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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30)화 (30/60)

30화

사랑채 곳곳에 놓인 등과 초를 갈고 나니 두 식경이 감쪽같이 지나 있었다.

“후유.”

쪼그리고 있던 두 다리를 편 유원은 습관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할 일은 이만하면 됐다 싶어 마무리 지었다. 아궁이 재도 긁어냈고 방에서 쓰는 화로 숯도 새것으로 갈았다.

타고 남은 재는 긁어모아 찬간과 세답터에 갖다줬다. 마침 설거지할 때 쓰는 잿물이 다 떨어졌다며 반색한 정애는 유원을 보곤 측은한 눈길을 보냈다.

“아이고, 가뜩이나 마르셨는데 얼굴이 반쪽이 다 되셨네.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아요.”

“다행이다. 막둥이 고 어린 것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아프다고 앓아누운 첫날에는 무슨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니까.”

지금 생각해도 고단하다는 듯 정애가 한숨을 쉬었다. 말만 들어도 막둥이 표정이 그려지는 듯했다. 이틀 누워 있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병문안을 왔었는지 셀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털조끼 입었네요?”

“예, 아침에 부인께서 주시더라고요.”

“아유, 따뜻해 보인다. 큰어멈이 바느질은 이 집에서 으뜸이긴 해요. 어지간한 옷이랑 버선은 수선집 안 맡겨도 된다니까.”

종알거리던 정애가 문득 유심히 유원을 쳐다봤다.

“그 목도리도 못 보던 물건이네요? 색감 곱다.”

유원은 아차, 싶어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전날 밤에 태백훈이 손수 매어 준 목도리였다. 이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정애가 괜한 물음을 했다는 듯 손사래 쳤다. 하기야 도성에서 왔는데, 값비싼 목도리쯤이야 어련히 가져왔겠거니 하는 결론이었다.

오전에 염옥화가 그를 불러 털조끼와 목면 저고리와 바지를 건넸다. 상당히 질 좋은 옷감에 웬 옷이냐 물으니 태백훈이 내어 주는 옷이라 했다.

그녀가 부른 연유는 옷만이 아니었다. 염옥화는 유원에게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옥양에서 온 편지였다. 다만 대감이 아니라 행랑 집사가 대신 쓴 글로 죽은 가마꾼과 길잡이에 대한 위로금을 대신 치렀다는 내용 외에는 안부 하나 없었다.

기대도 안 했던지라 그리 충격받지 않았다. 의외라면 대감이 순순히 막둥이의 노비 대금을 치러 줬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막둥이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대량의 세제를 만드는 일을 거들고 나오자 중문에 김수남이 서 있었다. 그는 유원을 발견하자마자 도끼눈을 치켜뜨곤 빠르게 다가왔다.

“여태 어디 있다 오신 게요?”

“저, 잠깐 찬간에 다녀왔습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거 팔자도 좋으시지. 도령께서 아프다며 꼼짝도 하지 않는 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는 아시오?”

꾀병이라도 앓아누운 듯 비꼬는 태도에 유원은 그저 죄송하다 고개만 꾸벅 숙였다. 아프고 싶어 아픈 것도 아닌데 군소리까지 듣자니 서럽긴 했으나, 그간 김수남이 유원의 몫까지 뒤치다꺼리했음은 부정 못 할 사실이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콧김을 내쉰 김수남은 열쇠 하나를 유원에게 던졌다.

“저기, 목간에 가서 물 비우고, 바닥이랑 욕조 좀 박박 닦아 두시오. 원래는 담당하는 놈이 있는데, 그놈이 술병이 단단히 나선 못 일어나겠다 드러눕는 바람에 할 사람이 댁밖에 없어요.”

하여튼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이놈이나 저놈이나. 김수남이 짜증스럽게 푸념했다. 더 있다간 불똥이 튈 듯해 유원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목간 문가에서 솔과 박하 냄새 섞인 수증기가 은은하게 새어 나왔다.

“읏차!”

가져온 수세미와 솔을 내려 둔 유원은 소매를 걷어붙였다. 우선은 가림막부터 바깥으로 치울 생각으로 들어선 그때였다.

찰박, 가볍게 물 튀는 소리에 유원은 눈을 깜빡거렸다. 가림막 쪽에 은은한 인영이 비치고 있었다. 고개만 빼꼼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니 기다란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던 태백훈과 눈이 마주쳤다.

“죄… 죄송합니다!”

당황한 유원이 팔로 눈을 가리고 뒤로 더듬거리며 물러났다. 아직 씻는 중이란 말은 전혀 듣지 못했다. 혹시 방해했다며 화를 내시는 건 아니겠지. 가린 손을 슬쩍 내리고 태백훈 쪽을 살폈다. 다행히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유원은 저도 모르게 뒤돌아 앉아 있는 그의 몸을 살폈다. 망건을 풀고 늘어트린 검은 머리카락이 물 위로 흐느적거렸다. 그 아래로 젖은 욕의를 걸친 몸이 수증기에 휩싸여 있었다. 목빗근부터 어깨, 가슴. 선녀처럼 아름다운 용모와는 다르게 강인함이 도드라져 절로 감탄이 나왔다. 검 좀 쓴단 칭찬이 자자하던 둘째 도련님도 훤칠하고 몸이 다부졌었는데, 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계속 구경하시려고요?”

욕조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태백훈이 입을 열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유원이 멋쩍게 뺨을 손으로 감쌌다. 더 방해하지 말고 물러나려던 차에 발아래에 나무통이 걸리적거렸다. 나무통에는 연고가 들어 있었다. 냄새를 맡아 보니 박하와 장뇌를 섞은 석랍 연고였다. 보통은 멍이 들거나 근육통에 쓰는 약으로 시중 약방에서도 가장 잘 팔리는 물건이었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태백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 보니 어깨에서 팔로 이어지는 쪽에 붉은 타박상이 보였다. 의원을 부르지 않고 연고와 약물 목욕으로 적당히 치료하려던 모양이었다.

“제가 타박상을 봐 드려도 될까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뜬 태백훈이 대답했다.

“왜?”

“붓기로 봐선 심하진 않지만, 오른팔을 자주 쓰시니 통증도 풀어 드릴 겸 연고를 발라 안마해 드리려고요.”

“그러니까, 그대가 왜?”

“계속 놔두면 불편하실 것이 뻔해서요. 그리고….”

고개를 숙인 유원이 손으로 목도리를 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전날 목도리를 내준 답례란 의미였다. 게다가 집사더러 솜옷까지 내주라 시킨 이도 다름 아닌 태백훈이었다.

무슨 속내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은혜를 입었으니 갚고 싶었다. 만일 싫다 하면 별수 없겠지만, 타박상은 사람 손으로 살살 만지기만 해도 한결 통증이 편해졌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돌아온 대답은 퉁명스러운 허락이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연고 통을 집은 유원의 눈에 욕의 사이로 비친 등이 들어왔다. 강무 중에 생긴 상처인가 했는데 단순한 상처라기엔 심상치 않았다. 마치 채찍질을 한 듯, 두꺼운 끈이 살을 파고든 상흔이었다.

어째서 그한테 이런 상처가 있지. 가축한테도 이렇게 심하게 채찍을 휘두르진 못한다. 얼핏 봐도 고문의 흔적에 쉽사리 손을 댈 수 없었다.

“등에 있는 상처 때문에 놀랐습니까?”

슬쩍 고개를 든 태백훈이 창백하게 질린 유원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유원은 놀라지 않은 척 눈길을 피했다. 그러자 태백훈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여태 다른 것에는 별별 오지랖을 다 부리시더니 눈에 뻔히 보이는 상처는 어찌 모른 척하십니까?”

“요수가, 할퀸 상처려니 했습니다. 사냥을 자주 다녀오신다고 했으니까….”

“그럼 만져 보세요.”

“예?”

“만져 보시면 알 것 아닙니까. 등에 난 상처가 요수나 산짐승 때문이었을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웃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았다. 권유가 아니라 명령하는 어투였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유원은 조심스럽게 날갯죽지 쪽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등에 난 상처는 울룩불룩하면서도 단단했다. 사람의 가죽이 아니라 마치 거북 등껍질을 만지는 듯한 감촉이었다. 짐승의 발톱에 할퀸 정도로는 이렇게 되진 않는다. 수십 번 아물었다가 다시 찢어지길 반복한 끝에 낙인처럼 새겨진 상처였다.

“예전 주인이 나한테 남긴 상처입니다.”

“예전, 주인?”

“벼슬에는 못 나간 진사였는데 허구한 날 채찍으로 날 때렸죠. 어느 날은 제가 쓰는 담뱃대가 없어졌다며 때리고, 또 다른 날은 제 부인 바가지가 짜증 난다며 때리고. 일을 못한다 때리고, 잠을 너무 잔다며 때리고.”

때린다는 말을 흡사 타령처럼 늘어놓던 태백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도 맞았더니 나중엔 고름과 피가 굳어 살가죽에 들러붙더군요. 더 놔뒀다면 여름에 살이 썩어 결국 죽었을 텐데. 죽지 않은 대신 등에 남은 채찍 자국이 돌처럼 딱딱해졌지요.”

“…….”

끔찍한 고백에 유원은 쉬이 뭐라고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매질은 유원도 여러 차례 겪어 봤지만 이 정도로 심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지난 고통이 얼마나 가혹했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옥양에서 떠도는 말 중에 그의 집안이 한미하고 질 나쁜 가문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있었지만 노비였다던 이야기는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지난 초야에 그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문관 사대부를 향한 증오와 멸시. 혹시 그도 노비일 적에 제 부친한테 안 좋은 일을 겪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태백훈이 제게 보였던 태도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다. 역지사지로 유원이 그의 입장이었다 해도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터였다.

“…괜찮으시면 앞으로 목욕하실 때 석회와 쇠비름, 익모초 달인 물을 넣어 보세요. 오래된 상처라 쉽게 좋아지진 않겠지만 조금은 차도가 있을 겁니다.”

“그대가 치료라도 해 주시려고요?”

“영감께서… 전보다 편해지실 수 있다면 얼마든지요.”

차분하려 애썼건만 결국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말없이 유원을 올려다보던 태백훈이 욕조에 등을 바짝 기댔다.

“그래서, 아까 하시려던 안마는 끝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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