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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21)화 (21/60)

21화

한참 아궁이 청소를 하고 나오자 행랑채가 부산스러웠다. 감영 나갔던 태백훈이 막 돌아온 것이었다. 때맞춰 준비하던 저녁상이 곧바로 사랑채에 차려졌다. 뭔가 빠트린 부분은 없는지 확인한 김수남이 방 밖으로 물러났다. 당연히 주인어른 식상이라 유원도 물러나려던 찰나였다.

“저녁은 벌써 드셨습니까?”

저한테 말을 걸었다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해 유원은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태백훈이 고개를 지그시 옆으로 기울였다. 대답을 채근하는 듯한 얼굴에 유원이 서둘러 대답했다.

“아, 아직입니다. 이제 찬간 가서 먹으려고요.”

“…옆으로 오세요.”

낮게 깔린 목소리에 문 너머에 서 있던 유원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불편한가? 방이 추우신가, 아니면 찬이 이상한가. 유원은 무릎걸음으로 슬금슬금 문가에 자리 잡았다. 그러자 태백훈이 눈짓으로 상을 가리켰다.

“저녁 전이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멀리 갈 필요 없이 그냥 여기서 드십시오.”

“예? 여기서요?”

멀찍이 앉아 있던 유원이 놀라 크게 되물었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던 태백훈이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예, 방금 말했잖습니까. 여기서 드세요.”

“그, 그러니까, 지금이요?”

“앵무새도 아니고. 같은 말을 몇 번을 하라는 겁니까?”

태백훈은 슬슬 짜증이 난다는 듯 날카롭게 대꾸했다. 빈정거림이 이어질세라 유원은 두 눈을 내리깐 한편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바깥에서 남몰래 머리를 부딪히셨나? 그도 아니면 아예 작정하고 눈치 주려고?

유원은 마지못해 태백훈이 시킨 대로 상 옆에 앉았다. 상 위에는 여벌의 수저가 놓여 있었다. 식사 중 영감께서 필요하면 쓰도록 준비해 둔 비상용이었다. 덤덤하게 젓가락질하던 태백훈이 물로 입을 축였다.

“김 집사한테 물어 대충 정황은 전해 들었습니다. 본보기로 볼기 몇 대를 때리고 엄중히 경고하라고 했지만, 그대에게 품은 억하심정까지 일일이 단속할 순 없을 겁니다.”

“…….”

요컨대 가벼운 경고로 그쳤다는 소리였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유원을 때린 것은 아니었고 보는 앞에서 비웃거나 들으란 듯이 조롱을 던진 정도였다. 이 정도로 엄벌을 주기엔 과했다. 결과적으로는 굶지 않았으니 된 거 아닌가. 집안 분위기를 흐려 놨다면서 되레 혼날 수도 있었는데 큰소리도 듣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하여 감사하다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그러니 앞으로는 저녁마다 찬간으로 나가지 말고 내 상에서 드세요.”

그 말에 유원은 막 입에 넣은 밥을 도로 뱉을 뻔했다. 방금 잘못 들은 건가. 제대로 씹지도 않고 급하게 삼킨 유원이 떨떠름한 얼굴로 태백훈을 올려다봤다.

“…매 저녁마다요?”

“불가피하게 부재가 길어질 때를 제외하고요.”

“하지만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가 드나드는 것조차 불편해하셨잖아요.”

“내 허락이 없을 땐 불필요한 출입은 당연히 삼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내 저녁상 들어올 때면 그대도 저녁 드실 때인데, 번거롭게 두 번 치우고 내보내고 할 필요 없이 하자는 것이고.”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제 끼니 정도는 알아서 챙길 수 있습니다.”

“알아서 챙긴다? 그걸 아시는 분이 이틀 동안 굶으셨고요?”

“그건….”

“어디 야산에서 도토리 같은 열매나 주워다가 잡수실 것이 뻔한데.”

유원은 할 말을 잃은 채 아랫입술만 잘근거렸다. 흡사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 천치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제집에서 외부 음식을 먹던 모습이 그토록 아니꼽고 황당했던가.

“형님! 백훈 형님!”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더니 곽현욱이 문을 벌컥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형님! 긴급사태입니다! 성문 앞에…!”

상을 두고 마주 앉아 있던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곽현욱이 당황하며 주춤 물러났다.

“크흠, 실례했습니다! 잡수시는 데 방해될 테니 나가 보겠습니다.”

“무슨 일인데.”

“아닙니다. 영감. 진지 잡수시고 나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방금 네 입으로 긴급 사태라고 했잖느냐.”

심상찮은 대화 흐름에 유원은 눈치껏 수저를 내려놓고 슬그머니 문가로 피신했다. 목을 가다듬은 곽현욱이 입을 열었다.

“성문 앞에서 송산 향리가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 * *

말에서 내리는 태백훈을 확인한 황우경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영감.”

“송산 향리 윤 씨가 죽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만. 영감, 뒤에 계신 그분께선 어쩐 일로?”

“그분?”

황우경의 조심스러운 말에 태백훈이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자 말 뒤에 유원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처소에 얌전히 있어야 할 자가 여긴 왜 따라왔지. 미간을 찌푸린 태백훈이 말했다.

“무슨 일로 따라오신 겁니까?”

“김 집사께서 영감이 입으실 융복과 전대를 챙겨 달라 하셔서요.”

무슨 소리냐는 듯 싸늘한 무표정에 유원이 품에 안고 있던 옷과 허리띠를 내밀었다. 어차피 공식적인 입청도 아니라 격식을 차릴 필요도 없는데. 속으로 혀를 찬 태백훈이 도로 돌려보내려던 차에 황우경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기씨께서 원혜 오실 적에 도적단들을 만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마침 오신 김에 당시 상황도 여쭈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당시 현장에서 쓸 만한 증거물은 다 가져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소한 부분도 큰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고 영감께서 매번 말씀하셨잖습니까.”

반박할 여지 없는 말에 태백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원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그저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몸을 휙 돌린 태백훈이 황우경을 쳐다봤다.

“그래서 시신은 어디 뒀지?”

황우경은 즉시 태백훈을 관청 안쪽으로 안내했다. 중문을 넘어서자 마당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유원도 아는 얼굴이었다. 그를 알아본 곽현욱이 눈썹을 찌푸렸다.

“얼씨구, 한량이 납셨구만?”

“이런, 이런. 외무에서 돌아온 친구를 봤으면 반가워해야지.”

“친구는 개뿔이 친구.”

“하여간 곽 대장께선 분대장이 되시고도 여전히 새침하시구만.”

“뭐, 뭐시라? 새침?”

말싸움이 길어질 듯하자 황우경이 흠, 흠, 헛기침을 요란하게 했다. 적당히 하라는 무언의 지시에 곽현욱이 별수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뒤로 물러나던 손청준은 옆에 있던 유원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여기 올 줄 미처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멍석 위에 수습된 시신 두 구가 천에 덮여 나란히 놓여 있었다. 뒷짐 진 태백훈이 발끝으로 천을 휙 걷어 올렸다. 한 사람은 눈을 홉뜬 채 목이 꺾여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몸통이 반쯤 찢겨 넝마처럼 처참했다.

“왼편에 있는 자가 송산현 오급 향리 윤길종입니다. 오른편은 그의 심복이고요.”

맨 뒤에서도 얼핏 보이는 시신에 유원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지난번 도적단 습격 때 봤던 장면들이 또다시 떠오르는 듯해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반면 태백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몸을 숙여 시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둘 말고 추가로 발견된 시신이나 수상한 자는?”

“즉시 십 리 안팎을 수색했지만 더 발견된 사체는 없었습니다. 수상한 자는 보이지 않았고요.”

성문 주변을 순찰하던 중에 사체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기껏해야 객사 당한 나그네려니 싶었다. 매달 큰 장이 서는 만큼 시내 치안에 신경을 쓰지만, 간혹 산길을 잘못 들어선 운 나쁜 사람들이 굶주린 요수에게 쫓기다 죽는 사고도 적잖았다.

그런데 발견된 사체가 향리, 그것도 송산 실세라던 자였다. 군용품 밀반출 사건으로 송산에 감시를 붙여 둔 때에 그 대상자가 죽은 채로 발견된 점은 우연이라기에도 석연찮았다.

“발견된 장소는 어디쯤이지?”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백봉재 아랫길입니다. 성문에서 북서 은원봉으로 이어지는 산길 중에선 가장 가까운 곳이고요.”

“북쪽이라면 송산이 아니라 문경이지 않나.”

이에 손청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문경이 목적지였는지는 확실하진 않을 겁니다. 샛길로 빠지자면 얼마든지 빠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사람도 다니지 않는 산길을 지나기는 쉽지 않을 텐데. 그것도 단둘이서.”

일단 확실한 점은 요수 같은 산짐승에게 뜯긴 꼴은 아니었다. 애초에 요수한테 물려 갔다면 뼛조각도 없이 발견도 못 되었으리라. 게다가 도내 물정 하나 모르는 외지인도 아니고 오급 향리가 요수들 습격에 대비조차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대체 이들은 왜 원혜로 왔던 걸까. 고작 장이나 구경하겠다고 사흘씩 말을 타고 왔을 리는 없을 텐데. 도착한 지 하루 만에, 그것도 야심한 밤이 다 되어서야 성문을 빠져나갔다니. 누군가의 눈을 피해 다니는 듯한 수상쩍은 태도가 아닌가.

“출입 당시에도 저 둘이었다던가?”

“경비병에게 확인받은 바로는 사흘 전 새벽에 저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왔던 것으로 기억하고, 그날 밤에 출성(出城)했다고 합니다.”

“사흘 전이라?”

황우경의 대답에 태백훈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시신의 겉면을 살폈다. 원경도는 다른 지방보다 유난히 춥고 건조한 곳이었다. 그래서 변사자의 경우 사체가 부패하기 전에 이미 동물들이 먹어 치우곤 했다. 그 때문에 원경도에서는 시신을 매장하기보다 풍장하는 관습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눈앞의 시신은, 형체가 멀쩡한 데 비해 며칠간 장독에 넣어 둔 듯 썩었음에도 시취가 풍기지 않았다.

그때, 관병 하나가 털빛이 붉은 말 한 필을 끌고 마당으로 들어왔다.

“영감. 말을 데려왔습니다.”

고삐에 붙들린 말은 중간종마로 도내에서 흔한 품종이었다. 겁을 잔뜩 먹었는지 말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크륵크륵 거친 숨을 내쉬었다. 보기만 해도 괴로워 보이는 숨소리에 유원은 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곁눈질로 말을 확인한 황우경이 말했다.

“당시 현장에서 같이 발견되었던 말입니다. 대강 소지품은 살펴봤었지만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문득 묘한 느낌에 유원은 킁킁 코를 찡긋거렸다. 어디선가 섬뜩한 냄새가 났다. 아니, 냄새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굳이 치면 코와 눈 주변을 얇은 바늘 같은 바람이 알알하게 건드리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주변에 서 있는 그 누구도 딱히 이 악취에 별 반응이 없었다.

찬 바람을 순간 잘못 느낀 걸까. 유원이 어색하게 코를 만지작거리는 사이에 태백훈은 안장에 걸려 있던 피혁 가방을 마당에 늘어놨다. 황우경이 말한 대로 소지품 중에 특별하게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동전 주머니와 지도, 부싯돌과 휴대용 장죽, 그리고 손바닥만 한 담배합 하나.

“이 안도 살펴봤나?”

태백훈이 담배합을 들어 올리자 희미하게만 느껴지던 섬뜩함이 더욱 선명해졌다.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소름 끼치는 기운은 틀림없었다.

독이다.

“영감, 손대지 마세요!”

다급히 앞으로 뛰어나온 유원이 그의 손에 들린 담배합을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 안에 들어 있던 연초 분말이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순간 북쪽에서 불어든 바람이 마당을 휩쓸었다. 끙끙거리던 말이 푸르릉. 거칠게 숨과 함께 울부짖으며 크게 몸부림쳤다.

“어, 이 녀석이, 갑자기, 워이, 워이!”

말이 펄쩍거리는 힘을 견디지 못한 관병이 순간 고삐를 놓쳤다. 풀려난 말이 고개를 마구 흔들며 무작정 유원을 향해 돌진했다.

“아기씨!”

“유원 아기씨!”

당황한 곽현욱과 손청준이 일제히 유원을 향해 소리 질렀다. 눈을 질끈 감은 유원이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매서운 발길질 대신 후텁지근한 물기가 후드득 얼굴과 옷 위로 쏟아졌다.

피비린내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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