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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26)화 (26/60)

26화

바구니를 내려 둔 연녹수가 팔랑거리며 유원에게 다가왔다. 걸음걸이가 신선처럼 우아했다.

“놀러 오라고 했는데 정말로 놀러 왔구나. 혹시나 길을 못 찾으면 어찌하나 싶었는데.”

“저기, 정말로 연녹수 도사님 맞으세요?”

“응?”

“환시는 아니신 거죠?”

혹시나 눈앞에 있는 연녹수 또한 가짜가 아닌가 싶어 물어봤을 뿐이었다. 눈을 깜빡인 연녹수가 재밌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럼 도깨비라고 할까?”

“…정말로 도깨비세요?”

“아하하, 순진하기도 하지. 그럴 리가 없잖니. 응?”

그의 말에도 유원은 여전히 믿지 못한다는 듯 뚫어져라 살폈다. 연기처럼 희미하지도 않고, 움직임도 선명했다. 아무래도 환시가 아니라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흑풍괴 때문에 많이 놀랐구나.”

“그, 환시는 도사님이 만드신 거예요?”

“응. 침입자들 쫓아내려고 만든 환시 함정이란다.”

“함정이요?”

“나름 정교하지? 사실 숲 입구에서 내 이름을 불렀으면 되었을 텐데.”

“부르면 된다니….”

“내가 말해 주는 걸 깜빡했지 뭐야.”

유원은 허탈감에 얼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른 척 불러 보기라도 할 것을. 괜한 고생에 기운만 잔뜩 빼지 않았는가. 키들키들 웃은 연녹수가 겨울바람에 에인 뺨을 쓰다듬었다.

“이런, 추웠겠구나. 따뜻한 차 좀 줄까? 잠시만, 그러고 보니 지금이 몇 시지?”

연녹수가 널찍하게 늘어진 소매 안쪽에서 휴대용 해시계를 꺼냈다. 해가 분명 중천인데 해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내 정신 좀 봐. 벌써 유시(酉時)가 다 되었네.”

이마를 가볍게 친 그가 붓을 꺼내더니 허공에 큼직하게 글씨를 썼다. 그러자 화창하던 정오 하늘이 장막으로 덮인 듯 금세 어두워졌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변화에 놀랄 새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분명히 나는 유원이 너만 초대했는데.”

손에 쥔 붓을 휘휘 돌리던 연녹수가 짜증스럽다는 듯 뒤쪽을 가리켰다.

“저 괘씸한 놈은 왜 같이 들어온 것이야?”

마른하늘에 벼락이 내리쳤다. 괘씸한 놈으로 지목받은 태백훈이 무심하게 말했다.

“인사치레가 꽤나 화려하더군.”

“불청객 주제에 건방지구나, 썩 나가지 못해?”

화가 잔뜩 난 연녹수가 붓을 휘두르자 불길이 회오리처럼 주변을 감쌌다. 이러다 크게 사달이 날까 싶어 유원은 서둘러 연녹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녹수님! 저, 저, 배고픕니다!”

일단 되는대로 뱉고 본 말이었는데 다행히 통한 듯했다. 불길이 사그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싱싱한 초목에서 풀냄새가 피어올랐다.

“내가 추태를 보였구나. 약간 욱하는 편이라 그렇단다.”

“괜, 괜찮습니다.”

“아가가 배고프다니 일단은 손님 대접부터 해야지.”

연녹수가 붓을 휘두르자 어느 틈에 세 사람은 폭포 옆 대각에 앉아 있었다. 네모난 큰 목판 위에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각종 과일이며 떡과 나물, 큼직한 돼지 통구이까지. 궁중 연회 잔칫상을 보는 듯했다.

“사양 말고 많이 먹어.”

“예….”

연녹수가 젓가락으로 이것저것 집어 유원의 접시에 올려 줬다. 수북하게 쌓인 떡과 고기를 보며 유원은 멋쩍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융숭한 대접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제가 먼저 배고프다고 말했으니 사양하기도 껄끄러웠다.

설마 이 음식도 환시로 만든 가짜는 아니겠지. 주홍빛 도는 떡을 젓가락으로 찔러 본 유원이 눈을 딱 감고 입에 넣었다. 금세 입 안에 달짝지근한 꿀맛이 감돌았다.

“맛있지? 감으로 만든 떡이야. 주상께서도 내가 만든 감떡이 제일 맛있다고 했지.”

“주, 주상이라면은 설마, 상감마마를 아시는 거예요?”

“응? 그러니까….”

“현 주상 전하의 고종사촌 되시는 분이십니다.”

찻물을 한 모금 마신 태백훈이 대신 대답했다. 태백훈을 흘겨본 연녹수가 손사래 치며 웃었다.

“뭐, 그래 봤자 먼 사촌지간일 뿐이란다. 누구누구처럼 주상 전하 곁을 떠나 북향한 양반이랑은 다르지.”

“전하께는 기별도 없이 대국으로 덜컥 유학 가 버리신 어느 도사만 하겠나.”

“마치 내가 주상 전하를 내팽개치고 간 것처럼 들리는데?”

“그럼 아니었나?”

“내가 언제!”

탁자를 쾅 내리친 연녹수가 언성을 높였다. 태백훈은 턱을 들고 거만하게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자칫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 싶어 유원은 얌전히 앉아 있었다.

둘의 대화를 들어 보니 진즉 아는 사이인 듯했다. 게다가 연녹수 도사께서 전하의 고종사촌이라면, 현 상감마마의 누이. 그러니까 공주 자가의 자녀라는 의미였다. 왕실과 관계된 귀인이 왜 이런 북쪽 숲에 은둔하고 있는 걸까.

“하여튼, 이래서 내가 저놈 낯짝 꼴 보기 싫었는데. 사근사근함이라곤 도통 없는 놈 같으니라고.”

짜증스럽다는 듯 쏘아붙인 연녹수가 콧방귀를 뀌었다. 태백훈은 그를 달래 보려는 기미도 없었다. 이래서야 독에 관해 묻기는커녕 영영 말다툼이 끝나지 않겠다 싶었다.

“녹수님. 실은 부탁이 있어서 찾아온 것입니다.”

“응? 무엇이니?”

“도사들은 세상사 아는 것이 매우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도사님은 제일간다고 했고요.”

“그렇지. 아마 팔도에서 나를 능가하는 도사는 없을 것이야.”

“그럼 짐독에 대해서도 들어 보셨습니까?”

“짐독? 남방에서 서식하는 짐새에게서만 나온다는 그 독 맞느냐?”

정확한 설명에 유원은 빠르게 긍정했다. 연녹수가 빙그레 웃었다.

“그야 당연히 알다마다. 굉장한 맹독이라 함부로 다룰 순 없지만, 자정 능력을 갖춘 요수한테는 짐독만 한 마취제가 없거든.”

“마취요?”

“사람한텐 독일지언정 몇몇 요수들한테는 독보단 가벼운 마비 증상만 일으키거든. 그런데, 아가가 짐독은 왜 궁금해했을까?”

“저, 그것이, 최근 이 근처에서 어떤 관리가 죽었는데….”

말을 하다 말고 유원은 힐끔 태백훈을 돌아봤다. 적당히 주제는 돌렸으니 자세한 사정은 그가 직접 말하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팔짱을 끼고 덤덤히 앉아 있던 태백훈이 입을 열었다.

“죽은 자의 유류품 중에 그 귀한 맹독이 발견되었다. 만물상과 약상 모두를 수소문했으나 그런 독은 들어 본 적도 없을뿐더러, 설령 안다 해도 반입은 못 한다더군.”

“내게 부탁할 것이 있다 싶더니 저 쌀쌀맞고 시커먼 영감 놈이 청하려던 말이었느냐?”

“청하다니. 내 입으로 부탁은 안 했잖나. 단지 이 사람이 하려던 말을 대신했을 뿐이지.”

“안하무인(眼下無人) 같으니라고.”

못마땅한 듯 투덜거리면서도 연녹수는 굳이 대답을 피하진 않았다. 짐독, 짐독이라…. 턱을 짚은 채 잠시 골몰하던 연녹수가 손가락을 딱딱 부딪쳤다.

“무릇 도사란 남들보다 괴현상을 더 잘 아는 법이긴 하나, 그렇다 해서 모든 독과 요수를 다 알진 않지. 학문에도 여러 갈래가 있듯,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만 능통한 경우도 많거든. 짐독은 이름이 알려진 독이긴 하지만 채취하기 까다로워서, 신선한테 가르침을 받았다고들 하는 도사들도 굳이 건드리지 않아.”

“그럼 이런 독을 만들 수 있는 도사는 누가 있지?”

“나.”

그 말에 태백훈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턱을 괸 연녹수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그러니 적어도 나와 견줄 정도는 되겠지. 특히, 독과 사술(邪術)에 관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고.”

“그 말인즉 연 도사께서도 짐독을 만들 만한 도사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로군.”

“그야 당연하지. 내가 상천회 같은 도사들 협회장도 아니고, 도사들을 굳이 알 필요도 없잖아. 자네만 해도 무사들을 다 알진 않으면서.”

“나야 각 지방 수사나 병사들은 전부 꿰고 있고, 필요한 인재라면 기억은 해 두는 편이라서.”

“잘났네, 아주 잘났어.”

볼멘소리를 투덜거린 연녹수가 차가운 수정과를 벌컥벌컥 마셨다. 태백훈은 무거운 표정이었다. 이래서야 원점이었다. 연녹수를 찾아 묻겠다며 이틀 내리 용쓴 것이 무색한 꼴이었다.

이래서 굳이 도사를 찾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인데. 한숨을 크게 내쉰 태백훈이 몸을 일으킨 찰나였다.

“헌데 짐독은 쉽게 구분할 수 없었을 텐데. 태 장군께서 어찌 그것이 짐독임을 알았는가?”

“믿거나 말거나, 저기 앉아 있는 도련님께서 무려 냄새를 느끼셨다더군.”

“응? 무취인 독에서 냄새를?”

연녹수가 흥미롭다는 듯이 유원을 돌아봤다. 원치 않은 주목을 받게 된 유원이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싸늘하고 기분 나쁜 느낌이 났었습니다. 예전부터 어머니께서 모든 독은 해를 끼치는 성질을 갖고 있어, 독하면 독할수록 기운이 강하다고도 하셨고요.”

“어머니께서?”

“예, 어머니께서 감각이 뛰어나셨거든요. 어릴 적에는 멀리서 오는 기척만으로도 저인 줄 아시고 늘 문을 열어 주시기도 했고요.”

“종종, 태생적으로 기민한 사람들이 있지. 아가도 그런 능력이 있다니. 그럼 독이란 독은 다 구분이 되는 거니?”

“생김새를 아는 독초는 눈으로도 구분을 하고, 처음 보는 독초라면 느낌이 오싹하게 차갑다든지, 뜨겁다, 까지는 구분할 수 있어요.”

“거리가 멀어도?”

“땅에 나는 식물이 시들거나 동물이 이유 없이 아픈 경우를 살피면 돼요. 그런 곳에 독초가 자라는 경우가 많거든요.”

“오호라, 그럼 독 말고도 뭘 또 구분할 줄 알아?”

“그러니까, 약초도 조금은 알고, 약주도 빚을 줄 알고요. 의술은 모르지만 배앓이도 약간 볼 줄 알고, 해독도 아주 조금요.”

“해독도?”

“잘은 아니고, 독버섯을 먹은 정도만….”

대답하면 대답할수록 연녹수는 점점 흥미롭다는 듯이 두 눈에 활기가 넘쳤다.

“도백께서 사람 복 하나는 타고났군. 그나마 아가 덕분에 짐독이란 것을 빨리 발견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지 않나.”

“다행? 무엇이 다행이지?”

“태 영감께서도 선왕 시절 태실(胎室)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들어보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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