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청사에 온 유원을 마중 나온 황우경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설마 혼자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부윤 나리께서 사람을 보내 주셔서 헤매지 않았습니다.”
“하하, 사람을 보내 다행이군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겠습니다.”
고개 저은 황우경이 살갑게 웃어 보였다. 어색한 웃음에 유원은 뒤늦게 그의 물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몸종 하나 대동하지 않고 어찌하여 홑몸으로 왔는지 의아했으리라.
양반집 규수들이라면 장옷 하나 들어 줄 몸종 하나 데리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사내라면 더더욱 보란 듯이 종놈 서넛을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유원은 어엿한 규수도, 도련님도 아니었다. 일단은 태 영감의 배우자라 해도 실제로는 일개 종놈과 다를 바 없는 입지임은 하인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황우경이 꼬치꼬치 더 묻지 않아 다행일 뿐이었다. 아마 그도 속사정을 면면이 알 테니 차마 묻지 않았겠지만.
“이게 당시 수습된 유류품입니다.”
황우경의 물음에 유원은 마당에 늘어놓은 물건을 살폈다. 당시 상황을 대변하듯 유류품은 대부분 엉망이었다. 부러지고 손상된 무기며 찢어진 옷 조각과 신발 등등.
그중 부적으로 보이는 물건은 손상도가 유독 심했다. 군데군데 피 묻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그나마 보이는 문자도 번져 그림인지 글인지도 분간이 안 갔다. 아무래도 종이다 보니 더더욱 훼손되기 쉬운 탓이었다.
“혹시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있으신지요?”
“그것이… 여러 번 살펴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요. 상태가 이런데 당연히 뭐가 보일 리가 없지요.”
진술 절차는 간단하게 이뤄졌다. 황우경의 감독 아래에 기록관과 보조가 유원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몇 가지 질문이 오갔으나 대부분은 기록을 되짚는 정도였다.
유원은 황우경이 수사관과 잠시 대화하는 동안 근처를 둘러봤다. 겨울을 맞은 바깥 나무는 가지가 마르고 잎이 시들었는데 청사 가운데 서 있는 상록수 한 그루가 여름처럼 환하게 피어 있었다.
“참으로 싱그럽죠? 영감께서 첫 전장에서 돌아오셨을 때 그 공을 치하하고자 전하께서 손수 하사한 나뭇가지였다더군요.”
“나뭇가지요? 그 나뭇가지가 이리도 크게 자란답니까?”
“예. 게다가 이 추운 날에도 시들지 않고, 병충해에도 끄떡없답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기린(麒麟)에게 축복받은 나무라 기린수(麒麟樹)라 부른답니다.”
기린이라면 유원도 들어본 적 있었다. 온몸은 금빛이고 뿔이 달렸으며, 새로운 임금께서 보좌에 앉으실 때마다 나타나 천추만세 경배를 드리는 상서로운 동물이라 했다. 그런 신수에게 축복받은 나무를 치하받았다니. 태백훈이 실로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으나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태백훈을 떠올리는 순간 유원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지난밤에 태백훈한테 괜한 말을 한 것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맴 돌았다. 왜 그런 말을 굳이 했을까. 애초에 왜 이렇게 태백훈 앞에서만 서면 감정이 들쭉날쭉 이상야릇해지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쪽방에서 종놈살이를 하면서부터 이상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이래서야 그에게 조금이나마 좋은 감정을 심어 주긴커녕 되바라지고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될 텐데. 두 손을 서로 만지작거리던 유원이 황우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 그런데 영감께서는 어디 계신지요? 여기 계십니까?”
“영감께서는 이번 일로 찾아뵐 분이 계셔서 잠시 나가셨습니다. 아마 오래 걸리실 듯합니다.”
찾아뵐 사람이라니. 이곳에서 제일 지위가 높다 하는 태백훈을 제 발로 찾아온 것도 아니고, 직접 찾아갔단 말인가. 어떤 분인가 잠시 궁금증이 일었으나 유원은 시시콜콜 묻지 않고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부관을 시켜 귀갓길을 배웅하겠다는 황우경의 배려에 유원은 두 손을 내저었다. 이왕 나온 김에 주변 길을 둘러보며 가고 싶은 참이었다. 세 번씩이나 거절하니 황우경도 더는 권하지는 않았다. 진짜 규수도 아니고 사내니 별일이나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다.
하얀 산을 배경으로 삼은 도시는 수묵화 같았다. 추운 날씨인데도 사람들은 움츠림 없이 걸어 다녔고 얼어붙은 개천 위에서 솜옷을 꿰입은 아이들이 웃으며 썰매를 탔다.
석조다리 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유원의 눈에 문득 한 선비가 들어왔다. 멀리서 보기에도 무척 돋보이는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였다. 설산과 숲에서도 잘 보일 수 있도록 강한 색을 선호하는 원경도 특성상 옷 염색이 유독 진하긴 하나, 그에 비해서도 화려한 색이었다.
갓끈에도 치렁치렁한 옥을 달았고, 귀에도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치장보다 이목을 끄는 것은 그의 짐이었다. 선비의 양손에는 책을 비롯하여 각종 집물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짐이 어찌나 많은지 눈앞을 아슬아슬하게 가릴 정도였다,
저렇게 들고 가면 앞이 잘 안 보이지 않을까. 그러나 남자는 짐이 하나도 무겁지 않은 것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마치 버들잎이 팔락거리는 듯 나긋한 걸음걸이였다. 보기에는 호리호리하신데 힘이 천하장사인 모양이었다.
점점 멀어지는 선비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유원은 발아래에 굴러떨어진 무언가를 발견했다. 여인네들 치장용처럼 보이는 은가락지에는 자그만 홍옥이 박혀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없었던 물건이니 아무래도 방금 지나간 저 선비가 떨어트린 귀중품인 듯했다.
“저기, 선비님! 선비님!”
급히 그를 불렀으나 이미 저 멀리 간 선비의 귀에는 들리지 않음이라. 유원은 손에 가락지를 움켜쥐고 선비를 뒤쫓았다. 선비는 인파 사이를 유유히 헤치고는 이내 모퉁이를 꺾었다. 그를 놓칠세라 유원이 뒤따라 골목으로 들어섰지만, 안쪽 길에는 부랑자만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 어디로 가신 거지?”
정말 찰나였는데 이리 감쪽같이 사라질 수가 있을까. 귀신이 곡할 노릇에 뺨을 긁적거리던 유원이 돌아선 순간이었다.
“날 찾는 거야?”
방금 그 선비가 뒤에 떡하니 서서 유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게 놀란 나머지 유원은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아니, 얼어붙었다기보다는, 입에 아교를 덕지덕지 바른 듯 떨어지지 않았다.
“내 딱 한 번만 말할 기회를 줄게. 나를 따라온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는 예쁜 입에다가 독충을 쑤셔 넣을 거야. 알았지?”
선비의 무시무시한 협박에 유원은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 흔들었다. 그가 손가락을 딱 부딪치자 딱 달라붙었던 입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원상을 회복했다.
“자, 이제 말해 보거라.”
“헉, 헉, 그, 그러니까, 선비님께서 이걸 떨어트리신 거 같아서요.”
“뭔데.”
조심스럽게 주먹 쥔 손을 내밀어 가락지를 보이자 험하게 인상을 쓰던 선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제 손을 확인했다. 손가락에는 가락지를 낀 희미한 흔적뿐이었다.
“어디서 주운 거야?”
“저기, 방금 지나오신 다리에 떨어져 있었어요. 발에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보여서 주워 보니 이 가락지인데, 아무래도 선비님 물건이신 듯해 무례함을 무릅쓰고 여쭤보려 했어요.”
“그래, 이 반지는 내 것이 맞다.”
손바닥에서 가락지를 집어 든 그가 반지를 다시 끼웠다. 제 주인을 찾은 양 딱 맞았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유품인데, 하마터면 영영 잃어버릴 뻔했구나. 고맙구나.”
“선비님 물건이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머쓱하게 웃은 유원이 그의 등 뒤에 놓인 짐을 살폈다. 저렇게 많은 물건을 한 번에 들고 가니 손에서 반지가 빠질 만도 했다.
“선비님만 괜찮으시면 짐을 좀 들어 드릴까요?”
“응? 내 짐을 들어 준다고?”
“예. 혼자 드시기엔 너무 힘드실 거 같아요.”
“하하, 그럴 필요는 없… 잠깐만.”
웃으며 손사래 치던 선비가 흥미롭다는 듯 유원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 덕에 유원도 선비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선비가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속눈썹이 사락거렸다. 눈꼬리와 입술에는 붉은 연지를 칠했고, 피부는 비단처럼 결이 미끈했다. 마치 미인도 속 선녀를 보는 듯했다.
“너 정말 예쁘구나.”
“예…?”
“특히 이쪽 눈동자 말이야. 낮에 보니 꼭 서국에서 건너온 비취옥처럼 반짝거려.”
선비가 유원의 오른쪽 눈 아래를 손끝으로 톡 가리키며 감탄했다. 유수 같은 칭찬에 유원의 뺨이 빨개졌다. 예쁘다니.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저렇게 아름다운 분한테나 어울리는 표현이지 않나.
“미안하구나. 내가 예쁜 것에 약해서 허락도 안 받고 손을 댔네.”
손을 거둬 소매를 정돈한 선비가 싱긋 웃었다. 눈꼬리가 장난기 많은 여우처럼 배쭉 올라갔다.
“짐을 들어 주겠다고 했지?”
“예? 예. 선비님께서 원하신다면요.”
“그럼 아가만 괜찮다면 내 짐 좀 들어 주렴. 안 그래도 혼자 들긴 너무 힘들었거든.”
“아, 아가라니… 올해 성년입니다.”
“그럼 아가가 맞지 않니? 응?”
우아하게 눈을 깜빡거린 선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려 보인단 말을 많이 듣긴 했지만 그래도 아가야, 소리가 나올 정도는 아닌데.
“아무튼 도와줄 거니?”
“…예.”
“그럼 얼른 가자꾸나. 눈이라도 오면 걷기 귀찮거든. 여긴 시도 때도 없이 눈이 내려서 날이 좋을 때 빨리 가야 편해.”
선비가 갓과 옷매무새를 고치는 동안 유원은 그의 짐을 차곡차곡 품에 안았다. 보이는 부피만큼이나 무겁긴 했으나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전부 귀중품이니 소중하게 들어야 한다.”
“예, 예.”
분명 배려 차원에서 선비를 도와주는 것인데 그는 마치 삯을 주고 데려온 일꾼을 시키는 듯 자연스러웠다. 먼저 입으로 돕겠다 했으니 투정 부리기도 민망했다.
“그나저나 아가 이름은 뭐니?”
“유, 유원입니다. 홍유원이요.”
“홍유원? 탐스러운 유자가 생각 나는 이름이네. 나는 연녹수라고 한단다.”
태연하게 이름을 답한 그가 유원을 이끈 곳은 장터였다. 봇짐 진 행상인과 노새, 소로 바글바글한 길을 벗어나고도 그는 더욱 외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차 인적이 드물어지고 어느덧 길에 보이는 민가도 눈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저기요, 선비님.”
“선비님이 아니고 도사님.”
“도사요…?”
그래서 아까 골목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났던 거구나. 그러나 도사든 선비든 유원에게 당장 중요하지 않았다.
“그, 도사님. 그래서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음, 아직 좀 더?”
“여기서 좀 더요?”
“응.”
대체 어디서 사시기에 성 밖을 나와서도 한참 지나야 하는 걸까. 뒤늦게 걱정이 밀려들었다. 생판 남을 초면부터 덜컥 돕겠다고 하다니. 이 자가 어떤 사람일지도 모르면서 괜한 오지랖이었다.
혹시 사기꾼이면 어떡하지. 전문꾼들 중에는 자신을 약장수나 도사라고 속이는 경우도 많다던데. 이대로 영영 어머니도 다신 못 보고 먼 곳으로 팔려 가면 어떡하지.
“자, 아가. 좀만 힘내렴. 거의 다 왔으니까.”
산기슭을 넘어 평평한 길에 들어선 연녹수가 눈짓으로 저쪽 편을 가리켰다. 머지않아 측백나무들 사이로 아담한 집이 보였다.
“이런, 불청객이 와 있네.”
연녹수가 혀를 찼다. 불청객이란 말에 유원이 앞을 확인하니 웬 사람들이 집 앞을 지키듯 서 있었다. 눈대중으로 머릿수를 세어 보니 못해도 열이었다. 요수를 토벌하러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인원이었다.
담벼락에 기대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유원은 두 눈을 크게 떴다.
태백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