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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24)화 (24/60)

24화

대체 영감께서 어인 일로 여기에 계신 걸까. 융복에 검집까지 갖춘 차림새를 보니 산책이나 하러 온 것 같진 않은데. 비단 놀란 것은 유원만이 아닌지 태백훈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한참 기다렸네.”

태백훈이 건네는 말에도 연녹수는 무심한 얼굴로 태백훈을 지나쳤다.

“이보시오, 지금 사람이 말하고 있잖습니까! 이분께서 여기서 반나절이나 죽쳐야 할 만큼 한가한 분인 줄 아시오?”

“한가하든 말든, 내가 알 바야?”

“무엄하다! 어느 안전이라고!”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관병이 발끈한 듯 나서자 태백훈이 손으로 막으며 저지했다. 괜히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듯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연녹수는 문 주변에 자라난 잡초를 하나하나 뽑더니 저 멀리 내다 버리고는 손을 털었다.

“아가, 짐은 여기다 놔 주겠니?”

연녹수의 말에 태백훈이 유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묻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은 듯 복잡다단한 얼굴이었다. 유원은 최대한 태백훈을 모른 척하며 마루에 짐을 올려 뒀다.

“수고했다. 아가. 덕분에 아주 편했구나.”

그가 소매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 쥐여 줬다.

“이건 오늘 도와준 보답.”

주먹만 한 샛노란 귤 두 개에 유원은 얼떨떨해졌다. 귤은 옥양에서도 높으신 사대부들이나 드시는 귀한 과일이었다.

“나중에 놀러 오렴. 귤이랑 배랑, 곶감도 있고, 떡이랑 약과도 있거든.”

“저기, 도사님….”

“나 심심하지 않게 꼭 와야 해. 알았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뜬 연녹수가 몸을 돌렸다. 여전히 접견 요청에는 관심 없다는 듯 냉랭하던 그가 문득 걸음을 세웠다.

“영감탱이인지 뭔지 그 사람한테 전하렴. 귀찮게 굴지 말고 그만 가 달라고. 시커먼 놈이 우리 집 문 앞을 지키고 있으려니 미관상 보기가 싫구나.”

“뭐라고요?”

어이없다는 듯 관병이 그의 어깨를 붙잡으려는 그때였다. 돌아선 연녹수가 집게손가락을 딱 튕겼다. 손끝에서 발화한 불씨가 꽃잎처럼 흩날리더니 이윽고 거대한 불길이 되었다.

“으아악! 불! 불이야! 나 죽는다!”

겁에 질린 사내가 즉시 양팔로 얼굴과 몸을 막으며 뒤로 주저앉았다. 유원은 황급히 그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나리, 괜찮으세요?”

“이, 이게 무슨….”

그는 황당하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다행히 큰 화상을 입은 기색 없이 옷고름만 살짝 그을린 정도였다.

그 틈을 타 연녹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굳게 걸어 잠근 방문으로 다가간 태백훈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은 텅 비다 못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검 손잡이를 움켜쥔 채 다가온 만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도깨비한테 홀린 건 아니겠지요?”

“홀린 건 아니야.”

태백훈은 벽을 가리고 있던 휘장을 휙 걷어 올렸다. 그러자 웬 족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꽃나무와 폭포 옆, 자그만 기와집 한 채가 그려진 산수화는 빼어났으나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족자를 뚫어져라 보던 만호가 기겁했다.

“그, 그림이 움직입니다.”

그림 속 폭포가 아래로 흐르며 종이에 물결이 치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 보니 물 흐르는 소리와 새 울음소리마저도 생생했다.

“설마, 이 안에 그 도사가 있단 겁니까?”

“아마도.”

뚜벅, 태백훈이 족자로 한발 다가서기 무섭게 열기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솟구쳤다. 어찌나 강하고 뜨거운 바람이던지 무장한 장정들 여럿이 낙엽처럼 마당에 나뒹굴 정도였다.

우왕좌왕하는 관병들과 다르게 태백훈은 한 팔로 바람을 막은 채 허리춤에 찬 군도를 잡아 빼냈다. 쇠로 된 칼날이 순식간에 깎아 낸 고드름처럼 새하얗게 빛났다.

태백훈은 족자를 향해 서슴없이 검을 내리그었다. 콰광! 나무에 벼락이 내리는 듯한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열풍은 사그라졌다. 정작 족자에는 흠집조차 없었다.

“영감, 괜찮으십니까?”

몸을 추스른 박 진무가 안위를 물었다. 태백훈은 곤란하다는 얼굴이었다.

“꽤 튼튼한 결계를 쳐 둬서, 힘으론 뜯어내긴 어렵겠네.”

“차라리 다른 도사를 찾아보는 것이 낫지 않을지요? 강진에도 꽤 대단한 도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상천회 소속이라고도 하니 훨씬 다루기도 쉬울 겁니다.”

“그러니 더더욱 등록되지 않은 유능한 도사를 찾아야지.”

“하옵시면.”

만호가 묘안이 떠오른 듯 속닥거렸다.

“저 남자한테 그 도사를 불러 보라 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아까 보니 친분이 있어 보이던데, 잘 구슬리면 연 도사를 만나게 해 주지 않겠습니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하거라. 지금 민간인을 미끼로 삼기라도 하잔 건가?”

크게 꾸짖은 태백훈이 손짓하며 명령을 내렸다. 교대로 감시할 인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복귀해라. 이에 관병들이 분주하게 무장을 재정비하고 말을 챙겨 끌고 왔다.

검을 갈무리한 태백훈은 한숨과 함께 초가집을 노려봤다. 소문대로 성미가 까탈지고 제멋대로였다. 심술궂은 도깨비 같단 정평이 자자하기로서니 대면조차도 어려울 줄이야.

고개를 돌리자 대문 밖에 서 있는 유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넘어졌던 관병들을 살펴보고 부축해 주기 바빴다. 순간 태백훈의 눈매가 세모꼴로 가늘어졌다. 만호의 말대로 연녹수가 방금 저이에게 보인 태도는 사뭇 달랐다. 그 괴팍한 도사가 다음에 놀러 오라며 친근함까지 보이지 않았던가.

알면 알수록 희한했다.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예쁜 깍쟁이인가 했더니 맹독을 냄새만으로도 느낀다고 주장하질 않나. 이제는 저 괴짜 도사와 면식 있는 사이기까지 하다니.

‘영감께서만 저를 미워하고 무시하실 줄 아신답니까? 저도 영감을 미워하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하, 참나.”

기도 안 차는 소리를 다 들었지. 저 얄미운 도련님과 엮이는 일은 한두 번만으로도 충분했다.

* * *

한참 비질하던 중에 중문 바깥이 시끄럽다 싶더니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왔다. 앞장선 곽현욱은 무언가 못마땅한 듯 구시렁거렸다. 뒤에서 따라오는 손청준은 두 손으로 뒷머리를 감싼 채 느긋한 얼굴이었다.

“아기씨. 강녕하셨습니까?”

유원을 발견한 손청준이 반갑게 인사를 청했다. 손청준의 말에 곽현욱 또한 급제동하며 뒤돌아섰다. 두 사내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화답한 유원이 손청준을 향해 말했다.

“나리, 그냥 편하게 이름 부르세요. 자꾸 아기씨라 부르시니 민망합니다.”

“귀한 분의 함자를 부를 순 없는 법이지요. 아니 그런가, 곽 대장?”

“뭐, 그, 그렇지.”

곽현욱은 서먹한 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어색하게 웃은 유원이 물었다.

“영감을 뵈러 오셨습니까?”

“그러합니다. 안에 계십니까?”

손청준의 물음에 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면 못 한 지 이틀은 족히 흘렀지만, 신발이 그대로 있으니 외출하진 않았음은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곽현욱이 계시냐 여쭙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정작 유원이 식사를 묻고, 목욕물이며 세숫물, 깨끗이 수선한 침의를 가져다줄 때는 화난 돌부처 상을 마주하는 듯하던 태도와 딴판이었다.

두 사내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한 용건은 아마도 이번에 있었던 사체 발견 때문일 듯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고을 관아에서 일하는 향리가 원혜 근처에서 죽었으니 쉬이 넘기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대국산 희귀한 맹독이 연초에 섞여 발견되었으니, 변경을 지켜야 하는 태백훈으로선 짚어 봐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만도 했다.

연녹수를 만나고 온 이후로 태백훈은 심기가 썩 좋지 않았다. 공무 때문에 예민해졌다기에는 그저 단순히 유원한테 심술이라도 난 듯했다. 다만 저녁은 꼬박꼬박 겸상을 무르지 않았다. 말 섞기도 싫지만, 굶는 꼴 또한 싫단 건가. 참으로 속을 알 수 없는 양반이었다.

밤새 또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마당에 눈이 한가득이었다. 서둘러 눈을 치우고 헛간에서 가져온 볏짚과 모래를 길목에 깔았다. 아궁이도 청소하고, 목욕물이든 세숫물이든 언제든 쓰실 수 있도록 뜨거운 물을 한 솥 끓이고 나니 해가 중천이었다.

여전히 대화 중이신가. 젖은 손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은 유원이 대청으로 가까이 가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쏟아지듯 나온 손청준과 곽현욱 뒤로 채비를 마친 태백훈이 서 있었다. 불시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옆에 서 있던 두 사내가 눈치껏 슬그머니 물러났다. 유원이 버석거리는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며 말했다.

“찬간에다 세 분 진지 올리라 전할까요?”

때마침 점심이었다. 손님까지 오셨으니 손님상을 준비하겠냐는 평상적인 물음에도 그는 한숨이었다. 또 뭔가 마음에 차지 않았나. 외출 차림으로 봐선 딱히 뭔가를 잡수시려는 눈치는 아닌 듯했다.

하여 꾸벅 인사하며 자리를 물러나려고 했다.

“외투 챙기세요.”

태백훈이 장갑을 끼며 말했다. 유원은 곧장 알아들을 수 없어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외투를 갖다 달라는 말일까. 이미 모피 목도리에 가죽과 솜을 덧댄 도포까지 입고 계신데. 마음에 안 드신단 건가.

“송구하오나, 어, 어떤 외투를 가져다드려야 할지요? 혹여 지금 입고 계신 옷이 불편하시다면 좀 더 가벼운 외투를 찾아달라고 아범께….”

“나 말고, 홍유원 그대가 입을 외투 말하는 겁니다.”

태백훈의 말에 유원은 놀란 사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데없이 제 외투는 왜?

“말은 탈 줄 압니까?”

“예? 말이라면…?”

당혹스러운 유원을 흘낏 쳐다본 태백훈이 그 이유를 답했다.

“그대의 벗이라던 도사를 찾아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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