이었는데, 아, 아기씨 들어오기 전엔 사랑채에 이, 있었대요.”

“장명길? 예전에 사랑채에 계시던 분이요?”

행랑채 큰 마루에 앉아 놋수저를 닦던 정애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고개를 한차례 끄덕인 유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잘 아는 분이세요?”

“으흠, 잘 안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청지기니까 보기야 자주 봤었죠. 엄청 귀찮게 굴었거든요. 영감께는 드릴 진지는 이렇게 올리면 안 된다, 찬이 변변찮다, 물은 왜 맹물이냐, 짜다, 싱겁다. 상전이 따로 없었다니까요.”

약간의 푸념으로 시작된 정애의 말은 이러했다. 장명길은 태백훈이 도성에서 원혜로 아주 넘어오기 전부터 같이 있었던 종인(從人)으로, 노비가 아닌 중인(中人)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다 올해 초에 태백훈이 데리고 있던 젊은 종인 중 몇을 내보냈는데 그중 한 명이 다름 아닌 장명길이었다.

“듣기로는 주인어른 옆에 있으면서 거천(擧薦)을 바랐다던데.”

“거천이요?”

“네, 이러나저러나 주인어른께선 대단한 무인이시잖아요? 그런 분들이 실력이 출중한 인재를 추려 추천하면 무과를 안 봐도 군관이 된대요. 그 왜, 곽현욱 나리도 주인어른 밑에 있다가 토벌부대 대장직을 맡으셨다던데, 그분께서도 그런 식으로 자리 하나 받아 볼까 했겠죠.”

뭐야, 둘이서 자꾸 뭘 그렇게 속닥거려? 슬쩍 끼어드는 목소리에 뒤돌아본 정애가 마침 잘 물었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장명길 나리라고 접때 영감 밑에 있던 분 말이야. 그분 여쭤보신다는데.”

“아, 그 장 씨 어르신네 차남?”

덩달아 구석에서 가마솥을 박박 긁던 여종까지 대화에 불쑥 끼어들면서 금세 대화는 시장통처럼 산만해졌다.

찬간 여종들의 말에 의하면 그 장명길이란 이는 태백훈에게 상당히 신임 받은 데다가 행랑채에서도 평판이 꽤 좋았다. 이곳 원혜 토박이에, 평소 일하는 품새도 성실했고 심지어 얼굴도 말끔해 행랑 식구들과 별 갈등 없이 잘 지냈다 했다. 한 달 내내 저를 괴롭혔다며, 막둥이가 벌벌 떨며 이실직고했던 말과는 딴판이었다.

문득 유원은 태백훈에게 이끌려 사랑채에 왔던 첫 새벽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 당시 대청에 서 있던 젊은 사내가 아마도 그 장명길이었으리라. 유원이 기억하기에도 딱히 모난 인상은 아니었던 듯싶었다. 대강 키는 저와 엇비슷했고 점잖으면서도 수더분한 분위기였다.

혹시 막둥이가 착각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차마 어디다 말도 못 해 장독간에서 혼자 울고 있던 모습을 생각하면 착각이라 넘겨짚을 수 없었다. 게다가 옷에 들러붙었던 시커먼 피 또한 거짓이 아니었다. 적어도 막둥이를 괴롭히는 무리가 있음은 사실일 터였다.

어찌 되었든 행랑채 내부 일이니 집사에게도 알려야 마땅했다. 하여 유원은 우선 집사 염옥화를 찾아가 이래저래 사정을 설명했다. 연고도 없이 타지로 온 어린아이가 과도한 텃세를 당하니 조치해 달라. 근심 어린 간청에 염 씨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뭔가 착오일 수도 있잖습니까.”

“착오라니요?”

“그 애가 명길이를 직접 보진 못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옷을 더럽혔다 꾸중이라도 들을까 아는 이름을 말한 것일지도 모르지요.”

“부인 마님.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뻔했는데,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아연실색한 나머지 유원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정리하던 가계부를 내려놓은 염옥화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걱정하시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유원 님께서도 너무 심려하진 마시고요. 아무쪼록 영감 귀에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저택에서 권솔들끼리 내가 옳네, 그르네 하는 일은 한두 건도 아닙니다. 게다가 명길이라면 이제 이 저택 사람도 아니고요. 나간 사람까지 제가 매사 쫓아다니며 신경 쓸 수는 없잖습니까?”

마치 별것도 아닌 일에 유원이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기라도 한다는 듯했다. 제 아랫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박대할 작정인가. 엄연히 행랑에서 제 밥벌이하는 막둥이한테 이리 매정할 줄이야. 심지어 태백훈한테도 말하지 말라니. 노골적으로 덮어 두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문밖에서 여종 하나가 큰어멈, 하고 염옥화를 찾았다. 공납품을 확인해야 한다는 전언에 염옥화는 더 물을 말이 있냐는 듯 무뚝뚝한 얼굴로 유원을 쳐다봤다. 길게 대화를 이어 봤자 소용없을 테니 유원도 일단은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기씨!”

쪽방 문간에 쪼그리고 앉아 유원을 기다리고 있던 막둥이가 쪼르르 반겼다.

“크, 큰어멈께서 뭐라세요? 호, 혹시, 제, 제가 잘못했다고 하셔요?”

걱정스러운 얼굴을 내려다보며 유원은 이제 괜찮을 거라 애써 안심시켰다. 그러나 답답한 속은 도무지 편해지진 않았다.

* * *

젓가락을 쥔 손이 하염없이 식상 위에서 방황했다.

반찬이나 밥에는 문제가 없었다. 태백훈한테 올라온 석반이니 갓 만든 찬부터 김이 오르는 국과 반질반질한 수저 하나까지 정성스러운 상이었다. 그저 유원이 이 자리를 채 적응하지 못한 탓이었다.

밥 한술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유원과 다르게 태백훈은 묵묵히 식사 중이었다. 어찌나 반듯하고 정갈하게 드시는지 찬을 만든 이가 본다면 흐뭇해할 만한 광경이었다.

대체 태백훈은 무슨 생각으로 저녁 겸상을 고수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지난번 목간에서 나갔을 때만 해도 기분이 퍽 상한 줄 알았는데, 저녁상이 들어오자마자 유원에게 앉으라며 눈짓했다. 그렇다고 식사 중에 크게 시중들 일이 있지도 않았다. 찬물이 마시고 싶다며 도중에 심부름 보내는 일도 없고, 뜨거운 차나 술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

겨울밤 서릿발 같은 얼굴만큼이나 신경도 차가운 무쇠로 되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태백훈이 그날 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저로서는 다행이었다.

슬쩍 태백훈을 살폈다가 눈이 마주칠세라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목간에서 있었던 장면을 떠올리자면 괜히 귀 끝이 홧홧해지고 목 아래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낯선 감각이라 형용하기도 어려운 느낌이었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닌데. 태백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읍소하려면 차라리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가 그나마 적기였다. 그런데 쉬이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일 태백훈마저 별일 아니라며 저어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직접 그 명길이란 자를 찾아가기라도 해야 하나. 미지근해진 국을 수저로 휘적이던 유원이 한숨을 삼키던 그때였다.

“음식 가지고 언제까지 장난질하시려고요.”

고요하던 방 안에 낮고 깊은 음성이 울렸다. 약간 곤두선 듯한 말투에 딸꾹질이 튀어나올 듯해 입가를 손으로 막은 유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태백훈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유원은 멋쩍음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아직, 조금 뜨거워서요.”

솔직히 말하면 많이 식긴 했지만, 그나마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원래 뜨거운 음식에 약하기도 했다. 가만히 유원을 들여다보던 태백훈이 흠, 하고 길게 숨소리를 내쉬었다.

“상당히, 고양이 혓바닥이신가 봅니다.”

“고양이 혓바닥이요?”

“고양이들은 뜨거운 걸 잘 못 먹거든요. 그래서 뜨거운 음식을 잘 못 먹는 사람한테 종종….”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유원은 두 눈을 깜빡거렸다. 뜨거운 음식을 식히는 태도를 두고 멍청하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고양이 혓바닥이란 표현은 처음이었다. 순간 말끝을 흐렸던 태백훈이 헛기침했다.

“…아무튼, 자리는 피해 드릴 테니 식혀 드시든지 하세요.”

몸을 일으킨 그가 옷매무새를 정돈하더니 외투와 갓을 집어 들었다. 어디론가 나가려는 듯한 분위기였다.

“늦을 것이니 여기 불은 일부러 켜 두지 않아도 됩니다.”

외당 불을 켜두지 않아도 된다, 함은 새벽 넘어서도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의미였다. 혹은 그다음 날에 돌아올지도 몰랐다. 하루, 이틀 사이에 또 막둥이가 해코지를 당하면 안 되는데. 괜히 초조함에 애가 달았다.

“영감, 잠시만요!”

방을 막 나서려는 태백훈을 붙잡은 유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초야 날, 매몰차게 나가던 그를 한 번이라도 붙잡아 보려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비굴하게 빌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 지금이라고 다를까.

스르륵, 도포 자락을 쥐고 있던 힘이 풀렸다. 그대로 나가시려니 싶었는데, 푹 숙인 고개 위로 움직이는 기척이 가까웠다.

조아린 몸 위로 짙은 그림자가 아로새겨졌다.

“기껏 사람 발걸음 막으시곤 쳐다보지도 않으시는군요.”

“…….”

유원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무릎을 굽혀 쪼그리듯 앉은 태백훈이 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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