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아기씨! 괜찮으십니까?”
어깨를 외투로 감싸 부축하는 손길에 유원은 천천히 눈을 떴다. 손청준이 걱정스럽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원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괘, 괜찮습니다.”
“휴, 천만다행입니다. 한 발만 더 늦었어도 저 밑에 깔릴 뻔했지 뭡니까.”
깔릴 뻔했다고…? 그 말에 유원이 고개를 돌리자 반쯤 목이 잘려 나간 말이 마당에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꺼져 가는 숨을 연명하려는 듯 필사적으로 경련하던 말의 눈동자에서 점차 생기가 사라졌다. 그 모습에 마치 제 피가 마르는 듯한 섬뜩함마저 들 정도였다.
죽은 말 바로 옆에는 태백훈이 환도를 쥔 채 우뚝 서 있었다. 피가 묻은 창백한 얼굴에 어스름한 달빛이 얇은 비단처럼 겹쳐졌다.
“담배합에 뭐가 들어 있었던 겁니까?”
칼에 묻은 피를 탁탁 털어 낸 태백훈이 유원을 향해 물었다. 방금 저지른 살생에는 감흥도 없는 듯 냉랭한 얼굴이었다. 죽은 말에게 눈길을 한 번 준 유원이 떠듬거리며 말했다.
“아마도 독… 일 겁니다.”
“독이라고요?”
“예. 명칭은 모르지만 독이 분명합니다.”
“이름도 모르는데 독인 줄 어찌 압니까?”
“뭔가 냄새 비슷하게… 불쾌하고 쓴 느낌이 느껴졌습니다. 처음에는 악취인가 했는데, 점점 섬뜩하고 오싹해졌고요.”
“냄새? 불쾌한 느낌?”
태백훈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유원을 빤히 내려다봤다. 평생을 단련해 온 덕에 그는 발소리, 숨소리는 물론 미약한 바람 냄새도 차이를 구분 지을 수 있었다. 검을 쥐는 무부(武夫)라면 응당 갖춰야 할 생존 본능이었다.
하지만 담배합에서 아무 냄새도 맡지 못했다. 설령 뭔가 느꼈다 해도 연초(煙草)를 상시 담아 두는 담배합에서 쓴 냄새가 나는 건 자못 당연했다.
그런데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독이라고 확신하다니. 저 말을 믿어야 할까. 태백훈은 앳된 얼굴을 무심히 노려봤다. 마냥 천진하고 어리숙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른 속내를 품고 있진 않은가.
바닥에 나뒹구는 담배합으로 다가간 손청준이 신발코로 연초 분말을 흩트렸다. 가만히 살펴보던 그가 흠칫거리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물! 물을 가져와라!”
“예? 물이요? 불이라도 났습니까?”
난데없이 물을 가져오란 말에 관병이 어안이 벙벙한 듯 두리번거렸다. 하여간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을. 혀를 찬 곽현욱이 우물로 달려가 나무통에 물을 가득 실어 왔다.
나무통을 받아 든 손청준은 말도 하지 않고 급하게 물을 담배합과 연초 위로 부었다. 그러자 하얗던 가루에 마치 불이라도 붙은 듯 흰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지독한 냄새가 퍼졌다. 어찌나 독하고 매운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소매로 코를 가릴 정도였다.
“와씨, 똥간이 불타도 이런 냄새는 안 나겠다. 대체 이게 뭐냐?”
“짐독(鴆毒)이라는 독물이다.”
“짐독?”
코를 막은 곽현욱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그와 달리 태백훈은 짐작이 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대국 남방에서 서식한다는 짐새의 독을 말하는 것이로군.”
“예, 정확하십니다. 새매가 천년을 지내면 온몸에 독이 깃드는데, 그 깃을 뽑아 술에 담그면 한 모금만으로도 즉사한다고 하죠. 손만 대도 살이 썩고 눈이 멀 정도로 치명적인 독이라 제아무리 흉악한 살수들도 어지간하면 다루지 않습니다.”
짐독에 대해선 태백훈도 익히 들어본 바가 있었다. 무색무취(無色無臭)에 가까워 독약에 해박하다 알려진 의원들과 살수들도 쉬이 구분하지 못하며, 중독될 경우 열에 아홉은 죽었고 겨우 산다고 해도 천치가 되었다. 술에 타면 향 없는 독주가 되지만, 맑은 물에는 불에 닿은 고목처럼 타오르는 탓에 국내에는 반입이 일절 금지된 물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원혜에 큰 장이 섰던 날도 사흘 전이었다. 태백훈이 부임한 이래로 원혜에 대국 수입상이 찾아오는 빈도가 늘었다. 그들은 요수 가죽과 뼛가루를 사 가는 대신 대국에서만 생산하는 진귀한 담배와 옥, 약재 등을 팔곤 했다.
마침 윤 씨가 원혜에 들른 날도 사흘 전날 아침이지 않은가. 이는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수입상 중에 누군가가 연초로 위장해 독약을 반입한 게 틀림없습니다. 그 향리가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약상을 찾아간 것일 테고요.”
“심증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지.”
“그렇다면 송산 임 현령을 독살하려 했을까요.”
“으음, 그나마 짐작 가는 인물이라면 황 부윤 말대로 임 현령이 맞겠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다. 군용품 밀반출로 감시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독살을 시도하려 들 수 있을까. 제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그렇게 무모한 방식은 택하지 않을 터였다. 차라리 현령에게 고급 연초 같은 뇌물을 사사해 아군으로 들이는 방식이 나았을 터였다.
그럼 단순히 약상이 실수로 물건을 잘못 내준 것은 아닐까. 시중에 쉽게 들일 수도 없는 희귀한 독물은 부르는 게 값으로, 투구꽃만 하더라도 은 한 자루에 뒷거래될 정도였다. 게다가 이런 독물은 이미 주문자가 있어 어수룩하게 관리할 리는 없었다.
“손청준 자네라면, 독살하려고 이런 독을 굳이 쓸 것 같은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차라리 복어 독이나 비상(砒霜)을 쓰겠습니다. 구하는 방법도 그나마 쉽고, 대상자가 침수 들었을 때 목에 독침을 찌르기만 하면 되니까요. 비단 저만이 아니라 독을 쓸 줄 아는 자라면 다 비슷한 생각일 겁니다.”
태백훈도 같은 생각이었다. 심지어 독을 쓸 필요도 없이 맨몸으로 숲속에 던져두면 요수의 먹잇감이 되어 살아 돌아오지도 못하니 그 방법이 훨씬 간편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이 독물을 누군가가 필요로 했음은 분명했다.
잠자코 있던 황우경이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드물게 도사들이 쓰려고 찾는다곤 듣긴 했습니다.”
“도사?”
“어디까지나 들은 이야기라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도사(道士)라는 말에 유원은 지난번에 도적단을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태백훈으로 위장했던 자가 도사한테 받았다면서 부적 수십 장을 꺼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때 일이 생각났을까. 문득 담배합이 눈에 들어왔다. 뿔 없는 이무기 머리. 묘한 기시감은 점차 선명해졌다.
“담배합에 있는 문양, 저번에 산에서 도적단을 만났을 때 봤었어요.”
그 말에 네 사람이 전부 유원을 돌아봤다. 황우경이 말했다.
“도적단을 만났을 때 봤다고요?”
“그때, 영감 흉내를 내던 자가 요수를 퇴치하는 부적이라며 내민 종이에, 저런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던 것 같아요.”
꽤 시일이 지난 탓에 확신하긴 어렵지만 저런 문양이었음은 분명했다. 황우경이 태백훈에게 넌지시 말했다.
“도사라면, 그분을 찾아뵙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일단은.”
깊은숨을 내쉰 태백훈이 세 사람을 돌아봤다.
“황 부윤께선 지난 사건 기록을 재확인하시고 그때 수거해 온 유류품 중에 부적이 있는지 살펴봐 주세요.”
“예,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손청준과 곽현욱 너희 둘은 장터를 수소문해서, 당시 윤 씨를 목격한 자는 없는지. 어디에 갔고, 뭘 샀는지 알아봐라.”
활발하게 예, 하고 대답하는 손청준과 다르게 곽현욱은 못마땅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차마 도백께서 내린 군령(軍令)을 무시할 수는 없는지라 싫다는 대답은 못 하는 듯했다.
돌아가는 길은 이미 어두운 밤에 잠겨 있었다.
당시 상황을 묻겠다는 황우경은 날이 밝은 후에 따로 진술을 듣겠다며 유원을 돌려보냈다. 정신없이 감영으로 따라온 탓에 길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영감께선 제 다리가 훤칠하다 자랑이라도 하시고픈지 한걸음에 저만치 가 버리곤 했다. 잠깐 한눈이라도 팔았다간 그대로 놓쳐 버릴지도 몰라 유원은 어린 뱁새처럼 종종거리며 꽁무니를 쫓기 바빴다.
유원은 열심히 걷는 한편 태백훈을 흘끔거렸다. 무늬나 장식 하나 없는 검은 도포 자락이 그의 걸음에 맞춰 흩날릴 때마다 아까 봤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튀어 오른 피와 달빛이 내려앉은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웠다.
“앗!”
순간 멈춰 선 태백훈의 등에 부딪힌 유원이 이마를 문지르며 물러났다. 왜 갑자기 멈추셨지. 벌써 도착한 걸까. 이윽고 유원을 돌아본 태백훈의 얼굴이 무거웠다.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생각이라니요?”
“짐독은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독약입니다. 심지어 연초에 섞여 구분도 쉽지 않았고요. 그런데 다섯 걸음 족히 떨어진 자리에서 냄새로 알아차렸다니, 그 말을 정녕 믿으라는 겁니까?”
“여, 영감.”
“독은 어찌 그리 잘 아신답니까? 누가 보면 독살이라도 계획해 보신 줄 알겠습니다.”
추궁하는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아무래도 오해를 한 듯싶어 유원이 서둘러 해명했다.
“그, 그냥, 정말로 느낌으로 알았습니다. 희미하긴 했지만 불쾌한 냄새가 났었고, 영감께서 담배합을 건드렸을 때 오싹하면서 기분이 불쾌했습니다. 그래서 독이라고 확신했던 거구요.”
“내 평생 살면서 만져 보지도 않고 느낌으로만 독을 구분하는 사람은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면 궁중에 기미 상궁을 둘 이유가 있습니까?”
“저, 정말입니다. 제 어머니께 배운 것이에요.”
“어머니? 그대 어머니께서 재야에 숨어 계신 도사라도 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어머니께선 약초 냄새만으로도 독과 약을 구분하실 줄 아셨거든요. 자고로 동물이든 나무든 살기를 품으면 냄새는 물론 닿는 바람결까지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런 식으로 구분해 왔었고요.”
재차 설명했지만 태백훈은 영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긴 호원촌 사람들조차 터무니없다며 믿지 않은 말이긴 했다. 그나마 큰 스님께서 계실 때는 어머니를 선아(仙娥)라며 추켜세우는 이들이 있었지만, 스님께서 돌아가시고 산사가 헐린 뒤로는 어머니의 말을 믿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제 말이 틀리진 않았잖아요. 그런데도 영감께선, 제게 화만 내시고, 마, 말까지 그렇게 매정하게 죽여 버리시고요.”
“매정하다니?”
“그저 독에서 풍기는 냄새가 무서워서 흥분했을 뿐이었습니다. 고삐를 잡아 차분하게 달랬으면 금세 얌전해졌을 거예요.”
태백훈은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그러니까 말을 죽였다고 저리 한마디 쏘아붙인단 말인가. 그래 봤자 주인 없는 말이었고, 팔리든 도축되든 할 팔자였다. 게다가 아까 전에 말이 달려들던 순간 누가 구해 줬는지 알면서, 지금 저딴 소리를 한단 말인가.
이래서 상종하기가 싫었다. 가뜩이나 신경에 거슬리는 탓에 말도 걸기 싫었거늘.
“하마터면 말한테 짓밟혀 죽을 뻔한 주제에. 구해 줬더니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않고.”
“아….”
정확한 반박에 쭈뼛거리던 유원이 입술을 병아리 부리처럼 오므라트렸다.
“여, 영감께서도, 제게 고맙다고 안 하셨잖아요.”
“허?”
“저는 단지 영감께서 다치실까 봐 걱정했는데, 독살을 계획했냐고 추궁하시고요. 영감께서만 저를 미워하고 무시하실 줄 아신답니까? 저도 영감을 미워하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 그런데….”
달빛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독에 신경이 마비라도 되었는지, 입에서 술술 말이 잘도 나왔다. 뒤늦게 뱉은 말을 깨달은 유원이 입을 가렸다.
화나셨을까. 어떡하지. 슬그머니 눈을 들어 올려다보니 태백훈은 화났다기보다는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저, 저기, 영감, 그러니까….”
“그대 말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딱 잘라 대답한 태백훈이 몸을 돌렸다. 유원은 부리나케 그의 융복을 품에 안고 따라붙었다. 다행히 따라오지 말라는 말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