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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25)화 (25/60)

25화

두 시진 내내 네 사람은 숲속을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연녹수의 집터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눈에 불을 켜고 수색하던 곽현욱이 태백훈을 돌아봤다.

“영감. 여기가 정말로 그 도사가 사는 숲이 맞습니까?”

“숲이 스스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면 그럴 테지.”

태백훈이 고삐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유원이 기억하기에도 그날 왔던 곳은 이 측백나무 숲이 맞았다. 다만 연녹수와 동행했을 때는 숲이 그리 넓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느낌이었다.

해가 저물고 숲 안은 고요한 빛깔에 잠겼다. 곽현욱이 등촉에 불을 피우는 사이에 멀리까지 다녀오겠다던 손청준이 돌아왔다.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가 손을 가볍게 털었다.

“넓지 않은 숲입니다. 어지간한 곳은 다 돌아보셨을 겁니다.”

“아무래도 그 도사가 괴팍한 수를 쓴 모양입니다. 같은 길을 빙빙 맴돌게 만든 것이 틀림없습니다.”

곽현욱의 말에 손청준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로 도사란 땅을 접어 다닌다거나, 바람을 일으키는 등 기괴한 도술을 부리는 이들이었다. 더군다나 연녹수는 알 사람은 다 안다는 괴짜였다. 이런 농간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일 터였다. 이슥해진 밤하늘을 올려다본 손청준이 말했다.

“밤이 깊어졌으니 일단은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요즘 이 근처에서 흑풍괴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흑풍괴가? 그놈은 변방에서나 나타나던 놈 아니냐?”

“최근 원경도 안쪽에서도 출몰한단 이야기가 있더군. 얼마 전엔 민가까지 내려와 돼지 축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단 소식도 있어.”

흑풍괴는 거대한 곰 요수였다. 원래는 대국 깊숙한 산에서만 살던 요수가 어느 날인가부터 변방에서 보이더니 설산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지능이 높고 힘은 장사인 데다 독니를 갖고 있어 어지간한 사냥꾼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흉측한 괴물이었다.

“이쪽 길은 저와 곽 대장이 같이 가서 길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뭐? 내가 왜 너랑?”

“자네랑 오붓하게 다니고 싶어서.”

장난스러운 말투에 곽현욱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상관인 태백훈 더러 같이 가라며 투정 부리기엔 사내로서 몹쓸 꼴이었다.

이미 멀어진 둘을 보며 유원은 한숨을 눌렀다. 다 같이 가는 게 더 편한데…. 넷이 같이 움직일 때는 곽현욱이 눈치껏 속도를 맞춰 주기라도 했는데, 이러면 말 타는 솜씨가 서툰 것이 완전히 드러날 터였다.

유원은 승마가 서툴렀다. 나귀나 노새는 타 봤어도 말은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어깨너머로 큰 도련님이 타는 행색을 따라 하긴 했지만, 당장이라도 낙마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긴장감에 두 다리는 아프고 고삐를 움켜쥔 팔이 저리기까지 했다.

먼저 말머리를 돌린 태백훈이 말을 움직였다. 유원은 그를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말에 매달려 있었다.

숲 사이로 나풀나풀 싸락눈이 흩날렸다. 어두운 사위에서 빛이라곤 태백훈이 들고 있는 등촉에서 밝히는 불빛뿐이었다.

히힝, 말이 식식 거친 숨을 내뱉었다. 오랜 시간 숲을 헤매느라 지친 듯했다. 마구간에 있던 말 중 대여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 작은 말 하나뿐이었다. 체구가 작아 오래 달릴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버거운 모양이었다.

“조금만 참아. 곧 있으면 돌아갈 거야.”

그러고 보니 보통 말의 안장에 건초나 당근 같은 간식을 넣어 두지 않던가. 안장주머니를 뒤적이자 예상대로 말린 박이 나왔다. 말 등에서 내린 유원은 박을 쪼개 말에게 먹였다.

“뭐 합니까.”

먼저 가던 태백훈이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유원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 말이라 금세 지친 것 같아요. 잠깐 쉬어갈 테니, 영감께선 먼저 가시면 따라가겠습니다.”

“이 어두운 숲속에 혼자 남겠다니, 참으로 배짱이 과하십니다.”

작게 핀잔한 그는 말을 움직이는 대신 말 위에서 내려 고삐를 손에 쥐었다. 당장 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유원은 아직 한 움큼 남은 박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이거, 영감네 말한테도 먹여도 될까요?”

쓸데없는 오지랖이라며 거절할 줄 알았는데 태백훈은 순순히 허락했다. 유원은 차분하게 그의 말을 향해 다가갔다.

“안녕? 이거 먹을래?”

경계하듯 굳어 있는 말에게 박을 내밀자 킁킁 냄새를 맡더니 날름 박을 먹어 치웠다. 물로 입가를 적셔 주기까지 하자 말이 제 머리를 유원에게 슥슥 비볐다.

“되게 순하구나.”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 부드러운 말투였다. 잠자코 지켜보던 태백훈은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애마는 북쪽에서도 멀리 떨어진 아한이라는 외국에서 온 종자로 왕에게 받은 하사품이었다. 눈부터 발굽까지 새카맣고 성질은 진돗개와 흡사해 섬기는 주인 외에는 주는 먹이도 물도 먹지 않았다. 마구간지기들도 아한산 큰 말은 돌보길 꺼릴 정도니 오죽할까. 그런데 그런 말이 의심 없이 먹이를 받아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도련님이었다. 고작 죽은 말 하나로 속상해하던 것도 여러모로 특이했다. 그 인색한 홍세환 슬하에 이런 자식이 있으리라고 감히 상상이나 하겠는가.

“저기, 그 연녹수란 분은 어찌 만나시려는지 여쭤도 됩니까?”

살살 말을 쓰다듬던 유원이 태백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무에 등을 기대서 있던 태백훈이 말했다.

“알아보니 그 맹독은 도사 외에는 쉬이 가공하기 어렵다더군요. 도사의 손을 탔으면 일반적인 눈과 귀로는 알아보긴 힘드니, 그 방면에서 탁월한 자를 만나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말을 듣고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일반적인 약초는 약방에서도 다루겠지만 짐독은 요수에게서 나온 독극물로 아무나 다룰 수 없었다. 요수에 대해 해박하기로는 갑사보다 더 뛰어난 자가 도사라고들 했다.

“그럼 나도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태백훈이 입을 열었다. 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문하셔요.”

“연녹수와는 언제 그리 친해진 겁니까?”

“예?”

“그날, 무척 친분 있는 사이처럼 보이던데요.”

“친해진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도사님의 짐을 들어 드렸는데 그분께서 대뜸 친구 하자고 하신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그저 떨어진 가락지를 주워 줬을 뿐이었고, 들고 가던 짐이 버거워 보여 들어 준 것이 전부였다. 자초지종에도 태백훈은 영 믿기지 않는단 얼굴이었다.

“고작 도와줬는데 그런 친분이란 겁니까?”

“진짜, 진짜. 맹세코…!”

그때였다. 등 뒤에서 쉭, 바람 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작, 풀이 흔들리는 소리에 잡초를 뜯어 먹던 말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영감!”

태백훈에게 달려드는 검은 형체에 말이 놀라 펄쩍거렸다. 옆으로 구른 태백훈이 검은 형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륵그륵, 물러난 형체가 점점 거대해졌다. 이윽고 엎질러진 등촉을 밟으며 드러난 모습에 유원이 파랗게 질렸다. 생김새는 일개 곰과 흡사했지만 몸집은 훨씬 크고 송곳니가 뻐드러진 모양새였다.

손청준이 말한 흑풍괴다. 실제로 마주한 모습은 상상보다도 더 끔찍했다.

크아아악! 네 발로 선 흑풍괴가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입에서는 피가 섞인 침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오금이 뻣뻣해지고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크아악! 사납게 포효한 흑풍괴가 다시 태백훈한테 달려들었다. 옆으로 피한 태백훈이 잽싸게 칼로 주둥이를 베어 냈으나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쉴 새 없이 대적하던 태백훈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찬 바람이 부는 데도 턱 끝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위급한 상황인데 칼 한 번 쥔 적 없는 저로서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떡하면 좋지. 소리라도 질러서 방심을 유도해야 하나. 하지만 어설프게 도발했다간 오히려 둘 다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고 있자니 어딘가 이상했다. 제아무리 흥분한 짐승이라지만, 무조건 태백훈한테만 달려드는 느낌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를 노릴 생각이었다는 듯했다.

굶주림 때문에 달려들었다면 오히려 유원이나 조랑말한테 덤벼드는 편이 좋았을 터였다. 흑풍괴는 지능이 높아 함정이나 덫도 손쉽게 피한다고 했다. 그런 요수가 만만한 사냥감을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크게 포효한 흑풍괴가 문득 물안개에 휩싸인 듯 흐려졌다가 선명해졌다. 태백훈이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환시(幻視)로군.”

“환시라면?”

“말 그대로 가짜로 만든 형상입니다.”

제아무리 단단한 요수라 해도 칼이 부딪치면 작은 상처라도 나는 법이었다. 가짜였기에 아무리 칼에 베여도 멀쩡했으리라.

그러나 단순한 환시는 아닌 듯했다. 울음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대로 놔뒀다간 울음소리를 듣고 다른 요수들이 몰려들 터였다. 태백훈은 흑풍괴를 빠르게 관찰했다. 이 정도로 섬세한 움직임은 환술만으로는 속이기 어렵다. 그렇다면 산짐승 따위를 매체 삼았을 터였다.

“근처에 실체가 있을 겁니다.”

“실체요?”

“살아 있는 짐승이라면 아무거나.”

달려드는 흑풍괴를 빠르게 피한 태백훈이 말했다. 유원은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빠르게 살펴봤다. 대체 실체가 어디 있지.

그때, 큼직한 바위 사이로 사그락거리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유원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집어 소리가 난 바위 사이를 향해 던졌다. 빗맞은 돌이 바위 사이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러자 흑풍괴의 모습이 다시 옅어졌다. 틀림없었다. 저 바위 뒤에 매개체가 있다. 빠르게 바위 쪽으로 다가가 확인한 유원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토끼…?”

바위 뒤에 있던 매개체란 다름 아닌 토끼 한 마리였다. 숨은 붙어 있는 듯했지만 어쩐지 상태가 이상했다. 작은 기척에도 도망치는 것이 생존 본능일 텐데도 산토끼는 도망치려는 낌새조차 없었다.

자세히 보니 이마에 부적 같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유원은 토끼가 놀라지 않게 조심스럽게 부적을 떼어 냈다. 그러자 죽은 듯이 있던 토끼가 마취에서 풀린 듯 코를 실룩거렸다. 그러더니 바람같이 숲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토끼가 사라지자 태백훈을 공격하던 흑풍괴의 모습도 점점 옅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포효가 멎은 숲속은 짙은 안개만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대체 뭐였습니까.”

한숨 돌린 태백훈이 떨어진 갓을 털며 천천히 유원에게 걸어왔다. 유원은 손에 쥔 부적을 내밀었다.

“산토끼한테 이 부적을 붙였던 것 같아요.”

“산토끼?”

“부적을 떼어 내자마자 다행히 저 멀리 도망쳤고요.”

“…….”

다행히, 라는 말에 태백훈은 눈썹을 작게 찌푸렸다. 하여간 태평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는데, 고작 토끼 따위가 도망쳤다고 안도할 정신머리가 있단 말인가.

“영감, 저기, 뭔가 불빛이 보입니다.”

고개를 돌리자 유원이 말한 대로 정말 불빛이 보였다. 하얀 도깨비불은 길목에 서서 천천히 원을 그리고 있었다.

“따라오라는 것 같아요.”

흩어져 있던 말을 챙긴 유원이 고삐를 잡고 태백훈을 돌아봤다. 어쩌겠냐는 물음이 담긴 눈빛이었다. 태백훈은 덤덤히 갓을 다시 썼다. 그는 늘 피하는 법이 없었다.

팔랑거리는 도깨비불을 따라가니 얼마 안 가 물소리가 들렸다. 폭포 소리였다. 그런데 숲속에 폭포가 흐를 만한 자리가 있었던가. 몇 번을 샅샅이 돌아봤어도 물은커녕 웅덩이 하나 없던 곳이었다.

발아래 밟히는 폭신한 감각에 유원이 두 발을 내려다봤다. 흙 섞인 눈과 서리로 얼어붙은 땅 대신 초목이 무성했다. 여름 새가 지저귀고, 향긋한 꽃냄새가 산들거리며 풍겼다.

설마 이 풍경도 전부 환시는 아닐까.

화사한 꽃과 나무 너머로 누군가가 콧노래를 부르며 붉은 과실을 수확하고 있었다. 색이 화려한 두루마기와 귀걸이, 눈 화장은 익히 보기 힘든 외양이었다.

돌아본 그가 눈꼬리를 접어 웃어 보였다.

“아가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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