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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31)화 (31/60)

31화

무정하던 검은 눈동자는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고개를 저은 유원은 그의 어깨에 양손을 조심스럽게 짚었다.

약방에 있을 때 배운 안마술은 유원이 익힌 재주 중 하나였다. 당시 약방 근처에 큰 주점이 있었는데 그곳 기생들은 어린 유원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해 약방 배달을 자주 시켰다.

덩달아 유원도 기생들을 누나, 누나, 하며 곧잘 따랐는데 그중 인기가 유독 많던 한 기생이 유원에게 훗날 쓸모가 있을 것이라며 가르쳐 준 손재주가 다름 아닌 안마였다.

유원은 두 손에 연고를 듬뿍 묻혔다. 살살 손 사이에서 비비자 온기에 연고가 흠뻑 녹아 손가락에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으음….”

타박상으로 붉어진 부근에 다다르자 태백훈이 작게 신음했다. 아프다기보단 긴장으로 뭉친 근육이 조금씩 풀리면서 저절로 나온 소리인 듯했다.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흡족한 유원은 연고가 욕의 안쪽으로 부드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 뭉근하게 손끝으로 타박상을 두드렸다.

내친김에 그의 어깨와 팔을 능숙하게 주물렀다. 손바닥 안에 들어찬 근육은 촘촘하고 옹골찼다.

‘제아무리 단단하고 완고한 대장부라도 여기서부터 겨드랑이와 가슴까지 부드럽게 쓸어 주면, 버들잎처럼 부드러워지기 마련이지.’

유원은 기억을 더듬어 기생이 해 준 대로 손끝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니까 우선은 귀 아래, 맥을 짚고 근육이 움직이는 흐름을 느낀다. 그대로 천천히 부드럽게 쓸어내린 다음 목뒤 어깨에서부터 손을 날개처럼 펼치고 반죽을 주무르듯 부드럽게 문지르면….

어깨를 아프지 않게 주무르는데 집중한 유원의 몸이 앞쪽으로 쏠렸다. 어느덧 두 사람 사이 간격은 손톱보다도 좁아진 뒤였다. 양손을 부지런히 놀릴 때마다 옷고름이 태백훈의 목뒤를 살랑거리며 간질였다.

“저, 혹시 아프십니까?”

“아프진 않은데, 뭔가….”

대답하다 말을 멈춘 태백훈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턱을 젖힌 그가 단 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낮잠에서 막 일어난 커다란 고양이 같았다. 확실히 칼을 자주 쓰시느라 그런 건지 어깨며 팔 근육이 죄다 뭉쳐 있었다.

두 손을 앞으로 뻗어 빗장뼈 부근을 만지려던 그때였다.

순간 몸을 돌린 태백훈이 유원의 손목을 붙잡아 저지했다. 손이 꺾일 듯한 강한 힘에 유원이 미끄러졌다.

“아…!”

욕조로 거꾸러질 뻔한 몸은 가까스로 물에 빠지지 않았다.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유원은 몸에 닿은 뜨끈한 온기에 반 박자 늦게 상황을 인지했다.

어느새 욕조에서 일어난 태백훈은 유원의 몸을 두 팔로 받쳐 잡고 있었다. 아니, 받쳐 주는 정도가 아니었다. 허리를 안은 탓에 거리가 몹시 가까웠다.

숲에서 그의 말을 얻어 탔던 순간이 떠올랐다. 등 뒤로 닿은 그의 옷깃 너머로 들리던 생동한 감각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

마주한 태백훈의 낯빛이 묘하게도 붉었다. 자꾸만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고, 침을 삼키는 소리도 더욱 크게 들렸다.

“안마가….”

깔깔한 입을 혀끝으로 축인 태백훈이 재차 말을 이었다.

“참으로 신통하십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짓을 배운 겁니까.”

조금은 당황스럽고, 조금은 어이없다는 듯한 날카로운 표정에 서둘러 품에서 멀리 떨어진 유원이 고개를 숙였다. 뭘 잘못했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손힘을 조절 못했나. 아니면 너무 가까이 붙었던가.

“제가, 또 실수했습니까?”

“실수?”

“예전에 기방에서 배워서 했을 때는 다들 훌륭하다 하셨는데, 간만에 해서 서툴렀나 봅니다.”

“…….”

말문을 잃은 태백훈은 어디서부터 되짚어 물어야 할지 막막하단 얼굴이었다.

“대체 기방을 얼마나 드나들었던 겁니까?”

“종종 심부름을 해 주느라 자주….”

“심부름을 했다?”

재차 묻는 말에 유원은 물에 젖은 소매로 입을 가렸다. 천한 놈 티가 풀풀 나는구나. 대감은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태생이 천한 것은 천한 티를 쉽게 벗지 못하지. 그래서 가축처럼 자주 때려 가며 처지를 알려 줘야 하는 법이야.

으름장을 놓던 홍세환의 노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놈한테 괜한 트집거리를 줬단 말이 돌기라도 한다면.’

탁, 탁, 곰방대 두드리는 환청에 귀가 얼얼했다. 도련님들과 대감댁 행랑 사람들 웃음소리까지 한데 맴도는 듯해 식은 손끝이 달달 떨렸다. 입 안쪽 볼을 힘껏 깨문 유원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오래전이라, 착각했습니다.”

다시 캐물어도 모른다고만 잡아뗄 생각이었다. 욕조를 나온 그의 몸이 유원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젖은 욕의를 벗고 옷을 사부작사부작 갈아입는 소리가 고요하게 이어졌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두루마기를 걸친 그가 유원을 돌아봤다.

“그 안마술은 특히 다른 사내한테 뽐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 * *

“휴우.”

불쏘시개를 정돈하던 유원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벌써 몇 번째 쉬는 한숨인지 셀 수 없었다. 심란한 기분이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잡념을 떨쳐 내려 바쁘게 움직였으나 틈만 나면 오전에 있었던 상황이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기방에 드나들었다는 말에 실망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어느 새색시가 기방에 출입했다는 말을 당연스럽게 떠들어 댈까. 유원은 그저 기생들 심부름이나 하고 누나 동생 하며 지냈을 뿐이나 앞뒤 모르는 이가 듣기에는 여색 꽤나 밝힌다 싶을 터였다.

아주 조금이나마 영감이 저를 관대하게 봐 주는 날이었는데, 과오를 후회해 본들 엎질러진 물이었다. 주제를 모르고 설친 까닭이다. 홍세환의 말이 옳았다. 태생이 천한 놈이라 처지를 망각한 탓에 일을 그르쳤다.

콧바람이나 쐴까 싶어 유원은 마구간으로 행선지를 잡았다. 마구간은 행랑채가 아니라 별채 외곽에 있었다. 마구간지기는 측간에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유원은 마구간 가장 안쪽에 서 있는 검은 말에게 다가갔다. 다른 말과 달리 혼자 고고하게 서 있는 검은 말은 태백훈의 애마라고 했다.

“잘 지냈어?”

유원은 검은 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울타리 밖으로 고개만 내민 말이 유원의 얼굴과 몸을 이리저리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머리를 유원에게 가깝게 맞댔다. 반가움을 드러내는 몸짓에 유원은 기쁜 얼굴로 말의 귀와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착하기도 하지.”

동물들은 순수하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아도 눈과 몸짓, 소리로 감정을 충분히 드러냈다. 산사에서 살 때도 그랬지만 절을 떠난 이후론 더더욱 말, 양, 소들과 어울려 노는 편이 더 좋았다.

물론 사람들 앞에선 티 낼 수 없었다. 가뜩이나 괴물이니 요수 혼혈이니 하는 소리를 듣는데 동물한테 말을 거는 모습을 보였다가 무슨 소릴 들을까 싶어서 꾹 참곤 했다.

그때였다. 깍깍 우는 까마귀 소리에 옆을 보니 울타리에 까마귀가 앉아 있었다. 낯설지 않은 생김새에 유원은 금세 까마귀를 알아봤다. 유원이 날개를 고쳐 줬던 그 까마귀였다.

그새 손청준이 왔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까마귀 무리도, 손청준도 없었다. 오로지 이 까마귀 한 마리뿐이었다. 마치 저를 찾아온 듯한 기세였다.

“배고파?”

유원은 까마귀의 부리를 건드리며 용건을 물었다. 까마귀는 고개를 갸우뚱 흔들더니 부리를 벌려 깍, 하고 울었다. 까마귀 말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배고파서 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나리 대신에 심부름이라도 하러 왔어?”

까악, 깍.

이것도 아닌가? 그 순간 무릎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멀리서 마구간지기 배 씨가 바지춤을 추스르며 걸어오고 있었다.

“뭐야, 또 당신이오?”

말 옆에 서 있는 유원을 알아본 배 씨가 별놈을 다 본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종종 말이나 태어난 지 열흘 된 송아지를 보려고 유원이 찾아온 것을 기억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영감 옆에 있어야 할 분이 수말 옆에서 뭐 하시던 중인가.”

벌게진 눈이 유원을 위아래로 훑었다. 저택 내에서 소박맞은 도련님 소문이야 워낙에 자자했다. 곱기는 곱네. 좋은 집 도련님이라더니 때깔이 좋았다. 계집종들이 괴이쩍다며 흉을 보던 그 눈깔도 막상 보니 그냥 녹빛이 돈다 싶을 뿐이었다. 그 은근함이 오히려 색기 있어 보이기도 하고.

군침을 삼킨 배 씨는 유원 옆에 있는 검은 말을 힐끗 쳐다보곤 휘파람을 불었다. 태백훈의 사나운 애마가 이리도 얌전한 경우는 드물었다.

“암만 서방과는 궁합이 안 맞으신다 해도 그렇지, 영감네 애마랑 붙어먹긴 힘들 텐데.”

저급한 빈정거림에 유원은 더 들을 말도 없다는 듯 박차고 나섰다. 뒤에서 배 씨가 낄낄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잠깐 말이나 보려고 왔을 뿐인데 농담 같지도 않은 말을 들어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차라리 마당에 가서 비질이라도 한 번 더 하는 편이 낫겠다. 그리 결심하며 담장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훌쩍, 훌쩍. 어린아이가 코맹맹이로 우는 소리였다.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익숙한 울음소리와 한데 섞여 까마귀 우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장독대 뒤편에 누군가가 웅크려 앉아 있었다. 그를 알아본 유원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막둥아?”

움찔, 고개를 든 막둥이가 유원을 보더니 금세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아기씨….”

억지로 눈물을 멈추려 막둥이가 소매로 눈을 마구 비볐다. 유원은 막둥이한테서 묘한 낌새를 느꼈다. 산에서 내려왔다지만 흙이나 풀냄새가 아니라, 웬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것도 피비린내.

한달음에 다가간 유원은 막둥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어린아이 옷이 피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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